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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추리·도두리 포토제닉, 한 번 뽑아 보세요

ⓒ 노순택
따갑던 유월의 햇살이 서쪽 하늘로 기울고, 이따금 목 뒤로 서늘한 바람이 불어온다. 큼지막한 산 하나 눈에 들어오지 않는 넓고 너른 들, 어둠이 사위를 감싸오기 시작했지만 유월의 들판은 푸른 빛을 스스로 발산하며 한껏 키를 키우고 있었다. 어두운 시간으로부터 힘을 얻은 바람이 깃발을 때린다. 떠나라...

몸뻬를 입은 늙은 여인들이 왁자지껄 어두운 들판을 가로지른다.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한둘이었던 늙은 여인들이 어느새 예닐곱으로, 십수 명으로 길게 늘어 들판을 건넌다. 너른 들판은 지루했지만, 오르내림이 없어 힘겹지 않았다. 늙은 여인들 틈을 가르며 자전거를 탄 늙은 영감들이 휘익 앞질러 간다. 늙은 영감이라고 하기엔 젊은, 중년의 아저씨들도 오토바이를 타거나, 트럭을 타고 건넌다. 저 들녘을.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태연하게 늙은 여인들 틈에서 잡담을 나누며 걷는 남정네들도 있다. 누구라도 손은 단단했다. 저 너른 들판에서 흙으로 단련시킨 저 단단한 손들.

300일이 다 되도록 하루도 거르지 않고 비닐하우스에서 촛불을 밝혀온 농민들.
300일이 다 되도록 하루도 거르지 않고 비닐하우스에서 촛불을 밝혀온 농민들. ⓒ 노순택
전구 몇 개로 불을 밝힌 비닐하우스 안이 소란스럽다. 특용작물을 포장해 도회지로 내다 팔려는 것일까? 이 마을 누군가의 팔순잔치를 하려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사이비 교주를 떠받드는 모 종교 집단의 통성기도회? 특용작물은 없었다. 팔순 노인들이 수두룩했지만, 잔칫날도 아니었다. 찬송가와 회개의 울부짖음 역시 없었다. 전구를 더 켜지 않았는데도 비닐하우스 안이 점점 밝아온다. 사람이 모여들수록 어둠이 설 자리가 줄어들고 있다. 저마다 손에 쥔 저것. 단단한 손들에 촛불이 들려있다. 너른 들에서 햇볕과 싸우느라 검붉게 탄 얼굴들은 촛불 앞에서 벌겋게, 그리고 수줍게 달아올랐다.

낼모레면 오십줄에 들어선다는 권혁범씨가 이 비닐하우스 안에서 막내축에 드는 사람이다. 권씨가 마이크를 잡았다.

지난 2004년 5월 30일 대추리 평화축제에 참가한 농민, 시민, 학생의 행진을 멀리서 감시하고 있는 K6 미군
지난 2004년 5월 30일 대추리 평화축제에 참가한 농민, 시민, 학생의 행진을 멀리서 감시하고 있는 K6 미군 ⓒ 노순택
"에... 오늘도 이렇게 비닐하우스를 찾아주신 팽성읍 주민여러분께 깊은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이렇게 촛불집회를 연 지도 어느새 300일이 다 돼갑니다. 갑작스럽게 손에 든 촛불이지만, 그 동안 눈바람 비바람 다 이겨가며 이 자리를 지켜왔습니다..."

주민 서넛이 돌아가며 짧고 소박한 연설을 이어간다. 가끔씩 구호도 터져 나오고, 웃음도 터져 나온다. 손에 쥔 촛불이 벽과 하늘을 둥글게 감싼 비닐에 부딪혀 두 개로, 네 개로 늘어난다. 밤하늘에 촛불이 빛나고 있다.

"에... 문정현 신부님의 말씀에 이어서, 이번에는 내일부터 사흘 동안 평화유랑단과 함께 전라도 지역을 돌며 우리 평택 미군기지 확장 문제를 알리고 돌아올 우리 마을 아줌마 네 분을 모시고 각오를 듣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형수님들, 어서 나오세요."

저렇게 수줍을 수가 있을까. 마이크를 쥐고도 아무 말을 하지 못한다. 저, 떨리는 가슴. 영숙씨와 평기 엄마, 유리 엄마, 부녀부장님은 과연 아이들 밥 걱정, 남편 걱정, 농사 걱정을 떨쳐내고 화려한 선전일꾼으로 변신할 수 있을까. 아, 가슴은 콩딱거리고, 입술은 떨어지질 않는다. "아따, 노래방이라고 생각하고 싸게싸게 얘기 좀 해 봐." 장난 섞인 불만이 터져 나온다. 아줌마들은 겨우 각오를 다지고, 노래 한 자락까지 뽑고서야 멍석에서 내려왔다. 모락모락 밤이 무르익는다.

