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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혼란상이 연출되고 있다. 국가권력 남용 범죄에 대해 민형사상 공소시효를 배제하거나 조정해야 한다던 노무현 대통령의 8.15경축사는 한나절만에 해석에 재해석이 거듭되면서 순화되더니 결국 반쪽 짜리 방안으로 조정됐다.
노 대통령은 어제 국민의 인권이나 민주적 기본질서를 해친 국가권력 남용 범죄에 대해서는 공소시효를 배제하거나 조정해 피해자에 대한 배상 및 보상, 또 재심의 길을 열어야 한다고 밝혔다.
노 대통령이 경축사를 낭독한 직후 김만수 청와대 대변인은 공소시효 배제 대상이 “해방 이후부터 권위주의 정권 때까지”라며 “도청문제는 그 시기는 아니지만 포함될 수 있을 것”이라고까지 말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몇시간 뒤 이번엔 문재인 민정수석 등이 나서 민형사상 공소시효 배제는 미래의 일에 대한 것이라고 범위를 축소했고, 다시 기자들 앞에 선 김만수 대변인도 “형사 부분의 시효 배제 문제는 논의해 봐야겠지만 원칙적으로 장래에 관한 것”이라고 밝혔다.
청와대의 거듭된 해석 끝에 정리된 방안은 이런 것이다. 재심은 좀 더 쉽게 하고, 국가권력 남용 범죄 피해자에 대한 배상 및 보상 길을 넓히기 위한 입법이 필요하다.
이미 제정된 과거사 정리 기본법을 보완하는 입법 정도로 무난히 넘길 수 있었던 방안이 소급입법이니 위헌이니 하며 정치권에 평지풍파를 일으켰던 원인은 단 하나, 형사문제였다. 하지만 이를 청와대 스스로 거둬들임으로써 정치권을 휘감았던 바람은 태풍이 아니라 일회성 돌풍으로 그치고 말았다.
의문은 남는다. 야당의 즉각적인 ‘위헌’ 공세를 불러올 것이 뻔한데도 어떻게 해서 민사와 형사를 아우르는 방안을 경축사에 담을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동아일보>는 경축사 문안 작성과정을 이렇게 전했다. “이번 광복절 경축사는 대통령 정책실이 취합한 자료를 토대로 연설팀이 초안을 작성했고, 노 대통령이 10일경부터 직접 집필에 나섰다. 그 과정에서 ‘시효’ 문제는 민정수석비서관실의 법률 검토를 거쳤다고 한다.”
<동아일보>의 보도대로라면 청와대에서 나름대로 법률 검토과정을 거쳤다는 것인데, 어떻게 해서 한나절만에 해석이 뒤바뀌는 현상을 연출할 수 있었을까? 시효 문제의 법률 검토작업을 벌인 민정수석이 어떻게 해서 공소시효 배제 대상에서 형사는 제외된다며 진화에 나서게 된 것일까?
이와 관련해 <동아일보>는 또 다른 사실을 전했다. “(민정수석비서관실이) 형사상 공소시효는 국제법상 시효 배제의 사례를 검토했으나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는 것이다.
<동아일보>의 보도를 종합하면 민정수석비서관실에서도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던 형사상 공소시효 배제문제를 청와대 연설팀이 초안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아니면 노 대통령이 직접 집필하는 과정에서 결론 내렸을 개연성이 크다는 얘기가 된다.
경위야 어떻든 청와대는 경축사 문구를 조율하는 과정에서 혼란상을 연출했다는 비난을 피해갈 길이 없게 됐다.
하지만 이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청와대가 한나절 만에 스스로 거둬들일 만큼 형사사건 공소시효 문제가 명약관화한 것이었는가 하는 점이 남는다. 법리적 문제가 어떻든, 통장에 29만원밖에 없다던 전두환씨가 골프장에서 라운딩을 하면서도 정권 찬탈과 시민 학살에 대해서는 진심 어린 사과의 뜻을 밝히지 않는 모습을 개탄하는 국민의 가슴앓이는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사법처리가 아니라 진실규명과 화해가 과거사 청산의 정도(正道)라고들 하지만 화해를 구성하는 두 요소가 사죄와 용서라는 점을 감안하면 화해의 조건은 전혀 성숙돼 있지 않다.
형사사건의 공소시효를 배제하는 문제가 명백히 위헌이라면 그렇다 치자. 그럼 민사상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지, 이에 대해 청와대나 열린우리당은 구체 방안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 청와대는 일단 민사상의 공소시효를 배제해 피해자가 보상이나 배상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열겠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그 다음 수순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 국가가 국민의 혈세를 동원해 피해자에게 보상이나 배상을 한다면 그렇게 지급된 국민 혈세는 어떻게 보전할 것인가? 인권을 짓밟고 민주적 기본질서를 해친 가해자가 국가권력 전체가 아니라 국가권력에 몸 담았던 특정 관료와 정치인이었던 사실이 밝혀질 경우, 그래도 국가가 국민의 세금으로 메워야 하는 것인가? 일단 국민의 혈세로 배상과 보상을 한 다음에 특정의 가해자에게 구상권을 청구하겠다는 것인가? 이에 대해 여권은 말이 없다.
신군부 권력 찬탈 음모의 희생양이 됐던 80년의 광주 시민들은 국가로부터 배상을 받았다. 하지만 그 후 국가가 전두환씨나 노태우씨, 또 광주 유혈진압 지휘선상에 있었던 신군부 세력에 구상권을 청구했다는 소식은 없다.
광주 시민이 마음 아파하는 것은 단지 이 뿐만이 아니다. 몇푼의 배상금보다 더 중요한 문제, 광주 학살의 최고 책임자 즉 발포 명령자가 누구인지조차 밝히지 못한 한국 현대사의 짙은 그림자가 너무 한심스럽고 개탄스러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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