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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이 코앞에 와 있는데 정장군은 와 이래 가만있는 거야?”
성안이 후금군의 포진을 바라보며 고요한 와중에서 한 사람이 투덜거리자 장한본이 다독이듯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아까 얘기를 못 들은 모양인데 지금은 부족한 화살을 아껴야 한다고 합네다. 오랑캐들이 아무리 도발을 해와도 우리가 가만 있으면 결국에는 성벽에 달라붙어 공격할 수밖에 없으니 그때 치자는 것입네다.”
장한본의 말을 들은 사람은 코를 킁킁거리며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후금군은 기를 죽이려는 듯 우렁차게 함성을 질러대더니 운제를 앞세우는 한편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투입된 보병들이 성벽에 붙어 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쳐라!”
마치 비명과 같은 정봉수의 고함소리와 함께 성안에 있던 석거포가 바위덩이를 날려 후금군의 운제를 부수고 무수히 많은 사람을 압사시켰다. 동시에 성위에서 화살이 나르고 돌, 흙, 심지어는 분뇨까지 후금군의 머리위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후금군은 화살에 맞고 돌에 맞아 나뒹굴었고 요행이 성위로 올라간 병사들은 제대로 힘도 못써본 채 창과 칼에 난도질당해 죽어갔다. 조선민병의 거세고 사나운 공격에 후금의 병사들은 겁을 집어먹고 물러나려 했으나 후금 부대의 대장이 뒤에서 칼을 휘두르며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저 놈이 대장인가 보이! 내 한살에 잡지!”
장한본 가까이에 있던 군관으로서 민병에 합류한 이가 호기롭게 소리치며 화살을 재어 쏘려 했다. 순간 후금 병사가 쏜 화살이 그 군관의 어깻죽지를 꿰뚫어 버리고 말았다.
“내가 잡음세!”
장한본이 화살을 들어 주저 없이 화살을 날렸고 후금군의 대장은 목덜미에 화살을 맞고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
“적장을 잡았다!”
성위에서 환호성이 울려 퍼졌고 후금군은 더욱 기세가 꺾여 물러서기 시작했다. 조선민병의 추격이 두려운 나머지 뒤에 남아 있던 후금군은 진영을 엄중히 갖추고 쫓겨 나오는 병사들을 받아들인 채 더 이상 병사들을 내보내지 않았지만 막상 성안의 민병들은 숨 쉴 겨를이라도 찾느라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후금군은 성 밖에서 징과 북을 울리며 다시 쳐들어갈 것처럼 약간의 시위를 하더니 생각보다 병사들의 피해가 커 재차 공격은 무리라는 것을 파악하고서는 그대로 물러가 버리고 말았다.
“아까 적장을 쏘아 잡은 자가 누구인가? 정장군께서 찾으시네.”
장한본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아들을 데리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정봉수에게로 갔다. 정봉수는 지친 표정이지만 여전히 번득이는 눈으로 정봉수를 맞이했다.
“누구신가 했더니 장부장이 이셨구려. 싸움에서 모두가 큰 공을 세웠지만 장부장의 공이 으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과찬입네다. 제가 안 쏘았어도 누군가 그 놈을 쏘아 잡았을 겁네다.”
장한본은 너털웃음을 지었고 정봉수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장한본의 손을 잡았다.
“내 장부장에게 이러한 공을 알려 정식으로 갑사(甲士)가 되고자 하는 길을 열어주려 하오. 그 전에 한 가지 일을 더 해주어야 하겠소만 괜찮겠소?”
장한본은 갑사라는 말에 귀가 번쩍 트였다.
“뭐든지 말씀만 하시라우요!”
정봉수는 진사인 정혼을 불러 서찰을 주며 장한본에게 부탁했다.
“여기 정진사는 조정에 상소를 올려 입바른 소리를 했다가 이곳에 정배(定配 : 귀양을 뜻함)된 사람이오. 하지만 이곳 용골산성의 일을 조정에 알리는 장계를 가져간다면 이 역시 마땅히 없던 일이 될 것이오. 허나 이 장계가 단지 공치사를 위한 것은 아니오. 이 용골산성은 반드시 지켜야 할 곳이긴 하나 이제 식량은 다 되고 무기마저 부족해 오랑캐들이 또다시 쳐들어온다면 도저히 견뎌낼 여력이 없소. 그대들은 하루바삐 강화도(주 : 정묘호란 당시 조정은 강화도로 피신 중이었다)로 가 앞으로의 일에 대한 답을 받아야 하오.”
정혼과 장한본은 비장한 표정으로 정봉수에게서 장계를 받아들었다. 장한본은 문득 한 가지를 잊었다는 듯 등을 돌리려는 정봉수를 불렀다.
“정장군님, 저도 한 가지 청이 있사옵네다.”
“무엇이오?”
“말 한필을 더 내어가 제 어린 아들놈을 함께 데려가도 좋을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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