'죽을 똥 살 똥 다 싸가며' 땅을 일궈 자식농사를 지었던 홍남순 할머니가 대추리 K6 철조망 앞에 팥을 심다가 울분을 토해낸다.
'죽을 똥 살 똥 다 싸가며' 땅을 일궈 자식농사를 지었던 홍남순 할머니가 대추리 K6 철조망 앞에 팥을 심다가 울분을 토해낸다. ⓒ 노순택
한국축구대표팀의 월드컵 예선전이 열리는 밤이었다. 주민들은 그래도 조국을 버릴 수는 없어 한국팀을 응원하러 저마다 집으로 향한다. 50년 전, 바다를 메워 죽어라 일군 땅과 집을 빼앗아 미군에게 넘겨줬던 무능한 조국에 아직 미련이 남은 탓일까. 2005년 오늘, 겨우겨우 다시 일궈 자식농사 쌀농사 지으며 일평생의 땀을 뿌린 땅과 집을 또 빼앗아 미군에게 넘겨 주려는, 괘씸한 조국에 '미워도 다시 한번'의 미련이 남은 탓일까. 텔레비전 앞에 선 팽성읍 농민들은 가슴 졸이며 대~한민국을 응원할 것이다. 저들이 조국 생각하는 것처럼, 조국도 저들을 생각할까.

집도 땅도 다 뺏기면 또 어디로 흘러들어 살아야 할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문차분 할머니
집도 땅도 다 뺏기면 또 어디로 흘러들어 살아야 할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문차분 할머니 ⓒ 노순택
올해 일흔한 살 잡순 홍남순 할머니는 스물네 살에 팽성으로 시집을 왔다. 남편과 바다를 메워 '죽을똥 살똥 다 싸가며' 땅을 일궜다. 오남매를 키워 시집 장가 다 보내고 살아온 것도 그 땅 덕분이었다. 한낮의 땡볕 아래서 대추리 미군기지 철조망 옆 밭에 팥을 심던 홍남순 할머니는 "미군놈들 기지확장 문제 때문에 이 나이에 죽을 맛을 다 본다"며 울먹거렸다.

팽성읍 도두2리에 사는 예순여덟 살 잡순 문차분 할머니는 경북 상주에서 태어났지만 남편과 결혼해 어찌어찌 살다가 이곳으로 흘러들어왔다. 그래도 20년이나 살았으니 고향이나 진배없다. 농사 지어 사는 것도 겨우겨우 사는 일인데, 집도 땅도 다 뺏기면 또 어디로 흘러들어 살아야 할지 걱정이다. 이 말년에 말이다.

대추리 K6 미군기지 앞에 주민들이 세워둔 팻말. 나의 살던 고향 / 나는 지금도 미군부대 철조망 안 / 나의 고향 구 대추리에서 / 열다섯 살이 되어 뛰노는 꿈을 꾼다 / 한 번 잃어버린 고향인데 / 또 다시 지금의 대추리를 잃어버려 / 두 개의 꿈을 꿀 수 없기에 / 오늘도 간절한 마음으로 / 우리의 싸움이 이기는 날 / 그 날을 위해 고향을 지킨다
대추리 K6 미군기지 앞에 주민들이 세워둔 팻말. 나의 살던 고향 / 나는 지금도 미군부대 철조망 안 / 나의 고향 구 대추리에서 / 열다섯 살이 되어 뛰노는 꿈을 꾼다 / 한 번 잃어버린 고향인데 / 또 다시 지금의 대추리를 잃어버려 / 두 개의 꿈을 꿀 수 없기에 / 오늘도 간절한 마음으로 / 우리의 싸움이 이기는 날 / 그 날을 위해 고향을 지킨다 ⓒ 노순택
칠십 평생을 땅만 일구며 살아온 조창목 할아버지는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팽성 도두리 벌판에서 주최한 평화미사 도중 복받쳐 오르는 설움을 눈물로 토해냈다.

여든여덟 살 잡순 조선례 할머니는 해방 뒤 미군정이 들어서면서 대규모로 확장된 기지에 밀려 집과 땅을 빼앗겼다. 미군 불도저는 이주할 틈도 주지 않고 논밭을 짓이기고 담을 허물었다. 무서워서 오들오들 떨기만 했지, 한 마디 대꾸할 줄 몰랐다. 할머니의 옛집 위에서 지금은 미군 비행기가 뜨고 내린다. 지금 대추리는 진짜 대추리가 아니다. 밀리고 밀려와 가까스로 터를 잡은 가짜 대추리다. 진짜 대추리를 그리는 할머니의 꿈은 미군을 섬기는 이 땅에서 불온하다.

