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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02년 10월 29일 오전 국방부 브리핑룸에서 정수성 허원근일병사건특별수사단장이 군수사 중간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 연합뉴스 진성철
의문사진상규명위(이하 의문사위)는 12일 기자회견을 통해 지난 2002년 8월말에 구성됐던 국방부 특별조사단이 허원근 일병 사망사건을 '은폐했다'고 주장했다.

의문사위는 특히 "허 일병의 총상은 3군데이지만 총성은 2발밖에 들리지 않았고, 탄피는 2개밖에 발견되지 않았다"면서 "국방부 특조단은 총성이 3번 들렸다고 왜곡했고, 현장에서 탄피 3개가 모두 발견되었다고 억지주장을 하며 총번 수정을 은폐했다"고 밝혔다.

의문사위는 또 "특조단은 사건 현장과 관련한 중요 진술을 무시했고, 위압적인 방법으로 번복하도록 했다"면서 당시 중대본부원들의 특조단 진술 내용과, 허 일병 부검의사의 진술 번복 유도 내용을 공개했다.

의문사위는 이어 "전 국방부 특조단장은 임기 후에도 지속적으로 2기 의문사위원회의 조사활동을 간섭하고 방해했다"고 주장했다.

다음은 이날 의문사위의 기자회견 내용과 <오마이뉴스>의 자체취재 내용을 재구성해 정리한 것이다.
허원근 일병 사망사건 관련 주요 쟁점들

주요 쟁점들

국방부 특조단

2기 의문사진상규명위

총성

총성이 3발 들림

총성은 2발만 청취됨

탄피

탄피는 현장에서 3개 모두 발견됐다

헌병대도 현장에서 2개의 탄피만 발견했다고 진술함

총번수정

수사절차상의 하자

- 허원근 일병과 사건관련자의 총번이 모두 수정됨
-총기감식관 "수사절차상의 하자가 아니라 총기가 바뀐 것"
-특조단 한 조사관 "허 일병의 총기라고 확정할 수 없다"

분대장
복귀신고 등

사건 당일 오전 분대장 복귀신고 등 각종신고가 있었음

- 사건 당일 오전 분대장 복귀신고와 신병신고는 없었음
-국방부 특조단 한 조사관 "분대장 신고는 사건 전날인 4월 1일 있었던 것으로 판단"

사체목격장소

폐유류고

폐유류고가 아니라 사체는 옮겨졌다

새로운 사진
2장

(헌병대 수사기록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사진 2장이 특조단의 기록 속에서 우연히 발견됨)

현장사진 2장을 누가, 어떻게, 어디서 입수했는지 아직까지도 밝히지 않고 있음

* 의문사진상규명위에서 제기한 기타 의혹사항들
- 특조단은 조사 초기 사건 은폐자로 지목된 당시 헌병대 수사관으로부터 1기 의문사진상규명위 조사의 문제점에 대해 브리핑을 받음.
- 헌병대 기록과 맞지 않는 참고인 진술들은 모두 '신뢰성없음'으로 판단.
- 참고인들에게 위압적인 방법을 사용해 첫번째 진술을 번복하도록 유도함.
-특조단 조사기록에는 '기록목록' 등이 전혀 없고 기록에 대한 넘버링이 순차적이지 않으며 곳곳이 중복 편철돼 있어 공식자료로 판단할 수 없음.
- 특조단은 타살장면 목격했다고 진술한 참고인을 조사하지 않음.  특조단은 참고인이 조사를 회피했다고 주장했지만 특조단이 조사장소를 국방부로만 고집해 조사약속이 무산됨.
-정수성 전 특조단장(1군사령관)은 특조단 해체 이후에도 현장방문조사와 참고인 진술 청취 등을 방해함.

