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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렌 니어링의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책표지
헬렌 니어링의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책표지 ⓒ 보리
반세기를 함께 살아온 남편에게 이토록 한없는 존경과 사랑이 뚝뚝 묻어나는 헌사를 바친 여인을 나는 이제껏 들어보지 못했다. 이혼이 만연한 이 시대에, 이들 부부는 얼마나 금실이 좋았기에 반백년을 같이 살았으면서도 그 사랑이 식을 줄을 모를까?

저자 헬렌 니어링이 이 책을 쓴 것은 87세로 백발 할머니가 다 되었을 때였다. 8년 전 100세의 나이에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 스콧 니어링과 더불어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며 이 감동적인 기록을 남겼다고 한다.

이제 그녀도 이 세상 사람은 아니다(1995년 사망). 그렇지만, 이들 부부가 살아간 위대한 인생의 발자취는 소유 중심의 도시 문명에 찌든 우리 현대인들에게 여전히 큰 울림과 도전을 주고 있다.

헬렌은 유복한 가정 출신에다 신지학회(Theosophical Society) 회원이었고, 뛰어난 바이올린 연주가였으며, 20대 초반까지 유명한 인도 명상가인 크리슈나무르티의 연인이기도 했다. 반면 남편 스콧은 한때 명망 있는 경제학 교수였으나, 사회주의자로 반전평화 운동에 헌신하다가 대학 강단에서 내쫓기고 가정에서 버림 받은 사람이었다.

나이로도 무려 20여년 격차가 있고, 살아온 배경도 너무나 다른 헬렌과 스콧을 하나로 이어준 연결고리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그들의 깊은 사랑 외에, 그 사랑을 가능케 만든 '가치 있는 삶에 대한 강렬한 지향'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비록 삶의 궤도 수정은 헬렌이 훨씬 더 많이 해야 했지만, 둘의 지향점이 같아졌을 때 이들 부부는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을 꾸려갈 수 있었다.

자유분방한 기질로 풍족하게 살아온 헬렌, 철저한 사회주의 혁명가 스콧, 이 두 사람이 만나 적응하기란 좀처럼 쉽지 않았던 것 같다. 그것은 강연 여행 때문에 한동안 집을 떠나 있던 스콧이 헬렌에게 보낸 편지들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그는 헬렌의 무절제한 자유주의적 습성에 대해 낱낱이 분석하여 비판하고 있다.

어찌 보면 과도한 이 비판을 받아들이고 남편과 한 길을 간 헬렌도 참 대단하다 싶은 생각이 절로 들 정도다. 하긴 헬렌은 기본적으로 해박하고 친절하며 완벽한 인간미을 두루 갖춘 남편을 존경하고 따르려고 했다. 여간 해선 그러기도 정말 쉽지 않은데 이들 부부는 죽이 잘 맞아떨어진 것이다.

연애시절, 스콧이 헬렌에게 공장에 들어가 밑바닥 생활을 체험해 보도록 제안한 것은 아주 인상 깊은 대목이다. 바로 이런 체험이 헬렌의 인생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킨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유럽의 상류층 생활을 과감하게 버리고 스콧을 택했으며 그의 평생 반려자가 되었다.

그러면서도 스콧에게 일방적으로 종속되지 않았고 오히려 스콧이 부족했던 면인 예술과 정신영역의 안내자 노릇을 하며 함께 성장했다. 그들 부부는 간디, 마더 테레사, 슈바이처, 소로우 등이 걸었던 것과 같은 길을 추구했고, 이것을 자신들의 특기와 형편에 맞게 아주 훌륭히 실현해 나갔다.

그들은 시골로 들어가 손수 땅을 일궈 농장을 만들고 돌집을 지었으며, 죽는 날까지 자연과 어우러진 검약한 생활을 실천하며 살았다. 한마디로 자급자족하는 '자발적 가난'의 삶을 산 것이다. 그러나 자발적 가난이라 해도 다 같은 종류의 것은 아니라고 본다.

때로 가진 자들이 택하는 '자발적 가난'은 극심한 빈곤의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박탈감만 한층 더해줄 수 있다. 그들은 언제든 싫증나서 떠나면 그만이겠지만, 빈곤의 대물림을 하는 사람들에게 가난이란 마치 저주와도 같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자발적 가난'에서 빠져서는 안 되는 핵심적인 요소는 '가난한 자들과의 연대'가 될 것이다.

물질문명의 정신적 공허함을 달래기 위해 자꾸만 마음과 산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현대인들이 니어링 부부의 생활에서 배워야할 미덕이 바로 이 점이 아닐까 싶다.

니어링 부부는 시골에 들어가 주체적으로 농장을 일구며 살면서도 주경야독하며 자신들이 얻고 깨달은 바를 부지런히 이웃과 나누려고 애쓴다. 근로대중들과의 연대의 끈을 든든히 맺고 있는 그들의 책들과, 항상 집을 개방하고 거둬들인 농작물을 주위의 필요한 사람들과 나누며 살았던 일상 생활이 이를 잘 말해 주고 있다.

세계 자본주의의 종주국이라 할 만한 미국에서 소로우나 니어링 부부는 가히 예언자적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다. 물질에 대한 끝없는 집착을 부추기는 전 지구적 소비자본주의, 에너지 쟁탈전을 위한 추악한 전쟁의 연속.

이런 어두운 오늘 현실 속에서 헬렌의 이 책은 그저 한 번 읽고 말 통속적인 사랑의 수기가 아닌 삶의 근본 틀을 바꾸는 혁명적 대안 교과서로 널리 읽혀져야 한다.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헬렌 니어링 지음, 이석태 옮김, 보리(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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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솔샘교회(solsam.zio.to) 목사입니다. '정의와 평화가 입맞추는 세상' 함께 꿈꾸며 이루어 가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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