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색한 대기념비 관람을 끝내고 나니 이번에는 본격적인 정신 교육 일정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백두관'이 바로 그곳이었다. 조선은 외국인이나 자국 인민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는 어김없이 주체사상을 고양할 시설이나 전시관 등을 마련하여 두었다.
백두관은 지정학적으로 주체사상을 교육하기에 좋은 곳이 아닐 수 없다. 밀영의 유적지가 지척이고 겨울에는 스키장이 있어 사람들이 몰리는 곳이며 베개봉 호텔까지 갖추고 있으니 아주 좋은 위치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삼지연읍은 변방에 자리한 소읍치고는 주택 개량이 잘 되어 있었으니 마치 스위스풍의 뾰족 지붕에 빨강, 파랑 등 원색을 칠한 지붕들이 줄지어 나란히 큰길 옆으로 늘어서 있다. 스키장을 이곳에 설치한 것과 도로를 잘 만들어 놓은 이유도 모두 항일 유적지를 돋보이게 하는 장치들이라고 보여진다.
삼지연읍, 북한의 스위스?
백두관은 그동안 우리가 보고 들은 어느 전시장보다도 주체사상을 적극적이고 구체적으로 선전하는 곳이었다. 최신 컴퓨터 영상을 통하여 주체사상의 배경과 진로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교육하고 있었다.
우리가 조별로 관람하고 영상자료를 보는 시간에 줄지어 다른 소조들이 순서를 기다리며 대기하거나 우리와 비껴가며 영상자료를 보았다. 대부분 단체복을 입은 학생들이거나 군인들로 보였다.
그러나 안내원의 설명을 들으니 조선에서는 대학생들도 단체 활동시나 교육에 참가할 때는 군복과 비슷한 복장을 입는다고 말해 주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다 같은 밤색의 복장이었지만 휘장이나 계급장 모자 등의 모양에 따라서 조금씩 달라서 우리들이 그것을 구분하기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1층에서 영상자료와 모형들을 보고 2층으로 올라가니 그곳에는 이미 전산화하여 입력 시켜둔 김일성 주석의 음성을 주제별로 듣거나 출력할 수 있는 개인용 컴퓨터가 여럿 놓여 있어서 김일성 주석의 육성으로 교시나 회의 주재 장면을 보고 들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안내원의 들뜬 목소리와 열성에 우리 일행들이 부응하지 못하고 창 너머로 보이는 스키장과 형형색색의 뾰족 지붕을 배경으로 사진 촬영에만 분주하자 안내원 동무는 난감해 했다. 그리고는 얼른 출입문을 가리키며 날씨가 더우니 밖으로 나가서 시원한 바람을 쐬자며 말머리를 돌렸다.
마석의 모란공원을 아십니까?
차를 기다리는 동안 조선의 오영재 시인과 말을 나누게 되었는데 대화 중에 오 시인이 나에게 어디 사느냐고 물었다. 나는 오 시인이 전남 강진이 고향인데 우여곡절 끝에 이곳에 오게 된 것을 아는 터라 남쪽의 지명에 관심이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내가 경기도 남양주시에 산다고 했더니 정색을 하면서 그럼 마석 모란공원을 아느냐고 하는 것이었다. 내가 사는 남양주시의 와부읍에서 모란공원은 아주 가까운 거리이며 또한 모란공원은 민주 열사들이 많이 묻혀 있는 공원 묘원이었다. 늘봄 문익환, 전태일, 박종철 등의 유해가 이곳에 있어서 6·15 공동선언 5주기 기념식을 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모란공원을 어찌 아시느냐고 반문하자 오 시인은 당신의 부모님 묘소가 그곳에 있다고 했다. 서울에는 형제들이 살고 있어서 묘소를 돌보고 있다는 말로 보아 공식 경로는 아니라도 형제들의 소식을 멀리서나마 전해들은 것 같았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도 남과 북의 이산가족들이 만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며칠 전에는 화상 상봉을 통해서 구순의 노모가 이미 뇌졸중으로 말 한 마디 못하는 장면을 북에서 보고 통곡하는 장면을 텔레비전에서 보았다. 어찌 이산가족의 아픔을 말로 다 표현하고 글로 다 쓸 수 있겠는가. 남과 북에서 천만 명에 이르는 가족들이 60년을 보지 못하고 인생의 길이 어긋난 채 살아가는 현실은 세계에 뉴스가 아닐 수 없는 일이 되었다.
