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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갈 무렵, 나는 신현림이라는 시인을 알게 되었다. 그의 시집 <세기말 블루스>을 보면서 가슴 속 응어리처럼 맺혀있던 슬픈 덩어리들이 하나 둘 그의 시 속에 녹아들어, 슬픔을 슬픔대로 즐기는 법을 알게 되었다. 나는 지금도 우울하거나 혼자 여행을 가거나 이런 저런 생각에 빠지고 싶을 때면 신현림의 글을 읽는다.

▲ <세기말 블루스> 겉그림
신현림은 '극'의 상황을 인정하고 싸움을 걸고 이겨낸다. 이 세상을 지옥이라 말하기도 하고 부익부 빈익빈 세상을 탓하기도 한다. 그리고 여지없이 자신에게로 돌아와 다시 세상을 향해 싸울 준비를 하는 마치 여전사와 같은 마음을 같게 한다. 슬픔은 슬픔대로, 그러나 지지 않는 나와의 싸움, 나의 모든 감정들을 고스란히 널리워 놓는다.

나의 싸움

삶이란 자신을 망치는 것과 싸우는 일이다
망가지지 않기 위해 일을 한다
지상에서 남은 나날을 사랑하기 위해
외로움이 지나쳐
괴로움이 되는 모든 것
마음을 폐가로 만드는 모든 것과 싸운다

슬픔이 지나쳐 독약이 되는 모든 것
가슴을 까맣게 태우는 모든 것
실패와 실패 끝의 치욕과
습자지만큼 나약한 마음과
저승냄새 가득한 우울과 쓸쓸함
줄 위르 걷는 듯한 불안과

지겨운 고통은 어서 꺼지라구 !"


외로움이 지나쳐 괴로움이 되는 모든 것들과 싸우고 종국에는 지겨운 고통은 꺼지라며 소리칠 때 그 시원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나는 원래 시를 읽지 않았다. 그러나 신현림의 시는 읽는다. 아직도 시에 관심은 없지만 신현림의 시집 한 권이면 20대 겁없는 혼자만의 여행도 풍요로워지고 마음 속 울림이 더 커지는 기분이다.

▲ <해질녘에 아픈 사람> 겉그림
최근 그가 8년만에 낸 시집, <해질녘에 아픈 사람>을 보면 '시가 착착 감긴다'라는 말이 적절할 것 같다. 8년의 세월 동안 그녀는 아이를 낳았고, 사진작가로 거듭난다. 이제는 어느새 시인 신현림 옆에 사진작가라는 말이 같이 붙여 있다. 그리고 이제 엄마가 되었다.

우울한 로맨스 - 휘말려가다

무섭게 흐르는 시간은 흐르지 않는 시간
달리는 바다는 달리지 않는 바다
시간이란 아예 없는 겁니다. 최대의 재산인 꿈이 있을뿐이죠
당신 체온이 필요합니다 애완동물처럼 사랑 받고 싶군요
오랜만에 달아오른 숨결을 느끼며 사과처럼 굴러보고 싶어요
당신 손이 내 몸 간질이면 까르르르 웃으며 샐비어꽃이 피고요
새로운 눈, 새로운 귀를 달고 나비처럼 사뿐 날아오르죠
당신과 함께라면 어디든 무서울 게 없답니다

배란기가 아니라면 당신은 사랑에 휘말렸군요

빚더미에 시달려 견디기 힘든 경우도 있지만
무엇에든 휘말려 지내지 않으면 인생은 견디기 힘들죠
난로처럼 빨갛게 몸을 달구며 춤추는 애들이나 누드,
웰빙열풍을 보세요

요즘은 취업도 혁명인데, 춤추고 벗는 일도 혁명이군요

누구나 의미있고, 겉보기 좋은 순간을 원하죠
하지만 쉽게 열광하고 금세 잊어가요
만사 일회용 그릇처럼 쉽게 버려지고
오직 잊는 일만 남을 때
당신은 무엇을 기억하나요?


취업도 혁명이라는 말에 공감을 하면서 피식 웃어버린다. 물론 나는 취업을 걱정하는 사람이 아니지만 내 친구들을 보니 정말 취업이 혁명인 것 같다. 그의 위트에 웃다말고 '당신은 무엇을 기억하나요?'라는 말에 다시 긴장해버린다.

흔히들 말하는 자본주의 사회에 난 무엇을 기억하고 있는가. 진짜 잘사는 것이 돈 잘 벌고 적당히 즐기고 적당히 일하는 게 '그나마의 행복'이라는 이들이 주변에 점점 생겨나는데, 난 무엇을 기억하면서 지금 이렇게 살고 있나.

오늘 우연히 그가 쓴 산문집 신간이 나왔다는 소식을 우연히 알게 되었는데, 서점에 달려가고 싶은 마음 간절하지만 최근 내 생애 대규모 자취방 이사를 감행하여 이번 달은 참으려 한다. 기다려라. 나의 책아.

덧붙이는 글 | 이선미 기자는 춘천지역에서 어린이도서관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신현림의 희망 블루스

신현림 지음, 휴먼앤북스(Human&Books)(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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