평택의 문제는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인가.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평택의 문제는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인가.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 노순택
마흔셋 먹은 '젊은이' 신종원씨는 대추리에서 태어났다. 미군기지에서 터져 나오는 총소리건 검은 연기건 '태어날 때부터 보고 들었던 거니까' 좋고 나쁘고를 모르고 여지껏 살아왔다. 젊은 시절 이런저런 방황도 했지만, 고향이 좋고 농사도 잘만 지으면 먹고 사는데 큰 걱정은 없을 것 같아 농사일에 매달렸다. 그런데 이런 제길, 땅을 내놓으란다. 자기 땅에서 쫓겨난 아버지 세대의 설움을 자식보고 이어가란다. 이런 염병할 짓이 또 있을까. 그는 요즘 농사일에 매달리지 못한다. 이 농사꾼에게 팽성대책위 조직국장이란 낯선 직책이 주어졌다.

이 책을 다 메운다 해도 이 구비, 저 구비의 사연들을 모두 담지는 못할 것이었다. 떠나라... 제 나라 관리들로부터 "떠나라"고 명령 받은 농민들이 되레 "떠나라"고 새긴 깃발을 들판에 세우고 있었다. 그 깃발은 반세기 전 집과 땅에서 떠밀리며 눈물을 머금었던 늙은 농부와 그 자식들의 되물음이었다. 대체 왜, 누굴 위해, 어디로 떠나란 말이냐.

오늘도 대추리에는 K6에서 이륙한 비행기들이 하늘을 가른다.
오늘도 대추리에는 K6에서 이륙한 비행기들이 하늘을 가른다. ⓒ 노순택
해외주둔 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위한 세계적 차원의 재배치 개념, 주한미군의 아시아 태평양 신속기동군화, 한미일 3각 군사동맹체제, 북한에 대한 선제공격과 한반도 전쟁가능성 고조, '개념계획 5029', 이에 따른 무한 군비경쟁 가속화 등의 어려운 이야기들은 다른 사람들도 함께 풀어야 할 숙제다. 이땅에서 전쟁으로부터, 미군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어렵다.

그래도 우리, 수도 서울과 의정부 일대에서 빼낸 미군기지를 어딘가에는 보내야 하지 않겠느냐고, 그리고 그게 평택이라면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속 터지는 소리를 하지는 말자. 그런 입이라면 아예 다물자. 아니면 저 여든여덟 살 잡순 조선례 할머니 앞에서 떠들어 보든지.

457만평도 모자라 349만평을 더 내놓으라는 전쟁광들을, 우리는 왜 '한반도 어딘가'로 보내야 한다고만 생각한 것일까. 저 넓고 광활한 '아메리카 어딘가'라면 더 좋지 않은가? 발상은.... 전환할 때 쓸모가 있는 것이다.

너른(平) 들녘과 못(澤)이 많아 평택이라던가. 저 너른 들과 못을, 저 단단한 손들이 여전히 일굴 수 있도록.

저 너른 들녘을 내내 일굴 수 있기를, 주름지고 단단한 손들은 소망한다. 그들의 정당한 저항이 외롭지 않도록 7월 10일에는 대추리에서 놀자.
저 너른 들녘을 내내 일굴 수 있기를, 주름지고 단단한 손들은 소망한다. 그들의 정당한 저항이 외롭지 않도록 7월 10일에는 대추리에서 놀자. ⓒ 노순택

덧붙이는 글 | * 평택미군기지 확장문제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평택미군기지확장 범국민대책위(www.antigizi.or.kr)나 평화유랑단(www.peacenomad.net),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www.spark946.org) 홈페이지를 방문하면 된다. 

몸이 허락지 않는다면 마음 담은 글이라도 남기면 좋을 듯. 대추리 가는 길도 안내되어 있다. 7월 10일 팽성읍 대추리에서는 미군기지 확장저지 범국민대회가 열릴 예정이다. 평택 농민들은 사활을 건 이번 투쟁에 시민들의 참여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 이 글과 사진은 상업적 목적을 띠거나 특정인의 명예를 훼손하지 않는 이상 자유롭게 복제할 수 있다. 평택 문제는 더 널리 알려져야 한다.

* 이 원고는 환경운동연합에서 발간하는 월간 '함께 사는 길' 창간 12주년 특집호에 실린 것을 재수록한 것임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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