그래도 노모의 묘소도 알고 형제가 어디에서 살고 있다는 것만이라도 아는 오 시인은 다행이 아닐까. 죽었는지 살았는지 도대체 어찌 되었는지도 모르고 그동안 이미 노환으로 세상을 뜨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부디 통일이 빨리 되어서 오 선생님이 마석에 오시면 모란공원엘 모시고 가겠노라는 허무한 대답을 드릴 수밖에 없었다.
분단이라는 뼈아픈 현실 때문에 그동안 우리 민족은 남과 북을 막론하고 얼마나 많은 고통을 당하며 살아 왔는지를 생각해 보자. 한 핏줄끼리 전쟁을 한 것은 물론이요, 각종 군사적 충돌과 테러, 이를 악용한 정권들에 의해 피폐화되었던 개인들의 정신 공황은 또 누가 보상해 줄 것인가.
그렇다. 이젠 이만큼 했으면 그만 할 때도 되었다. 그만큼 울고 겪었으면 충분한 대가를 치른 것이다. 지금부터는 남과 북이 서로 다른 점들을 인정하고 그 기틀 위에 새로운 대결과 협력을 통한 평화를 모색하고 함께 사는 슬기로운 길을 걸어 나가야 한다.
대표단 일행이 지루한 교육 여정을 마치고 베개봉 호텔로 돌아 왔으나 안개로 늦어진 비행기는 1진을 태우고 평양에 가서 아직 돌아오지 못한 상황이었다. 일정이 이렇게 되면 사실 오늘밤 묘향산에서 갖게 되어 있는 남과 북 문인들의 문학의 밤 행사는 불가능하게 된 셈이었다. 늘 개인적인 대화와 접촉에 갈증을 느끼고 있는 남한의 작가들은 아쉬운 일정을 놓치고 만 셈이었다.
단체가 움직이고 안내를 받고 설명을 듣는 것은 일정한 선이 있고 '공식적'이라는 한계가 늘 붙어 다니게 마련이어서 막상 사사롭고 궁금한 실상을 묻거나 대답을 통하여 추측해 보는 일도 불가능하다. 그러나 문학의 밤 같은 행사는 얼마나 느슨하고 개인 접촉이 좋은 자리인가. 더군다나 술이라도 한 순배 돌려지면 한결 애틋하고 솔직한 말들을 서로 나눌 수 있었을 텐데 못내 아쉬운 일이 될 것 같았다.
"북조선에서도 한글 이름 많이 씁니다"
1진을 평양에 내려주고 다시 삼지연 비행장으로 돌아와 2진을 싣고 순안 공항에 우리가 도착한 것은 오후 5시나 되어서였으니 묘향산에는 늦은 밤이 되어서야 갈 것 같았다. 공항 출구를 나오는데 낯이 익은 어제 그 안내원이 있었다. 명찰에 적힌 이름이 '최봄이'여서 내가 이름이 참 예쁘다고 말해 주었는데 다시 만나니 반가웠다.
마침 호텔로 오는 버스에 리호근 선생이 있기에 아까 공항의 여자 안내원 이름이 '최봄이'였는데 조선에서도 한글 이름을 많이 쓰느냐고 물었더니 요즘에 특히 여자 이름에 순 우리말을 많이 쓴다고 했다. 실제 민화협 안내원 여성 동무를 '꽃단이'라고 부르는 것을 어제 들었다. 나는 그저 애칭으로 부르는 것으로 알았는데 진짜 자기 이름이라고 하였다. 리호근 선생의 친구 딸 이름도 '시내'라는 한글 이름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고려호텔로 돌아온 우리는 피곤했지만 다시 묘향산으로 가기 위해 옷가지를 챙기고 세수를 한 다음 버스에 올라야 했다. 버스는 호텔 앞 길가에 늘 주차해 있었는데 우리 4호차가 서 있는 길 건너에 작은 간판이 예쁘게 붙어 있는 '강냉이 국수집'이 보였다. 다른 음식점의 큰 간판과는 다르게 작은 곳에 연두색으로 쓴 간판은 그 크기뿐 아니라 과연 '강냉이 국수'는 어떤 음식일까 하는 호기심으로 꼭 한 번 들어가 보고 싶었다.