ⓒ 구영식

▲허 일병 사건 수사의 경과=강원도 화천의 한 GOP 부대 중대본부에 근무하던 허원근 일병은 1984년 4월2일 사망했다. 사건 당시 자살로 결론을 내린 군수사 당국은 99년까지 총 세차례에 걸쳐 이 사건을 재수사했고, 2002년 8월20일 의문사위가 허 일병 타살과 군 수사당국의 은폐조작 경위에 대해 중간조사결과를 발표하자, 8월28일 국방부는 특별조사단(단장 정수성 현 1군사령관. 육군대장)을 결성해 재조사에 착수했다.

국방부 특별조사단은 3달동안에 걸쳐 조사를 마친 뒤 2002년 11월28일 기자회견을 열고 "허 일병이 당시 중대장 김아무개 대위의 가혹행위에 못이겨 자신의 소총으로 자살했으며, 허 일병의 죽음을 타살로 발표한 (1기) 의문사위의 조사는 모두 조작"이라고 발표했자.

하지만 1기 의문사위는 "특조단 조사결과를 신뢰할 수 없다"고 반박했고, 지난해 11월 출범한 2기 의문사위도 허원근 사건에 대한 재조사 결과, 12일 기자회견을 통해, 국방부 특조단이 오히려 사건을 재은폐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음은 의문사위가 제기한 재은폐 의혹을 정리한 것이다.

▲의문사위, 국방부 특조단 수사의 재은폐 의혹 제기=국방부 특조단은 1>84년 4월2일 오전 현장에서 회수된 3발의 탄피가 모두 허 일병 총에서 발사된 것이 확인되고 2>사건에 앞서 당일 오전 분대장 복귀신고 등 정상적인 일과가 진행되었으며 3>총성이 당일 오전 10시-11시경에 3발이 청취되었기 때문에 이날 새벽 내무반에서 노00중사에 의한 오발(허 일병 사망)은 없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에 2기 의문사위는 국방부 특조단의 보고서 일부를 전달받아 조사를 벌여왔다. 하지만 의문사위는 특조단이 관련자들의 핵심진술을 누락하거나, 당초 진술 내용을 번복하게 하고, 의문사위 조사를 방해하는 방법으로 사망사건을 재은폐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총상은 3군데인데, 총성은 2발, 탄피도 2발?=특조단은 사건 현장에서 회수된 3발의 탄피가 모두 허 일병 총에서 발사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사건 당일 헌병대는 현장에서 탄피 2개만을 발견했다.(특조단은 "탄피 1발은 다음날 찾았다"고 발표) 특조단 조사에서 총성을 청취한 부대원들도 모두 2발만을 청취했다고 진술하고 있다.

의문사위는 특히 3발의 총알이 허 일병의 총에서 발사된 것이라는 특조단의 수사 결과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의문사위는 지난달 18일 "허 일병의 총번이 헌병대 작성의 총기감정의뢰서와 육군과학수사연구소 작성의 공문접수대장에서 수기로 총번이 수정되었고, 사건 관련자들의 총기도 수정되었음이 확인되어 총기는 허원근의 총기라고 할 수 없다"고 발표한 바 있다. 이에 국방부는 "수사 절차상의 하자"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육군과학수사연구소 총기감식관들은 "총번 수정이 수사절차상의 하자가 아니라 총기가 바뀐 것으로 보인다"고 의문사위에 진술하고 있다. 결국 허 일병 몸을 관통한 3발의 총알이 다른 사람의 총기에서 발사되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자살이 아니라 타살 의혹이 짙다는 것이다.

▲사건 당일 분대장 복귀신고가 있었나?=특조단의 조사결과처럼 4월2일 오전 10시경에 사망했다면 분대장 복귀신고 등이 이뤄졌을 것이고, 의문사위의 주장처럼 이날 새벽 노00 중사의 오발에 의해 허 일병이 사망했다면 부대내 정상적인 행정절차가 진행되지 못했을 개연성이 크다.

