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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두 시에 일어나 버스에 승차하는 남북 대표단.
새벽 두 시에 일어나 버스에 승차하는 남북 대표단. ⓒ 정용국
백두산 막바지 비탈길을 오르는 버스 위로 보름달이 떠있다.
백두산 막바지 비탈길을 오르는 버스 위로 보름달이 떠있다. ⓒ 정용국
원래의 일정표로는 2시 30분에 일어나서 3시에 호텔을 출발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는데 상황실에서도 시간을 일출 전 도착에 맞추어야 하는 부담감 때문에 2시 10분에 각 방의 문을 두드리고 다니며 수선을 피웠다.

우당탕 쿵탕 하며 갑자기 떠드는 소리와 함께 백두산 천지를 찾아가는 길이 시작되고 있었다. 다른 일행들도 잠을 설치고 있었던 모양인지 일찍 깨운 것을 나무라는 사람은 없는 대신 정말로 칼 같이 짐을 꾸려서 호텔 앞 주차장으로 나오는 것이었다.

삼지연 비행장에서 버스를 타고 베개봉 호텔로 이동한 조별로 승합차를 사용하게 되어서 우리 조는 또 김창규 시인의 재담을 만끽하며 백두산에 오를 수 있었다. 모든 참가자들은 눈을 뜨자마자 창문부터 열고 날씨를 확인하였는데 다행히 보름달이 휘영청 걸려 있어서 안도의 한숨을 놓았지만 어제 일기의 변화무쌍을 경험한 터라 아주 마음을 놓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베개봉 호텔이 해발 1300m에 있었으니 우리가 더 올라갈 그 높이에는 엄청난 변수가 들어 있을 수 있었다. 또한 짙은 안개나 운무가 끼어도 일출을 잘 관망하기는 어려운 일이 되고 마는 것이다.

나는 다행히 오른쪽 운전대가 있는 운전수의 바로 뒷자리에 앉았고 김창규형은 아주 일찍부터 운전석 옆자리에 올라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승합차는 어둠을 뚫고 붉은 황톳길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백두산이 우리 나라에서 최고로 높은 산으로 배워서 인지 차로 꼭대기까지 올라간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았다.

그러나 어제 삼지연에서 베개봉 호텔로 오면서 그 길을 보니 과연 백두산은 완만한 경사를 가진 엄청 큰 규모를 가진 산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헤드라이트가 끝없는 삼림 속으로 난 길을 비추며 가다가 커브를 틀 때면 우거진 이깔나무의 빽빽하게 들어찬 속을 조금씩 보여주곤 하였다. 보름이 이틀 지난 달은 아직도 완연하게 그 둥근 자태로 우리 머리 위로 따라오며 남북의 문인들이 함께 오르는 백두산 길을 비춰주는 것이었다.

'아, 감미롭고 숨이 차는구나 이 길을 진정 우리가 갈 수 있다니 행복하고도 행복하여라.' 나는 감정에 푹 사로잡혀 거의 숨이 넘어가고 있는 창규형의 독백을 들으며 나도 같은 감정의 출렁거림을 공유하고 있었다. '저 달 좀 봐라, 죽인다.' 창규 형 옆자리를 비집고 앉은 김영현 형도 가끔씩 창규형의 말에 추임새를 넣어 주며 분위를 살렸다.

완만한 경사를 유지하며 숲 속 길을 내달린 길을 한 시간여 달려 나가자 나무가 거의 보이지 않는 드넓은 초원 위로 서서히 경사가 심해지는 길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들꽃이 무리를 지어 피어 있는 초원의 전경이 끝없이 펼쳐졌다. 벌써 동쪽 하늘은 동이 트기 전이었지만 훤하게 밝아오고 있는 게 보였고 밑으로는 운해가 넓게 퍼져 있어서 우리는 구름 위를 날아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다.

승합차의 미등이 아득하게 보이는 위로 보름달이 걸려 있는 비탈길을 20여분 올라가니 눈을 의심할 정도로 우리는 백두산 꼭대기에 서있는 것이 아닌가? 그때 우리를 뜨겁게 휘감던 백두산의 바람은 정녕 이것이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려는 듯 더욱 거세게 몰아쳤다. 행사를 서둘러야 할 것 같았다.

버스에서 내린 김창규 시인이 땅에 입맞추고 있다.
버스에서 내린 김창규 시인이 땅에 입맞추고 있다. ⓒ 정용국
하늘연못이란 이름대로 천지는 병풍처럼 둘러싼 봉우리와 함께 웅장했다.
하늘연못이란 이름대로 천지는 병풍처럼 둘러싼 봉우리와 함께 웅장했다. ⓒ 정용국
장군봉 위로는 아직 보름달이 높이 걸려 있었지만 병사봉 뒤로 보이는 동녘은 이미 붉은 빛이 일출이 멀지 않았음을 알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창규 형은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무릎을 꿇고 땅에 입을 맞추었다.

