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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사 대웅전
보현사 대웅전 ⓒ 정용국

아무튼 우리 일행은 보현사의 해탈문에 들어서면서 정말 오랜만에 가뿐하고 상큼한 마음으로 그 동안의 마음고생을 털고 관광다운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나는 백두관에서 주체사상 비디오를 보며 정말로 한 열흘만 더 이곳에서 교육을 받으면 주체사상 신봉자가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엉뚱한 생각을 했을 정도니 60년을 이곳에서 산 사람들 또는 태어나서부터 그 생각을 고스란히 보고 들은 사람들이야 당연한 지경이 아니겠는가? 보현사는 우리가 남쪽에서 많이 보았던 사찰이었고 선전의 대상이 되기 어려운 대상이었으므로 돌아보는 일행의 마음은 편안했던 것이다.

보현사 대웅전의 본불과 협시불
보현사 대웅전의 본불과 협시불 ⓒ 정용국

보현사 주지 정명스님 주관으로 간단한 예불이 진행되었다. 목탁을 치며 반야심경을 게송하니 마음이 참 편안해졌다. 동국대 홍기삼 총장과 고은, 백낙청, 이근배 선생 등이 참가한 예불은 10여분 정도 걸렸다. 게송의 억양이나 박자는 남과 조금의 차이가 있었고 스님의 복장도 조금 달랐다. 얼마 전까지는 스님이 없었던 것으로 알았는데 22명의 스님이 있다고 주지스님은 설명했다.

본존불은 비로자나불이었고 협시불은 입상의 형태를 하고 있는 보기 드문 형태를 갖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부처님 탄신일, 성도일, 열반일을 불가의 삼대 명절로 지내며 교파는 조계종파에 가깝다고 한다. 만약 남과 북의 교류가 증진되고 교류가 더욱 활발해진다면 불교든 기독교든 종교적인 면에서의 교류는 통일의 길에 한 몫을 충분히 하게 될 것으로 보여 진다.

보현사 정명스님과 환담하는 동국대 홍기삼 총장(오른쪽)
보현사 정명스님과 환담하는 동국대 홍기삼 총장(오른쪽) ⓒ 정용국

절을 한 바퀴 돌아 나오면 예의 매대가 있게 마련이어서 냉차도 팔고 기념품도 팔고 있었다. 찬 오미자차를 한 잔에 1달러였는데 판매원은 주변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넉넉하게 잔을 돌렸다. 이근배 선생은 '묘향산 보현사 중수기'라는 탁본 한 점과 수석 하나를 구입했는데 이를 본 김원일 선생이 결정타를 한 방 먹이셔서 다들 웃고 말았다.

"아무튼 이근배 선생 무역업은 알아줘야 해. 저거 인사동에 가지고 나가면 얼마 받을지 몰라. 이 선생은 여행경비 다 건졌다!"

보현사 안에 자리한 서산대사 사당인 수충사
보현사 안에 자리한 서산대사 사당인 수충사 ⓒ 정용국

이제는 다시 평양으로 가서 고별만찬을 하고 나면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일만 남아 있었다. 우리 대표단 각자는 한동안 머리 안이 서걱서걱하는 마찰음을 느끼며 일상을 살아갈 것이다. 생각을 비벼서 사는 사람들이니 만큼 얼마나 많은 날개들이 즐겁게 또는 슬프게 피어날 것인가. 이런 것들은 다 우리들에겐 새로운 것들이니 다 약으로 삼아 좋은 글을 쓸 일이다.

<웰컴 투 동막골>과 <어떤 나라> <천리마 축구단>

글을 마감하려는 오늘 나는 조선이 새롭게 인식되고 평가받으려는 자발적인 자기변화와 더불어 주변국들의 폭넓은 이해가 내려지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어제 <경향신문>의 사설과 대니얼 고든 감독이 만든 <어떤 나라>와 <천리마 축구단>에 대한 영화평을 보면서 조금씩이나마 북이 신나는 세상으로 나서주기를 꿈꿨다. 비록 허구의 상상이 만들어낸 영화요 외국인이 찍은 다큐멘터리였지만 그곳에는 즐거운 비명이 있지 않은가?

먼저 경향신문의 사설 한 토막을 보자(2005년 8월 29일자).

"'웰컴 투 동막골'에는 같은 시기에 개봉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미와 일본의 장편 애니메이션, 화려한 트렌디풍 영화가 주는 감각적이거나 말초적 자극이 없다. 현실을 투사한 리얼리즘도, 통쾌무비한 카타르시스도 없다. 이미 '권력'으로 간주되는 대형 스타도 보이지 않는다. 하나같이 도저한 자본의 영화미학이 통하지 않는 장치들이다.

