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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쉽게 만나고 소비하는 것들일수록 그것의 원재료가 무언지, 어떤 과정을 거쳐 완제품이 되는지에 관해서는 무심히 넘어가는 경우가 흔하다. 반면 공정에 대한 궁금증을 가진 이들도 적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마주하는 친숙한 제품의 탄생에서 소멸까지를 직접 제품의 입장이 되어 1인칭 화법으로 서술해보았다. 기획 세 번째 기사는 땅콩과 함께 '심심풀이의 원조'라 할 껌이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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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뼛속이 환해지는 듯 행복하다. 나를 씹어준 사람이 2005년 오늘 한국에서 영화와 CF를 오가며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여배우 P라니.
바쁜 스케줄 탓에 김밥 한 줄로 저녁을 대신한 그녀는 이어지는 연예전문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의 입 냄새를 예방하기 위해 날 벗겨 씹었다. 그리곤, 다 씹은 나를 조용히 포장지에 싸서 재킷 주머니에 넣었다. 나중에 휴지통에 버릴 요량으로. 예쁜 얼굴만큼 매너도 캡이다. 이 정도면 날 씹을 자격, 충분하다.
그렇다. 난 껌이다. 오징어 땅콩과 함께 심심풀이용으로 늘상 씹히는. 수많은 내 친구들 중 나는 운이 좋은 편이다. 누런 이빨의 중년사내도 아니고, 침 흘리는 꼬마도 아닌 매력적인 여배우의 입에서 생의 마지막을 맞이했으니 말이다. P가 사용하는 '장 폴 고티에' 향수 냄새 가득한 재킷 속에서 지나온 내 삶을 돌아본다.
내 몸의 고향은 한국, 정신의 고향은 저 멀리 멕시코
나의 몸이 완전한 형태로 만들어진 건 한국이지만, 내 정신의 뿌리가 자란 곳은 남미의 정열적인 나라 멕시코다. 거기 살던 마야족은 자그마치 1700여년 전부터 사포딜라 나무의 수액을 채취해 끓인 걸 씹었다. 그게 이른바 '치클'이다. 치클은 씹을수록 부드러워지는 성질을 가졌다.
한국에서의 내 시장규모는 대략 2750억원. 이중 70% 이상을 생산·판매하는 롯데제과는 이 치클을 껌의 베이스(주원료)로 수입한다. 치클을 베이스로 만들어진 나를 '추잉껌'이라 부른다.
수입된 치클에 각종 감미료와 향료 등을 품목별로 배합비에 맞춰 계량하는 게 내가 만들어지기 위한 첫 단계다. 이를 원료계량 과정이라 부른다. 요사이는 자동화시스템이 상용화돼 이 과정은 사람이 아닌 기계가 담당한다.
정확한 계량을 마친 나는 믹서에 투입돼 배합된다. 이 커다란 믹서의 투입구를 '호퍼'라 칭한다. 거기로 들어간 나는 약 25분간 섞여진다. 배합이 완료된 이후에는 압출 과정을 거친다. 눌려진 나는 컨베이어 벨트를 따라 냉각기로 간다. 냉각 과정을 거치면 나는 1.66mm 두께의 얇은 판 형태가 된다.
나의 역사를 공부하며 잠시 쉬었다 가자. 치클을 사용해 나를 최초로 만든 사람은 19세기 미국에 살았던 토마스 아담스다. 타이어를 연구하다가 내가 생겨났다는 이야기는 세간에 널리 알려진 사실. 내 절친한 친구 풍선껌은 1928년에 처음으로 만들어졌다. 그 친구는 2차대전을 치르던 군인들에게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다. 현재 세계 최대의 껌 생산회사는 미국의 리글리사(社).
60년대 후반 상인들, 껌 사려고 돈보따리 들고 회사 앞에 줄서기도
나를 한국에 들여온 건 미국의 군인들이다. 한국전쟁 이후 미군들의 뒤를 쫓아가며 "쪼꼬레또(초콜릿) 기브 미! 추잉껌 기브 미!"를 외치던 아이들. 가난한 시절의 암울한 풍경화. 그래서 내 몸엔 우울한 기억도 동시에 묻어있다.
한국의 기술로 최초의 내 친구 풍선껌을 만든 건 1956년이다. 해태제과가 만든 '해태풍선껌'이 첫 제품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롯데제과가 1967년 회사 설립과 함께 '쿨민트' '바브민트' '오렌지볼'이란 내 조상들을 만들어 인기를 끌었다.
70년대 초반까지 전국 상인들이 현금을 들고 와 내 조상들을 사가려고 회사 앞에 줄을 설 정도였다. 호시절이었다. 참, 한 가지 빼놓은 게 있다. 내 친구 풍선껌에는 치클이 들어가지 않는다. 풍선을 불 때 쉽게 터지기 때문이다.
이제 내 탄생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자. 판 형태로 바뀐 나는 에이징 터널을 통과해 일정 규격의 판 위에 150매 단위로 적재된다. 이후 12시간에 걸친 숙성 과정을 거치는데 이는 내 몸 속에 있는 수분을 증발시키기 위해서다.