백두산 천지에서 우리 남과 북의 문인들이 함께 열기로 한 '통일문학의 해돋이' 행사는 하늘의 도움으로 열릴 수 있게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만약에 하늘의 도움이 없었던들 우리가 폭풍우 속에서 행사를 진행할 수가 있었겠는가. 나는 승합차 안에서 창규 형에게 이렇게 말했다.

"형, 우리는 백두산 천지에 가서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어야 할 것 같아요. 그동안 우리는 너무 가지 못할 길, 하지 못할 일, 가리지 않고 서로를 배려하지도 용서하지도 않고 살아왔잖아요. 그러니 백두산 산신령님께 그것부터 용서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몰아치는 바람에 몸은 흔들렸지만 우리는 먼저 천지를 보기 위해 난간이 쳐진 쇠사슬을 붙잡고 아무 말도 못한 채 그냥 그렇게 서 있었다. 진행자들이 마이크를 잡고 곧 행사를 진행하겠으니 정열해 달라고 몇 차례나 방송을 하고서야 우리 일행은 대오를 갖추고 모일 수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웅장하고 커다란 천지는 새벽빛을 받고 푸르고 장엄하게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신령님, 우리가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서로의 가슴에 생채기 내고 매몰차게 소금까지 뿌려 댄 그날 그일 들을 반성합니다. 그러나 오늘 서로 아무 조건이나 사심없이 함께 이 자리에 섰습니다. 신령님, 용서하시고 또 용서해 주십시오.' 나는 이렇게 백두산 천지와의 대면을 잘못을 비는 사과로 시작하고 있었다.

천지를 뒤로 하고 남과 북의 대표단 일행은 빙 둘러섰다. 해가 운해를 밀어 올리며 그 장엄하고 힘찬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자 우리는 박수와 환호로 해를 맞았다. 그때까지도 장군봉 위로는 보름달이 지지 않고 떠 있었고 병사봉 너머로는 해가 솟아오르는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우리들은 그 엄청난 하늘 밑에서 '통일문학의 새벽'을 여는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60년 만의 해맞이는 남과 북의 작가들이 공동으로 작성한 공동선언문으로 시작되었다.

첫째, 우리 민족 작가들은 6·15 공동 선언을 조국의 유일한 이정표로 삼고 이를 견결히 옹호하고 끝까지 고수할 것이다.

둘째, 우리 민족 작가들은 우리 민족끼리의 기치 아래 민족, 자주, 반전 평화, 통일 애국의 정신으로 문학 창작에 매진할 것이다.

셋째, 우리 민족 작가들은 사상과 신앙, 출신 지역과 입장을 넘어 굳게 단합하며 민족 문학 활동에서 연대와 연합을 더욱 활성화해 나갈 것이다.


남과 북의 대표가 함께 공동선언문을 낭독하자 모든 참가자들은 환호와 박수로 천지가 떠나갈 듯 하였다. 이어 민족작가대회 공동위원장을 맞은 고은 시인은 전날 밤 삼지연에서 썼다는 <다시 백두산에서>를 그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다시 백두산에서

고 은

해뜬다
이 삼천리 강산 모든 풀잎들
꽃잎 이슬들
아침 햇발 한 살 한 살에 눈 뜬다
물싸리꽃 곰치꽃
우정금꽃
기뻐라

일 백 년 전 하나였던 것
일 백 오십 년 전 하나였던 것
아니 삼 백년 전
어느 먹밤 터무니에
오로지 하나였던 것

일 백 년 후
어찌 하나 아니겠냐는 것

(중략)
오늘 새벽 네 시 백두영봉 정수리에
꽂히듯 올라
내 조국 전체를 깡그리 바라보며
바람 부른다
기뻐라

기뻐 어쩔 줄 몰라
어흥 호랑이 울음 운다
숨지 못해 젖어든 내 눈동자
열여섯 소년 그 시절의 그것
여기 백두 열여섯 봉우리에 내 핏줄 걸어 바라본다

내 몸의 여기저기
박힌 못들이
다 빠졌다

(중략)
몇 해 만인가
다시 백두산 정수리 새벽에 올라
몇 해 만인가 속 깊이 우짖어 남김없이
내 빈 발거음 터벅터벅 내려간다
내려가 삼지연 백두영봉 그림자를 오롯이 맞이한다
아니 둘이 아닌
하나의 삶 그것을 낳고야 말
햇빛 부신 하루를 맞이한다

저 바다 가득히 해 진다


북의 박세옥 시인도 이에 답하여 '백두산의 축복'이라는 시에서 백두산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자는 말로 화답했다. 그리고 북의 참가자 박경심 시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인사말을 하였다.

"이 세상에서 지금 우리들처럼 아름다운 아침을 맞는 이들은 없습니다."

공동선언문을 낭독하는 남과 북의 대표들.
공동선언문을 낭독하는 남과 북의 대표들. ⓒ 정용국

<다시 백두산에서>를 낭송하는 고은 시인
<다시 백두산에서>를 낭송하는 고은 시인 ⓒ 정용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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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한국작가회의, 한국시조시인협회 사무총장. 한국문학평화포럼 사무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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