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로 가끔씩 고흐의 그림을 화면이나 책으로 접할 때면 묘한 호기심이 생겨났다. 하지만 나의 관심은 고흐의 그림 자체보다는 그의 작품을 실제로 접했을 때의 내 감정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과연 나도 그의 열정과 강렬함에 흠뻑 빠질 수 있을까? 그에 매료된다면 그 느낌은 어떤 것일까?” 수많은 이들이 찬사를 아끼지 않는 그 행렬에 나 또한 동참할 수 있는지 여부가 못내 궁금했다. 이는 내 마음 한 구석에 들어온 고흐가 늘 쪼그리고 앉아있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마침내 이 물음표에 마침표를 찍을 기회가 왔다. 고흐를 찾아 떠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일상을 접고 떠나는 나만의 여행테마에 살며시 고흐를 끼워 넣었다. 때마침 2003년은 고흐 탄생 150주년이 되는 해이니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제일 처음 런던의 국립미술관에서 그 유명한 ‘해바라기’를 보았다. 전시실을 한참 돌고난 후, 사람들이 웅성웅성 둘러싼 사이로 설핏 그림이 보인다. 하지만 이렇게 어수선한 가운데서 볼 수는 없다는 생각에 주변이 정리되면 맨 마지막에 차분한 마음으로 감상하기로 했다.
잠시 후 단체관람객이 빠져나가고 드디어 나에게 기회가 왔다. 찔끔찔끔 봐 버리면 감동이 줄어드는 게 아닌가 하는 노파심에 눈을 내리깔고 그림 앞까지 갔다. 그리고 서서히 올려다보는 순간! 흐릿한 화면으로만 보던 해바라기가 선명하고 또렷하게 떠억 하니 한눈에 들어온다.
너무 기뻐서 입이 ‘와아’ 하고 벌어지는 것을 애써 틀어막고 조심스레 쳐다보았다. 그러나 이런 감동도 잠시, 어찌된 일인지 숨이 멎을 것 같은 감동도, 강렬함에 빨려들 것 같은 유혹도 느낄 수 없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지만, 사진을 실물로 봤다는 감동 이외에는 다가오는 감정이 없었다.
그리고 파리의 루브르와 오르세 미술관 등을 오가며 수많은 고흐의 작품들을 보았다. 조금 달라진 게 있다면 강렬한 색감의 도드라짐만이 좀 더 선명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심지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반 고흐 미술관에서는 일본판화에 심취해 벚꽃을 그려대던 고흐와 탄생 150주년 기념품에 새겨진 키모노 입은 여인 등이 심히 거슬려 괜한 심술까지 발동한다. “그들만의 광기의 천재는 아니었을까?” 하는 의구심과 같이 말이다.
그러나 이내, 조금은 유치한 내 감정을 정리하며 그의 여정을 따라 다시 걸었다. 그의 방황이 시작되는 안트워프를 거쳐 파리로, 다시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방의 아를(Arles)에까지 이르렀다.
봄 무렵 여기에 도착한 고흐의 편지에는 이곳의 화려한 색채에 경탄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그리고 그는 이 곳 아를에 머무는 동안 수많은 작품을 완성한다.
나도 아를 역에 도착해서 얼마 지나지 않아 탄성을 연발했다. 물론, 한여름 강렬한 태양의 따가움에 내지른 탄성이 우선이었지만, 북부 도시들과는 다른 이색적인 매혹도 한몫을 했다.
역을 빠져나와 성곽의 상가를 가로지르고 꼬불꼬불 골목길을 지나 강가에 다다르는 동안 오밀조밀 깍쟁이처럼 잘 다듬어지지도 않았고, 웅장함 등으로 주눅 들게 하지도 않는 소박함에 젖어 들어갔다. 또한, 맑은 공기와 태양이 고스란히 뿜어내는 색은 자연그대로였다. 꾸며진 세련됨보다는 자연스런 경쾌함으로 사람을 맞이하는 곳이다.
이쯤에서 그의 그림들을 찬찬히 떠올려 본다. 보리밭과 측백나무와 밤하늘의 별까지 너무도 흔한 주변의 모습들임이 느껴진다.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일상에 따뜻한 시선을 보내는 이가 얼마나 있을까?
더욱이 당시의 분위기에서 한낱 하찮은 거리 풍경이나 농부의 모습을 화폭에 담아낸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을 텐데 말이다. 이는 우아하고 고상함을 추구하는 고객들의 취향을 전혀 반영하지 않았던 고흐가 울퉁불퉁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자연의 색을 다 품어 안기까지의 그를 상상해 본다. 강둑에 앉아 몇 날 며칠을 바라보기도 했을 테고, 밀밭을 끼고 하염없이 걷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렇게 관찰하고 고민하는 동안 자연의 순리에 동화되어 갔던 건 아니었을까?
쉼 없는 습작을 통해 작품을 탄생시켜 낸 그는 화가로 지낸 약 10년간 2천여점이 넘는 유화와 소묘를 그려낸다. 거의 매일 작품을 그려낸 것이다.
흔히 고흐를 숨이 막힐 정도로 강렬한 광기의 천재라지만, 나는 묵묵한 농부처럼 하루하루 자신의 작품세계를 위해 씨를 뿌리고 가꾸는 미련함으로 기억하고 싶다. 시대의 흐름을 거스른 게 아니라 비켜갔기에 어려웠던 많은 이들을 뒤늦게 천재라 칭하며 보상하려 하는 것은 아닐는지?
그리고 현재 내 주위의 일상을 돌이켜본다. 온통 유행과 한탕이 넘실거린다. 관객몰이식의 상업영화들, 댄스가수 일색의 가수들, 얄팍한 처세술의 글쓰기 등등 “무엇이 유행이다”하면 너나없이 이를 쫓아갈 뿐이다. 간혹 이에 따르지 않는다면 모자라거나 현실감각이 없는 외고집쯤으로 받아들여진다.
주류가 아닌 것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다. 독립영화들은 상영관이 없고 브로드웨이 뮤지컬이외의 창작공연물은 제작자를 찾을 수 없다. 민중미술가들은 작업장조차 구할 수 없어 작가의 길을 포기한다. 시대의 조류를 따르는 민첩함과 가벼움만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방법이다.
삶이 힘들었던 고흐가 화상의 요구대로 시대의 유행을 따라 갔다면 지금 우리가 그토록 칭송해 마지않는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며 유행의 큰 줄기 이외의 조그만 가지 같은 주변들에도 따뜻한 시선이 닿기를 희망한다.
삶의 풍요는 이런 다양함이 풍성하게 어우러질 때 만들어진다고 여긴다. 주류가 옳은 것만은 아니지 않은가? 더 이상 누군가의 희생만을 요구하지는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