혹시 강원도 올챙이 국수 같은 것일까? 구멍이 숭숭 뚫린 곳으로 옥수수 반죽이 뚝뚝 떨어지며 끓는 물 속에서 익혀진 후 양념 간장을 얹어서 먹는 정선의 올챙이 국수는 허기를 채우는 좋은 먹거리였다는 생각이 미치자 궁금증은 더해졌다. 하지만 멀리 있는 탓에 사진도 제대로 찍지 못하고 길 건너에서 카메라 탓만 하며 렌즈를 있는 대로 당겨볼 뿐이었다.
버스는 저녁 어스름이 서서히 지기 시작하는 평양 시내를 돌아 북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조선에 평야가 있다면 청천강을 끼고 있는 이곳이 제일 큰 곳일 것이다. 넓은 논은 한참 해를 받아 짙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평양에서 향산으로 가는 고속도로는 거의 오가는 차가 없어서 우리는 거침없이 북으로 내달았다. 이정표에는 정주, 박천, 영변 등 그 이름도 정겨운 지명이 속속 지나쳐 갔다. 향산은 평안북도 향산군으로 묘향산이 있는 행정구역상의 이름이었다.
북한여행은 식도락 여행?
오늘 하루는 정말 눈코 뜰 새가 없이 바쁘게 지나가고 있다. 새벽 두 시에 일어나 백두산에서 치른 행사가 마치 며칠 전의 일 같았으니 아마 향산에 도착하면 고단해서 곯아떨어질 것이다. 점점 어두워져서 밖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고 아홉 시가 넘어서야 우리들은 향산호텔에 도착했다. 그곳 식당의 안내원들도 우리를 많이 기다렸는지 반갑게 맞아 주었다. 짐을 풀기도 전에 식당으로 가서 늦은 저녁부터 들었다.
향산호텔의 음식은 평야의 것에 비해 훨씬 더 기름진 것 같았다. 저녁으로 먹기에는 부담되는 종류의 음식도 많았는데 칠색송어 튀김, 애기돼지 다리찜, 오리고기 냉찜, 조선식 양장피 등이 그랬다. 생각으로는 걱정을 하면서도 손은 대책 없이 접시로 가고 말았다.
요리가 다 끝나고 밥과 산채옥돌 장국이 나왔는데 그 옥돌 뚝배기에 나온 장국은 묘향산 산채 나물을 끓인 것이라고 했다. 산채 향과 된장이 잘 어우러져 뒷맛이 아주 오래 남는 환상적인 마무리였다. 체면치레로 밥 한 숟갈을 남겼지만 결국은 또 과식을 하고 말았다.
워낙 도착 시간이 늦어졌지만 공연이 준비되어 있었으니 11시가 다 된 시간에 우리는 든든해진 속에 소주도 몇 잔 걸치고 향산호텔의 별관에서 공훈가수들이 나오는 공연을 관람했다. '까투리사냥' 같은 낯익은 곡도 불렀고 배우들의 율동은 아주 자연스럽고 재미있었다. 객석으로 들어와 춤을 유도하기도 하며 한 시간여 우리는 고단한 줄도 모르고 박수를 보냈다. 공연의 마지막 곡은 역시 '우리는 하나'였다.
향산호텔은 지대가 평지를 끝내고 산악지대로 접어드는 곳에 지어져서 그런지 산 앞에 바짝 들어서 있어서 답답한 느낌을 주었다. 이 호텔은 내일 우리가 방문할 국제친선 관람관에 오는 손님들과 묘향산의 보현사 관광객을 위해 지어진 것 같았다. 우리는 부른 배가 꺼지기도 전에 고단한 몸을 뉘어야 했으니 이번 여행이 끝나고 나면 아마 몇 근 쯤 살이 붙을 것은 뻔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