이와 관련 특조단은 "당일 오전 중대본부 요원들의 일과는 정상적이었고, 분대장 복귀신고 등 각종 신고가 있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특조단 조사과정에서 한 분대장은 "당일 오전 신고를 하지 않았다. 분대장 복귀 신고는 사건이 일어나기 전날(4월11일) 했다"고 진술했고, 노00 중사 역시 "분대장 신고는 4월1일에 했다"고 진술하고 있다.

의문사위는 "헌병대는 사건 당일 새벽에 일어난 사고를 은폐하기 위해 사건 당일 오전 오전 중대본부는 일상적인 일과가 진행된 것처럼 꾸몄으며 국방부 특조단은 그 내용을 무작정 신뢰했다"고 주장했다.

▲허 일병 사체는 폐유류고에서 처음으로 발견됐나?=국방부 특조단은 "허 일병 사체는 4월2일 오후 1시경 폐유류고에서 발견됐다"고 발표했다. 특조단 조사에서 여러명의 참고인들이 "현장 사진상에서 보이는 장소는 내가 사체를 목격한 장소가 아니다"라고 말했지만, 이같은 진술은 무시했다.

당시 중대본부 요원 권00씨와 오00씨는 "(특조단에서 제시한 사체 현장 사진을 보고) 내가 목격한 것과는 다른 사진이다. 나무로된 목책같은 것은 없었다"고 진술했고, 심지어 헌병대 수사관 이00씨조차도 "내가 본 사고장소는 분명히 여기가 아닌데..."라고 진술했다.

따라서 의문사위는 "사체는 폐유류고로 옮겨진 것이며, 이는 2기 위원회가 최근 발표한 미국의 현장전문가 등의 소견과 일치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특조단, 참고인 진술 위압적인 방법으로 번복 유도?=허 일병의 부검의 박00씨는 특조단 1회 진술에서 구체적인 사유들을 근거로 "허 일병은 자살로 보기 어렵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의문사위는 "정수성 특조단장을 비롯한 10여명이 넘는 수사관들이 참석한 가운데 박씨를 집중 추궁해 자신들의 1회 진술의 번복을 유도했다"면서 "박씨의 2차 진술마저 왜곡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가령 박씨는 1차 진술에서 허 일병의 오른쪽 가슴의 총창과 왼쪽, 머리의 총창의 색깔이 차이가 나는 이유에 대해 "시간경과 때문이다"라고 밝혔다. 결국 오른쪽 가슴에 총을 맞았고, 시간이 경과된 뒤에 또다른 두발의 총알을 맞았다는 분석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허 일병은 스스로 오른쪽 가슴과 왼쪽 가슴, 머리에 총을 쐈다"는 특조단의 수사결과가 거짓이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오른쪽 가슴에 총을 맞고 한참이 지난 뒤 왼쪽 가슴과 머리에 총을 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박씨는 10여명이 넘는 수사관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2차 진술(녹취록에 근거)에서도 '총창 색깔이 차이가 나는 이유'를 묻는 거듭된 추궁에 "자신없다, 그 근거가 사실 막연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특조단이 작성한 진술조서에는 "색깔 차이는 사망과 시간경과와는 상관없다"고 적시되어 있다.

박씨는 2차 진술시 1차 때와 마찬가지로 "총상은 오른쪽 가슴, 왼쪽, 머리 등의 순이다"라고 밝혔지만, 2차 진술 조서에는 "현 시점에서 어느 부위 총상이 먼저라고 확실히 말씀드릴 수 없다"고 적시되어 있다. 따라서 의문사위는 "특조단은 박씨의 진술조차 조작했다"고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국방부 특조단은 사건 당일 새벽에 대대장과 보안부관이 사고소식을 듣고 3중대로 갔다고 진술했던 대대본부 사병(현재 민간인)들을 불러 당시 대대장과 대질심문을 했다. 의문사위가 확보한 녹취록에 따르면 이 자리에서 대대장은 "당신들의 그 진술로 인해서 군인인 우리가 개망신이 돼버렸다"고 험한 말을 하기도 했다.