한데도 가장 비극적 현대사를 판타지한, 그래서 몽환적이거나 동화적일 수밖에 없는 '동막골'에 박수를 치고 눈물을 흘리고 있다. 한국전쟁을 할아버지의 전설쯤으로 아는 젊은 세대건, 한국전쟁이 여전히 살아 있는 상처이자 고통인 세대이건, 모두를 위무할 만큼 '동막골'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총은 작대기가 되고, 수류탄은 터져 팝콘비로 내리는 동막골에서 일방적 편가름이나 승패는 존재하지 않는다. 국군도, 인민군도, 미군도,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한편이 되는 그 무(無)적(敵)의 마을은 물론 현실에서 부재하는 거짓의 공간이다. 하지만 이 각박한 편가름과 소통의 단절의 세계에 살고 있는 이들은 동막골의 세상을 꿈꾼다. '아이들처럼 막 살아라'라는 함의의 동막골에 들어가 잊어버린 순수를 희구한다."


이런 내용들을 보고 있자면 우리들이 과연 국가보안법이 엄존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은 맞는가 라는 의문이 절로 난다. 한 기자는 어제 동막골의 영화제작자와 관람객 500만명을 다 보안법 위반으로 처벌해야 마땅하지 않겠느냐고 능청을 떨 정도니 이 얼마나 무지막지한 보안법에 대한 협박이고 결례인가 말이다. 차라리 이렇게 연명하느니 보안법은 자결하는 편이 체면을 살리는 길임이 마땅하다고 하겠다.

각설하고, 영국인 감독 대니얼 고든에게 조선의 실 상황을 찍게 허가한 북의 태도는 상당히 전향적이라 할 수 있겠는데 한국어 제목이 '어떤 나라(A State of Mind)', '천리마 축구단(The Game of Their Lives)'이긴 하지만 원제를 보면 고든 감독도 북의 'Mind'와 'Lives'를 읽으려고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이렇게 조선은 슬금슬금 세상의 밖으로 나와야 한다. 고든 감독의 노력이 4년 걸렸다지만 북이 자기네들도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계산이 그 밑에 깔려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북이 검열을 안했을 리 없는데도 당연히 잘렸어야 할 필름의 일부분도 과감하게 허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은근하게 우리가 경제적으로 힘들다는 엄살도 내비치고 그렇지만 우리들의 이데올로기는 확실하다는 메시지도 보내는 것이다.

여행기가 엉뚱한 길로 나갔다. 그러나 시인의 눈에는 이런 영화를 통하여 꿈꾸고 터지는 아름다움처럼 우리들의 각박한 현실이 그렇게 꽃피기를 한없이 바라기 때문에 그 이야기들을 빌려다 구치한 상상을 해보는 것이다.

어쨌든 이런 앙큼한 영화나 고든의 다큐멘터리 영화가 우리 시대의 냉전적 이데올로기를 불식시키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은 분명하다. 이에 힘입어 조선의 생각도 조금씩 바뀌고 우리가 같은 민족으로서의 동질성을 찾아가는데 약이 되고 힘이 되길 바란다. 그리고 반드시 그렇게 될 날은 오고야 말 것이다.

청천강 금강다리를 점거(?)하다

고속도로 금강다리 위에서 사진촬영에 바쁜 대표단 일행의 모습
고속도로 금강다리 위에서 사진촬영에 바쁜 대표단 일행의 모습 ⓒ 정용국
평양으로 돌아가는 청천강에는 더위를 피해 물장구를 치는 아이들로 가득했다. 새까맣게 그을린 얼굴들은 바로 우리가 고향에서 자랄 때 모습과 다를 게 없었다. 옥수수가 사람 키만큼 자라고 있는 밭을 지나 버스가 잠깐 멈춰 섰다. 그곳은 청천강 금강다리였으니 우리에게 사진이라도 한 번씩 더 찍으라고 배려해준 것이었다.

일행들은 멀리 청천강과 경의선 철길을 배경으로 사진들을 찍느라 법석인 것을 보더니 우리의 '황구라 선생' 왈 '야, 이거 점거 농성하는 거 같다 야!' 해서 또 한바탕 웃었다. 일요일인데도 고속도로는 우리가 길을 막고 사진을 찍어도 지장을 주지 않을 정도로 차가 없었다. 다리 밑에서는 염소가 풀을 뜯고 강은 넉넉하게 굽이치며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호텔로 돌아오니 마치 집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정장차림으로 갈아입고 준비해온 선물들을 한 곳에 모아 전달하기로 했다. 나는 그래도 아는 이에게 전해주는 것이 나을 것 같아 박경심 시인에게 전자계산기와 샤프펜 그리고 영어사전 한 권을 따로 전해 주었다.

