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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년 15대 대선 당시 김대중 후보과 맞서기 위한 한나라당 경선 대회에서 이인제씨는 “자신은 외모도 박정희를 닮았다”며 지지를 호소했고, 지난 30일에는 박근혜씨가 침몰하는 한나라당을 회생시키기 위해 아버지에 대한 향수를 들고 나왔다. 아버지의 정치적 이미지에 몸을 기대며 자신이 '육체적 딸'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 딸'임을 인정했다.

한국 사회에서 사회적, 정치적으로 어려움과 혼돈이 닥칠 때마다 ‘제2의 박정희’의 출현을 기대하는 여론이 조성되곤 한다.

‘박정희 신드롬’으로 불려지는 사회현상이 탄핵정국을 맞이하여 ‘군사 쿠데타’로 발전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있다는 기사(“쿠데타 필요 없다. 헌재가 노무현 경질해주시면…”)를 <오마이뉴스>에서 읽었다. 지난 우리의 민주화 과정을 떠올려보면 상상만 해도 실로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31일, <오마이뉴스>와 스카이라이프가 주최한 각 당 대변인 초청토론회에서 유운영 자민련 대변인은 노무현 지지세력을 ‘친북반미좌파 세력’으로 규정했다.

‘친북반미좌파’라는 말을 들으며 필자는 아직도 박정희의 망령이 한국 사회에 얼마나 뿌리깊게 박혀있는지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친북’이라는 말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이룩한 ‘햇볕정책’의 업적을 과소평가 하려는 의도뿐 아니라, 통일로 나아가는 21세기에 아직도 북한과의 적대감을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시대착오적인 발상이 숨어있다.

‘무조건적인 반공’은 박정희 레드 콤플렉스의 산물

박정희는 한 때 군부 안의 남로당 프락치로 활동했다. 그로 인해 1948년 11월에 체포된 그는 기소되어 사형을 구형받았다. 하지만 그는 죽지 않고 살아 남았다. 군부 안의 좌익을 색출하는 숙군 수사에 적극 참여했기 때문이었다. 좌익세력으로 활동했던 박정희가 새롭게 변신하는 순간이었다.

군사내란에 성공한 후에도 박정희의 이러한 좌익활동은 그의 족쇄가 되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해 더욱 극렬한 반공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황태성 간첩사건’에서 드러났듯이 박정희는 심각한 레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고, 그러한 그의 사상은 18년 동안 고스란히 한국 사회를 지배했다. 반공이 국시가 된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노력으로 북한과의 관계가 이전 정권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개선되었다. 이러한 노력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다시는 ‘무조건적인 반공’이 발을 들여놓을 수 없도록 해야 한다. 그야말로 민족을 분열시키는 행동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민족 분열의 중심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베트남 파병의 아픔을 기억하자

이라크 파병 문제로 시끄러운 현실을 보고 있노라면 박정희 독재정권에서 이루어진 베트남 파병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박정희는 동아시아의 평화와 미국을 비롯한 우방과의 단결을 파병 이유로 내세웠지만, 파병은 정권 유지를 위해 이루어졌다. 미국은 그의 좌익 전력이 마음에 걸려 박정희 정권을 순순히 인정해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한일협정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반정부 시위가 연일 계속되는 상황에서 박정희 정권은 심한 위기감을 느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미국의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저자세로 베트남 파병에 응했고, 그 결과는 참혹했다.

지난 28일,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팀은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병장>이라는 시사프로그램을 방영했다. 이 방송에 따르면 당시 미국은 ‘모어 플랙(more flag)’라는 기치아래 23개국에 파병을 요청했다. 하지만 이중 17개국은 미국의 파병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 다만 한국을 포함한 6개국만이 파병했을 뿐이다. 왜 그랬을까?

미국 콜럼비아 대학의 찰스 암스트롱 교수는 “대부분의 국가들이 베트남 전쟁을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전쟁이라기 보다 베트남의 독립을 저지하기 위한 전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며, 프랑스 식민정책을 미국이 이어 받기 위한 전쟁으로 여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국의 적극적인 파병으로 미국은 박정희를 백악관으로 초청하는데, 이는 더 이상 박정희 정권의 좌익 전력을 문제 삼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그렇다면 미국은 한국군의 파병을 왜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것일까? 그것은 베트남 전쟁이 백인과 황인종의 인종전쟁으로 보여지는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고, 미군의 1인당 군 유지비용(1만3000달러)이 한국군의 그것(5000달러)에 약 3배에 달했기 때문이었다. 연병력 32만 명의 한국군으로 인해 미국은 무려 25억 6천만달러(8천달러×32만명 = 25억 6천만달러)를 절약할 수 있었다고 한다.

방송에 따르면 미국의 베트남 전쟁비용은 총 1조 110억달러로 집계된다. 한국이 베트남 특수 10억달러는 미국의 전쟁비용 0.1%에 불과한 것이다. 과연 이러한 전쟁이 한국에 경제적 부흥을 안겨준 것일까.

이 방송 말미에는 다음과 같은 자막이 나온다. “부상 1만962명, 2004년 현재 고엽제 7만948명, PTSD(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는 아직 조사조차 이루어지지 않음, 사망 5066명.” 그 자막과 함께 ‘아직도 월남전에 참전하는 악몽’을 꾼다는 참전 군인들의 인터뷰가 나온다.

베트남 참전과 관련하여 분명한 것은 박정희 대통령의 미국을 대하는 태도이다. 그는 자기 정권을 위해 이 땅의 군인들에게 명분 없는 전쟁에 참전을 강요했다.

그것이 과연 누구를 위한 파병이었나. 역사는 말하고 있다. 베트남 파병은 국익을 위한 파병이 아니었으면, 박 정권을 위한 파병이었다는 것을. 박 정권은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3선 개헌에 성공했으며, 그 후 죽을 때까지 권좌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박정희 신드롬’, '쿠데타 운운하는 세력'은 가라

‘친북반미’라는 말은 그만큼 공허하다. 역사가 이를 증명해주고 있다. 그리고 진실을 왜곡하고 주입한 역사의 한가운데에 박정희가 있다. 그러한 군사정권 독재의 부활을 꿈꾸는 세력은 결단코 용서받을 수 없다.

이대 김용서 교수의 ‘군사 쿠데타 발언’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박정희와 전두환의 악몽을 다시 부추기려는 그의 발언이 진정 언론의 왜곡된 보도에 의한 것이라면, 김 교수는 확실한 입장표명을 해야 할 것이다. 이제 아무도 말을 내뱉어 놓고 대충 넘어가려고 할 수 없다.

아직도 우리 근현대사에는 눈물과 아픔이 곳곳에 스며있다. 그 아픔과 고통을 아는 민중이 쿠데타를 운운하는 지식인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아울러 박정희의 왜곡된 역사적 관점을 바로잡고, 진실을 밝힐 수 있는 시점이 지금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시민은 두 눈을 부릅뜨고 쿠데타를 운운하는 세력을 지켜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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