당시 대질에 참여했던 정00씨는 2기 위원회에서 "당시 대대장이 대질 심문에 참석, 참고인들에게 '말 잘해라'하면서 고발까지 갈 수 있다며 위협적인 분위기를 조성했다. 제가 '당신들 왜 인신공격을 하냐'고 말하면서부터 말싸움이 되었다"고 진술했다.

▲허 일병 타살장면 목격했다는 전00씨가 특조단 조사에 참석하지 못한 이유?=특조단은 1기 의문사위에서 "타살장면을 목격했다"고 진술한 전00씨를 조사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 "의문사위 조사관의 조사 방해, 전00씨의 회피, 잠적"이라고 발표한 바 있다. 하지만 전00씨는 2기 의문사위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참고인 조사에 응하겠다고 했고, 국방부 외 제3의 장소를 제안했다. 모든 조사 과정을 녹화하기로 약속했으나 국방부 특조단장과 다른 조사관들이 '국방부가 아니면 안된다'고 고집해 약속이 무산됐다."

▲정수성 전 특조단장의 조사 방해?=2기 의문사위가 지난 3월 현장 방문조사를 하려했지만, 당시 정수성 1군 사령관은 현 국방부 특조단장에게 전화를 걸어 "의문사위와 함께 동행하려고 하는 김00씨는 일방적으로 1기 조사위원회 편을 든 사람이기 때문에 객관성이 떨어지므로 현장출입이 불가하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의문사위는 또 "출석요구서를 보낸 사람에게서 연락이 왔는 데, '정 사령관이 출석하지 말라고 했다'면서 출석 요구에 응하지 못하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면서 "2기 위원회에 출석해 조사를 받고 있는 사람에게 두 번씩이나 전화해 '너 왜 거기있냐, 나에게 보고하지도 않았다'고 말하면서 진술 청취를 방해했다"고 밝혔다.

▲국방부가 특조단 구성을 팀제로 바꾼 이유?=지금까지의 전 과정을 통해 주목해야할 점은 국방부 특조단 조사 초기 군검찰로 구성되어 있던 수사 1과의 활동 내역이다. 당시 군검찰은 지난 84년 사건 초기부터 허 일병 사건에 대해 일관되게 주장했던 헌병의 '자살' 결론을 뒤집을만한 정황과 진술 등을 확보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2002년 8월 말 발족한 허 일병 사망사건에 대한 국방부 특조단의 구성은 크게 총괄과, 수사 1과, 수사 2과로 나뉘어 있었다. 총괄과는 제반 업무를 맡았고, 수사 1과는 군검찰관, 수사 2과는 헌병이 배치되어 있었다. 수사 1과, 2과는 수사 관련 활동을 하는 실질적인 부서였다.

의문사위가 특조단의 수사내용을 분석한 결과 수사 1과에서 초창기에 진행된 관련자 진술 등은 허 일병 사망은 타살혐의가 짙다는 쪽으로 기울어져있었다고 한다. 초창기 군검찰관들의 수사 내용은 1기 의문사위의 결론과 그 맥락을 같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특조단의 수사 편제가 바뀌고 난 뒤부터는 조사 결과가 자살쪽으로 뒤바뀌었다는게 의문사위가 제기하는 의혹이다. 편제가 바뀐 정확한 시기는 확인하기 어려우나, 수사 1, 2과 편제가 7개의 팀 편재로 바뀌었다. 각 팀은 군검찰관과 헌병 1명씩 두명으로 구성됐다.

의문사위의 한 관계자는 "군검찰관들의 수사 내용이 진일보적이기 때문에 당초부터 사건을 은폐한 헌병을 한명씩 짝지워줬다"면서 "수사 1과에서 활동했던 한 인사는 '팀제로 바뀐 뒤부터 헌병은 내 뒤에서 내가 무슨 조사를 벌이고 있는지에 대해 감시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말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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