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는 지난 3월 7일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의 방한 일정(3월 19∼20일)을 미국 언론보다 더 앞서 보도했다. 오마이뉴스는 당시 방한 일정을 보도하면서 미국측이 희망하는 노무현 대통령 접견일이 하필이면 일요일이기 때문에 방한 일정을 둘러싸고 한·미 간에 이견이 있다는 내용도 함께 보도했다.
당시 노 대통령은 라이스 국무장관의 방한 일정에 대한 보고를 받고 외교안보 라인에 '짜증'을 낸 것으로 전해진다. 라이스 장관 면담일정 때문에 일요일에 휴식을 취할 수 없다는 점 때문이 아니라, 그런 모습이 국민에게 어떻게 비춰질지가 더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공동관심사에 대한 폭넓은 의견 교환' 뒤의 이면
오마이뉴스가 라이스 방한일정과 한·미간의 이견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처음 보도한 당시만 해도 이런 이견이 조정될 수 있는 여지는 있었다.
리처드 바우처 미 국무부 대변인이 인도→파키스탄→아프가니스탄→일본→한국→중국을 순차적으로 방문하는 라이스 장관의 서남·동북아시아 방문일정(3월 14∼21일)을 공식 발표한 시점은 지난 9일(현지시간)이었다. 적어도 이틀 동안은 조정의 여지가 있었던 셈이다.
그와 비슷한 시점인 10일 한국 외교통상부도 라이스 국무장관의 방한일정(19∼20일)이 확정되었다고 공식 발표했다. 그리고 그 원래의 일정대로 라이스 장관은 일요일인 20일 청와대를 예방해 노 대통령과 한시간 동안 환담을 가졌다.
김만수 청와대 대변인은 이와 관련 "노무현 대통령은 20일 오전 10시부터 11시까지 국무장관 취임 후 처음으로 아시아 순방차 방한한 라이스 장관을 접견하고 북핵 문제, 한·미동맹, 동북아 지역 및 국제 정세 등 한·미 양자 현안과 공동 관심사에 대해 폭넓은 의견을 교환하였다"고 환담 결과를 발표했다.
김 대변인은 또 "라이스 장관은 작년 7월에 이어 금번 방한을 통해 한국정부 고위인사들과 제반 문제에 대해 심도 있는 의견교환의 기회를 갖게 된 것에 대해 만족을 표명하였으며, 노 대통령은 부시 대통령에 대한 각별한 안부를 전달하였다"고 발표했다.
라이스 장관의 '만족 표명'과 노 대통령의 부시 대통령에 대한 '각별한 안부' 같은 외교적 수사(修辭)만을 보면 환담 분위기는 무척이나 화기애애한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것일 뿐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이번 노 대통령과 라이스 장관의 환담은 그 형식과 내용 모두에서 아쉬움을 남겼다. 물론 그 원인은 미국의 '오만함'이 제공한 것이다.
첫번째 결례 - 형식
라이스 장관의 이번 서남·동북아시아 순방은 지난번 유럽 순방에 이은 국무장관 취임 이후 두번째 해외순방이다. 이는 미국의 '사활적 이익'이 걸린 유럽에 이어 이 지역이 두번째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두번째로 사활적 이익이 걸린 지역에 대한 순방일정 가운데 왜 하필 한국이 라이스 장관의 '주말 일정'에 끼어 있냐는 점이다. 특히 국가정상과 관련한 일정은 가급적 휴일은 피하는 게 외교적 관례라는 점에 비춰 이와 같은 '무례'는 매우 이례적이기까지 하다.
입장을 바꿔 생각하면 그 무례는 분명하다. 특히 가족과 함께 교회에 가서 예배를 보고 휴식을 취하는 기독교 신자들이 많은 미국에서 외국 귀빈의 일요일 부시 대통령 방문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1주일 이상 해외순방을 하다보면 주말이 끼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럴 때는 대개 관광과 휴식 등으로 소일하기도 한다. 노 대통령도 해외순방시 상대국 사정에 따라 휴일에는 동포간담회를 갖거나 일정을 가볍게 소화해 왔다.
그런데 라이스 장관은 이번에 서남아시아 방문을 마치고 일본을 거쳐 중국을 방문하는 길에 주말에 한국을 방문하는 일정을 택하는 무례를 저질렀다. 그러면서도 라이스 장관은 일요일에 시간을 낸 노 대통령에게 의례적인 인사말조차 하지 않았다.
노 대통령은 이날 오전 10시부터 라이스 장관을 접견한 데 이어 11시20분부터 아데니지 나이지리아 외교장관을 접견했다. 나이지리아 외교장관 접견일정은 사실 라이스 장관 접견 때문에 '끼어 든' 일정이다. 노 대통령이 일요일에 라이스 장관을 접견하는 모양새가 좋지 않아 다른 접견 일정을 만들어 '물타기'를 한 것이다.
그렇지만 아데니지 외교장관은 이날 노 대통령과의 환담에서 "일요일임에도 예방을 허락해주신 대해 감사한다"고 인사부터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두번째 결례 - 내용
이에 비해 라이스 장관은 접견 형식뿐만 아니라 내용에서도 노 대통령에게 '결례'를 했다. 라이스 장관의 '일본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 지지' 발언이 그것이다.
라이스 장관은 19일 한국 방문 직전에 일본에서 "일본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진출을 지지한다"고 공식으로 밝혔다.
알다시피 노 대통령은 일본의 잇단 독도·과거사 '도발'에 대해 17일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 성명을 통해 "이웃나라의 신뢰를 얻는 것이 유엔 등 국제사회에서 지도적 국가로서 존경받는 첫 걸음"이라고 밝혀 사실상 일본의 상임이사국 진출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표명했는데, 미국 국무장관이 이에 대해 '찬물'을 끼얹은 격이다.
라이스의 발언은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에 진출해 국제사회의 경제력에 걸맞은 정치력을 확보하려는 일본에는 '축복의 선물'이고, 일본의 과거청산 의지를 상임이사국 진출과 '연계'하려는 한국과 중국에는 '저주의 주술'이나 다름없다. 일요일에 접견을 하게 된 것도 짜증나는 일인데 방한 전에 한국 국민의 '골'을 지르는 발언까지 했으니 노 대통령인들 기분이 좋을 리 없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노 대통령이 라이스 장관에게 "일본의 독도·교과서 왜곡 등 역내의 제반 '장애요인'들이 역사적·지정학적·전략적 상황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토대로 극복되어야 동북아의 평화와 번영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10여분 동안 '강의'를 한 점이다.
라이스 장관과의 접견은 당초 10시부터 10시50분까지 예정돼 있었으나 20분이 더 지난 뒤에 끝났다. 환담에 참석한 권진호 국가안보보좌관은 '라이스 장관 접견이 왜 길어졌냐'고 묻자 웃으면서 "대통령께서 강의를 좀 하셨지"라고 말했다.
라이스의 무례를 혼쭐내려는 노 대통령의 의도적인 '일요일 독도 강의'가 이뤄졌음을 암시하는 발언이다. 라이스 장관은 잠자코 듣기만 했다고 한다.
덧붙이는 글 | [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