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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스 미 국무장관의 방한은 한국이 왜 미국에 무시당하는지를 되돌아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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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지금까지 노무현 정부는 미국에 대해 해줄 만큼 해주었다고 할 수 있다. 한나라당이 집권했을 경우에 했을 만큼 미국 정부에 협조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원하지 않는 이라크 파병도 했고, 김선일씨 참수사건에서는 자국민의 희생이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자국민 보호를 포기한 채 미국정부에 협조를 했던 것이다.

한국의 이라크 파병은 일본의 경우와 달리 사실 얻는 것은 별로 없다. 피할 수 없어서 한 것일 뿐이다. 일본은 해외 파병을 통해 제2차 대전 패전의 상처를 씻고 상실한 국제적 위상을 회복할 수 있기에 파병은 그 자체로 국익에 도움이 된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그러한 필요성이 없기에 실리가 없는 욕 얻어먹는 행위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정부는 미국 정부에 적극 협조했는데 외교적 대우는 제대로 받지 못하고 전전긍긍해야만 했다. 물론 노무현 정부는 미국에 적극 협조한다고 해도 DJ 이전의 행정부처럼 무조건 "yes"만 하는 정부는 아니기에 미국 측으로서도 내심 못 마땅하게 생각한다는 것은 짐작이 된다. 또 북핵문제와 관련해서 한국은 한반도 평화를 무엇보다 원하기에 미국정부와 다소 이견이 노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전반적 기조는 분명 최대한의 협조였으며 이로 인해 많은 비판자들로부터 비난을 사기도 했다. 그런데도 한국 언론에서 최대의 혈맹으로 평가받는 미국측으로부터 따뜻한 대접을 못 받은 것은 분명 문제가 있는 것이다.

사실 외교 대우를 생각하면 일본정부로부터 정당한 대접을 못 받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한국인들 전체의 분노가 하늘을 찌를 듯하고 정부 최고 지도자들이 현안을 중대하게 이야기함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대응은 별로 진지하지 않은 것이다.

우리나라 국가원수의 발언을 일본 최고 지도자가 국내용 발언이라고 폄하하기도 하고 냉정해지자는 내용없는 말만 반복하기도 했다.

왜 한국정부는 최고의 동맹관계에 있는 미국과 일본으로부터 제대로 대접을 못 받는 것일까? 노무현 정부가 못나서일까? 잘못하고 있기 때문일까? 다른 사람이 직무를 수행하면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을까?

필자는 그 어떤 한국의 지도자가 대통령 직무를 수행하더라도 이런 대접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군사 작전지휘권과 국제적 위상

한국이 동맹국들로부터 제대로 된 대접을 못 받는 제일 중요한 이유는 바로 전시작전지휘권이 한국정부에 없기 때문이다. 흔히 전시작전지휘권은 전시의 작전 지휘를 위한 것으로 단순하게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것은 훨씬 더 큰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복잡한 개념이다.

작전지휘권은 전통적으로 '왕'의 고유 권한이다. 한마디로 전 국민의 생사여탈권을 갖는 권한인 셈이다. 그만큼 비중이 크고 중요한 권한이다.

가령 한국전쟁 당시 문제가 된 노근리 피난민 살상사건 등도 그 자체의 범죄 성격 외에도 작전지휘권이 어디에 귀속되어 있는지에 따라서 관련 책임자들의 법적 책임이 면죄될 수도 있고 더 중대하게 부과될 수도 있다. 그만큼 중요한 문제다.

민주주의 역사를 보면 전통적으로 왕의 고유권한이던 전쟁선포권은 민의를 대변하는 의회(국회)로 이전되고 외교권과 군통수권은 국가수반인 대통령에게 주어졌다. 따라서 이러한 군통수권이 없으면 그만큼 국제사회에서 국가원수로서 대통령의 위상에 힘이 빠지게 된다.

일본정부가 미-일 동맹관계만 잘 유지하고 있으면 한국정부는 별로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는 식으로 행동하는 이면에는 이러한 기제가 숨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형식논리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현재 한국정부는 평시 작전지휘권을 갖고 있지만 이것은 별 의미가 없다. 군은 그 특성상 전시 혹은 유사시의 필요에 대비하여 존재하는 집단이기 때문에 전시가 아닌 평시의 지휘권은 별 의미가 없는 것이다(사실 평시작전지휘권과 전시작전지휘권이라는 구분 자체가 편의상 생긴 것으로 의미 없다 할 수 있다).

흔히 작전지휘권 회수문제를 말하면 안보 문제를 우려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작전지휘권 회수와 안보와는 별 관계가 없다. 전시 작전지휘권이 한국으로 회수된다고 하더라도 한미 연합 작전은 전혀 차질 없이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은 작전지휘권을 동맹국에 이양하지 않았지만 훌륭히 연합작전을 수행했다. 한국전쟁에서도 북한이나 중국은 연합작전을 펼쳤지만 작전지휘권을 서로 주고받았다는 얘기는 없다.

작전지휘권이 있어야 안보가 되고 효율적인 연합작전이 된다는 주장은 마치 집을 지켜주기 위해서는 집문서를 맡겨야 집을 제대로 지킬 수 있다는 말과 마찬가지로 왜곡된 것이다. 집문서는 집주인이 가지고 있어도 집을 지켜줄 사람의 의지가 있다면 위임받은 권한으로 충분히 집을 지킬 수 있다.