인민문화궁전 연회장에서 열린 고별만찬은 환영만찬에 비해 한결 가볍고 즐거운 자리였다. 며칠 같이 지내는 사이에 서로 말도 많이 했고 결정적 깊이는 아닐지라도 정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다들 큰소리로 건배를 외치고 조별로 어깨동무를 하고 사진을 찍는 이들로 떠들썩하였다.

고은 선생은 그 특유의 제스처로 남대현 선생을 끌어안고 등을 두드리고 하다가 마침내는 뽀뽀를 하여 주위의 박수를 받았다. 연회장 밖으로 나와서도 쉽게 헤어지지 못하고 안내원들의 재촉이 있고 나서야 차에 올랐다. 인민문화궁전 밖의 아파트와 거리는 이미 불이 꺼져 어두웠고 축제가 끝난 허전함은 그 어두움만큼이나 무거웠다.

고려호텔 스카이라운지에서 마지막 회식 중인 6조 조원들
고려호텔 스카이라운지에서 마지막 회식 중인 6조 조원들 ⓒ 정용국
이미 술이 거나했지만 조별로 모이자는 전갈들이 여기저기서 나돌았다. 이제 평양에서의 마지막 밤을 그냥 지나칠 사람들이 아니었다. 우리 6조는 44층의 스카이라운지에서 모이기로 하였다. 여러 조들이 모여서 판을 벌이다가 돌아다니며 마시고 마지막에는 조를 따지기가 어려운 단체전이 되고 말았다.

김원일 선생님이 주도한 우리 조는 조니워커에 하이네켄 맥주를 섞는 일명 폭탄주를 대여섯 잔 돌린 것으로 기억한다. 그 이후에는 얼마를 더 마셨는지 지나던 선배가 따라 주고 가고 찾아온 분과 주고받은 잔이 아마 꽤나 되었을 것이다.

모두 내일이면 평양을 떠나야 하고 언제 다시 찾을 수 있을지 가늠이 되지 않는 것을 아쉬워했다. 사람이 사는 상황 중에서 불확실성은 사람을 얼마나 불안하게 만드는 요소인가? 앞의 일을 단정할 수 없다는 것, 더구나 과거의 나쁜 기억이 되살아나서 재발의 우려가 있을 때, 그 불안은 거의 두 배에 가까운 것이 되는 것이다.

그래도 쉽지 않은 방문이 무사하게 끝이 났다는 안도감에 우리는 물론이고 집행부 사람들은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불확실하지만 기쁨이 섞인 평양에서의 마지막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44층 실내는 밝았지만 사위는 너무 어둡고 조용했다. 나는 취기에 호텔 밖으로 뛰어나가 보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객실로 내려왔다.

다음날 아침에 간신히 목욕을 하고 나가보니 모두들 술독으로 인해서 비몽사몽들이었다. 나는 남은 약으로도 부족해 일 층 매대에 가서 술독을 풀어준다는 해정차를 사서 마셨다. 그리고 오인태 시인과 은희경 소설가에게도 해정차를 나눠주었다.

결국 아침은 물론이고 점심으로 나온 풀코스 단고기 요리도 포기해야 할 만큼 속이 풀리지 않았다. 사실은 어제 송별연부터 흥분과 긴장이 풀리면서 술을 제어하는 장치가 망가졌던 것이다. 할 수 없이 냉면 국물로 속을 조금 다스리고 말았다. 그렇지만 초라한 우리 민족의 일들이 순리대로 풀리듯이 술독도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나는 호텔 침대 위에 청소원들에게 전할 선물과 간단한 메모 쪽지를 남기고 나왔다.

고려호텔 2422호실에 필자가 남기고 온 선물과 편지
고려호텔 2422호실에 필자가 남기고 온 선물과 편지 ⓒ 정용국

비행기가 활주로를 향하여 움직이고 이륙할 때까지 조선의 작가들은 환송대에서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김일성 주석의 대형 초상화가 멀리 우리를 보고 있었다. 이곳을 언제 어떤 모습으로 다시 올 수 있을 것인가? 과연 조선은 현 상황을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 그러나 나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문제가 풀릴 것을 기원했고 반드시 그러리라 믿고 싶었다.

비행기가 이륙했다. 옥수수 밭 농부가 손을 흔들었고 모든 물상들은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었다. 아! 모질게 살아온 겨레여, 세월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었고 세월은 또 우리를 손잡게 했다. 보아라 사람아, 세상의 이 사람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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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평양 민족작가대회 참관기를 마칩니다. 그 동안 읽고 격려해주신 독자들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그리고 좋은 면에 올려주신 오마이뉴스 편집실에도 인사드립니다. 이 글이 분단 현실을 이해하고 남과 북의 자리를 조금이라도 가깝게 하는데 도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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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한국작가회의, 한국시조시인협회 사무총장. 한국문학평화포럼 사무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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