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자민당의 압승이 아니라 고이즈미의 압승이다. 국내 언론은 일본 중의원 선거 결과를 이렇게 평했다. 그래서 고이즈미에게 "대통령급 총리" "제왕" "황제" 등의 칭호를 붙였다.

이미 예상됐던 일이기에 국내 언론의 분석은 차분하다. 일본 내 보수우경화 흐름이 더 가속화될 것을 우려하면서 그런 흐름이 동북아 정세에 미칠 영향을 분석하는 데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여기까지는 별 차이가 없다. 하지만 고이즈미 압승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서는 해석이 갈렸다. 특히 <조선일보>와 <한겨레>의 해석은 극과 극이라 할 만큼 다르다.

<조선일보>는 고이즈미의 압승을 "우정 민영화의 결단을 국민들이 높게 평가한 결과"로 평했다. 우정민영화 사업은 "자민당의 최대 표밭과 자금줄 구실을 해온 우체국(직원 28만명) 조직을 해체한다는 뜻"이었고 그래서 당내 유력 파벌들은 물론이고 "공기업의 무사안일 경영에 매달려온 노조와 관련 업계들에 일대 타격을 가한" 게 이번 선거 결과라는 것이다.

반면 <한겨레>는 우정민영화 사업이 "국민들의 관심도에서 낮은 순위에" 있었는데도 고이즈미가 이를 "개혁의 상징"으로 탈바꿈시켜 "개혁 대 반개혁 구도를 연출해냈다"고 평했다. "개혁의 알맹이가 아니라 기득권층과의 투쟁 이미지만으로 개혁파의 지위를 독점하는 수법"이 동원된 "이미지 정치"였다는 것이다.

두 신문의 엇갈림 현상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두 신문 모두 "포퓰리즘"을 말하고 있지만 그 알맹이는 완전히 다르다.

<한겨레>는 고이즈미의 이미지 정치가 "삶에 훨씬 큰 영향을 끼치는 연금·사회보장·의료제도는 물론이고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비롯한 아시아 외교, 이라크 파병과 헌법 개정 등 주요 현안들을 매몰시켰다"고 비판했다. "양자택일을 강요해 정책에 대한 유권자들의 판단력을 흐리게" 한, 한마디로 "포퓰리즘" 선거였다는 것이다.

<조선일보>도 "포퓰리즘"을 말했다. "포퓰리즘"이란 단어를 쓰진 않았지만 <조선일보> 사설의 기조는 그것이었다. 하지만 진단 내용은 <한겨레>와는 정반대였다.

"자민당 집권 기반을 자민당 스스로 무너뜨리는 자해행위라고 공격하며 결사적 저항을" 벌인 당내 유력 파벌들, 그리고 "효율화를 외면한 채 공기업의 무사안일 경영에 매달려온 노조와 관련 업계들"의 공세를 차단한 게 바로 이번 선거라는 게 <조선일보>의 진단이다. 다시 말해, 다수 집단의 "포퓰리즘적 기득권 보호 공세"에 정면으로 맞선 게 고이즈미요 일본 유권자였다는 것이다.

이런 시각차는 일본 중의원 선거를 곱씹어 봐야 할 주체를 선정하는 데서도 나타났다. <한겨레>는 이번 선거를 "고이즈미 극장"에서 한정 연출된 "개혁 퍼포먼스"로 규정한 반면, <조선일보>는 한국 정치권으로 대상을 옮겼다. "나라의 살 길과는 관계없는 '정치권의, 정치권을 위한 선거구 변경'에만 몰두해 있는 우리 정치권"이 일본 선거 결과를 곱씹어 봐야 한다는 것이다.

<조선일보>가 화두를 던진 셈이니까 이어가자. "고이즈미가 부럽다"던 노무현 대통령이 던진 선거구제 개편 화두를 일본 중의원 선거에 대입하면 어떤 평가가 나올까?

노 대통령의 전략은, 삶에 훨씬 큰 영향을 미치는 민생 등의 현안을 선거구제 개편에 매몰시킴으로써 "양자택일을 강요해 정책에 대한 유권자들의 판단력을 흐리게 한" 이미지 정치요 포퓰리즘인가? 아니면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해 결사적 저항을 벌이는 정치권의 공세에 정면으로 맞선 결단인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