작전지휘권이 없는 정부는 집문서를 소유하지 않은 집주인처럼 국제사회에서 제대로 대접을 못 받는 일이 생긴다. 사실 군권은 국가의 독점적인 권리다. 국가가 다른 사회 조직과 다른 점이 바로 배타적인 물리적 폭력(경찰력 및 군사력)을 가진다는 점은 교과서적인 상식이다.

따라서 국가 물리력의 핵을 이루는 군 지휘권을 갖지 못하면 국가 위상에 맥이 빠지는 셈이며, 동시에 군권을 사실상 장악한 다른 나라는 옥상옥 식으로 국가 위의 국가의 모습을 띄게 되어 의도하지는 않더라도 주권정부를 압도하는 양상을 띠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 작전지휘권은 단순히 전시 작전과 관련하여서만 연관되는 개념이 아닌 복잡하고도 중요한 개념이다. 평시에도 정치적으로 큰 영향력이 있기 때문이다.

가령 북한의 경우 국가 최고지도자는 명목상 최고인민회의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으로 국가원수의 직능을 수행하는 김영남이지만 김영남 위원장을 북한의 최고결정권자로 보지 않는다. 다시 말해 중요한 현안에 대해 국제사회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쳐다보지 김영남 위원장을 쳐다보지는 않는다.

왜 그럴까? 바로 그가 군권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도간부 서열상으로도 앞서 있다. 군 지휘권은 그만큼 정치적으로 중요한 기능을 하며 국가의 국제적 위상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우리가 아무리 독도가 우리 땅이라고 외쳐도 이러한 군사 주권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찻잔 속의 태풍처럼 간주돼 국제사회에서 제대로 인정을 못 받을 것이다. 일본이 미국과의 굳건한 동맹만 유지하면 한국은 크게 고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식의 반응을 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다.

올해는 을사늑약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에 더더욱 이런 점을 진지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작전지휘권과 자주국방의 문제

흔히 작전지휘권 문제만 나오면 보수 언론은 안보문제를 부풀려 군사주권 문제를 희석하지만 사실 한반도 안보는 군사작전지휘권과 상관없이 유지될 수 있다.

탈냉전 이후 현 국제질서는 미국의 압도적인 군사적 우위가 보장되는 전 세계적 일극 체제기 때문에 그 어떤 나라도 일극체제의 정점에 있는 초강대국 미국의 의사에 반한 전쟁을 일으킬 수 없다. 따라서 작전지휘권의 귀속 여부와 상관없이 미국의 의지력만으로도 전쟁은 충분히 억제될 수 있다.

여기에다 한반도는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또 미국은 전통적으로 해양세력이기 때문에 만약 전쟁이 나거나 그럴 징후가 있으면 언제든 평양의 앞바다와 동해의 원산 앞바다에 미국의 항모들이 접근하여 포위하는 형국이 되기 때문에 북한이 침공하기란 힘들다.

사실 미국의 항모 선단은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움직이는 군사기지인 셈이고 한반도 주변 미군기지와 함께 평가하면 독자적인 전쟁을 치를 수 있을 정도로 막대한 군사력이다. 세계를 압도하는 미국의 해공군력은 사실 지상군에 의지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막강하기에 바다만 있으면 언제나 접근 가능한 항공모함의 존재는 군소국가가 일으키는 공세적 전쟁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런 잠재력 외에도 미국측은 이미 유사시 ICBM의 탄두를 핵폭탄이 아닌 재래식 폭탄으로 채워 미 본토에서 북한을 공격할 수 있다고 언명하고 있을 정도기 때문에 설령 지상병력이 없다고 하더라도 한반도에서 전쟁을 억제할 수 있을 정도다.

도널드 럼스펠드 미 국방장관은 18일 국방부 브리핑룸에서 열린 직원들과의 대화에서 "미국은 한반도의 억지력 및 방위력을 제공하는 책임을 점차 한국측에 이양하고 주로 해상과 공중이라는 두 중심축으로 이동할 것"이라 밝혔다고 한다.

혈맹인 미국 역시 전통적인 해양세력으로서 해상과 공중 방위라는 두 축만으로 충분히 한반도 안보를 유지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이런 언급이 나오는 것이다.

북한이 전쟁을 일으킬 형편이 되지 않는다는 점과 우리의 우수한 자주 국방력을 고려하지 않는다고 해도 위에서 언급한 국제질서 체계때문에 이미 한반도에서 전쟁은 상당히 억제되고 있다.

따라서 문제는 미국의 안보협력 의지이지 작전지휘권 귀속 여부가 아니다. 유사시 한미 양국간 작전 협력은 지휘권이 법적으로 한국정부에 이양되더라도 그때그때 협의로 언제든 가능하다.

라이스 장관이 방한시 던진 '주권국가'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잊혀진 문제를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하게 만들어주었다. 이제 더 이상 한국이 동맹국들에게 외교적 홀대를 당하지 않도록 스스로 반성과 노력이 필요하다. 전시 작전지휘권 회수문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문제가 되었다.

덧붙이는 글 | 기자는 <노오(No)라고 확실히 말하지 못하는 한국>(1992) <대북한 핵억제정책과 합리적 선택>(1995) 등의 책과 논문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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