숙성된 형태의 나를 '판껌'이라 부른다. 누구나 짐작할 수 있겠지만 그 큰 걸 입에 넣을 순 없으니 다음 단계는 당연지사 절단 과정이다. 입에 넣기 딱 좋은 크기로 자르는 것이다. 그 단계를 거치면 나는 벌거벗은 꼴이긴 하지만 사람들이 이름 붙인 '껌'이란 제품의 완벽한 형태를 지니게 된다.
잠시 본론에서 벗어나 재밌는 이야기 두어 가지 해줄까한다.
나를 가장 자주 그리고, 많이 씹는 사람은 누굴까? 정답은 '껌 연구원들'이다. 나에 대한 정보분석과 저작(咀嚼)분석, 향분석 등을 하는 이들은 나를 씹는 것으로 아침을 연다. 하루에 씹는 양은 20~30개. 나의 특성상 품질검사는 사람의 감각으로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주어진 즐거운 고역이다.
지나가는 사람 입 냄새만 맡고도 씹은 껌의 종류 알아 맞추는 사람들
연구원들은 지나가는 사람의 입 냄새만 맡고도 방금 씹은 나의 종류를 파악해낸다. 이런 수준에 오르려면 적어도 5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20년을 연구원으로 일한 사람이 씹은 나의 개수는 약 17만 개. 무게로 환산하면 490kg에 육박한다. 2m가 넘는 거구 최홍만(전직 씨름선수·현 K-1 선수)의 몸무게 3배 정도의 양이다.
흥미로운 이야기 또 하나.
국내에서 생산되는 제품 중 표지 디자인을 하기 가장 어려운 제품 중 하나가 나다. 포장지가 원체 작기 때문인데 매킨토시가 일반화하기 이전인 90년대 초반까지도 내 몸을 싸는 종이에 사람이 직접 그림을 그렸다. 가로와 세로의 크기가 5cm도 채 안 되는 종이에 세밀한 그림과 글씨를 그리고 써넣던 사람의 수고를 구구절절 설명해 무엇할까. 차라리 그것보다 1000배는 더 큰 극장간판 그림을 그리는 게 더 쉽지 않았을까?
이제 벌거벗은 나를 옷 입히는 과정이 남았다. 포장기를 거치며 나는 옷을 세 겹에 걸쳐 입는다. 가장 안쪽이 내포, 중간에 껴입은 것이 외포, 겉옷은 볼케이스로 불린다. 마지막 옷을 입은 나를 박스에 포장하는 게 마지막 단계다.
이렇게 쉽지 않은 과정을 거쳐 태어난 나이니, 보다 매너 있고, 얌전하게 나를 씹어줄 사람에게 팔려갔으면 하는 게 당연한 바람이다. 앞서 내가 행복하다고 말했던 것도 바로 그런 사람이 날 씹어줬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내 마지막을 아프거나,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야기를 마치며 내가 지닌 몇 가지 좋은 기능을 들려주려 한다. 물론, 세상 모든 제품에는 장단점이 있다. 하지만, 내가 내 험담을 할 순 없으니 오늘은 좋은 쪽으로의 기능만 말하는 걸 이해해주길.
나는 소화기능을 돕는다. 잘 씹는 습관을 길러주고 타액분비를 촉진하기 때문이다. 또, 뇌세포를 자극해 일의 능률을 높이고, 졸음을 방지해주는 효과가 있다. 이는 1987년 일본산업의학재단의 실험결과를 통해 입증됐다. 이외에도 입안의 유해균 부패를 막아주고, 음식물 찌꺼기를 제거해 입 속을 깨끗하게 해준다.
자, 장황한 자랑까지 마쳤으니 이제 난 휴지통에 버려질 시간까지 영화배우 P의 재킷 속에서 혼자만의 상념에 젖어들어 보련다. 길고 긴 내 라이프 스토리를 지겨워하지 않고 들어줘서 고맙다.
| | 1년에 1900억원어치가 팔리는 롯데껌의 어제와 오늘 | | | 70년대엔 껌 삼총사...21세기 껌업계의 화두는 '자일리톨' | | | |
| | ▲ 생산 년대별로 분류해 본 껌. | ⓒ롯데제과 제공 | 1967년 처음으로 껌을 생산한 이후 롯데껌이 본격적인 전성기를 맞는 건 72년 영등포에 공장을 신축하고 쥬시후레쉬, 후레쉬민트, 스피아민트라는 3총사를 내놓으면서다. 이 껌들은 껌판에 특유의 무늬를 새기고, 방수포장을 해 현재 생산되는 껌들의 원형으로 평가받는다.
이후에도 이름도 재밌는 '왔다껌'을 비롯, '이브껌' '수노아껌' 등의 히트상품을 출시했다. 8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는 각종 기능껌들이 선보였는데 스트레스 해소, 치석 제거, 구취 예방 등의 효과를 선전하며 나온 껌 중 설탕이 들어있지 않은 '화이트-E껌'의 인기가 높았다.
21세기에 접어든 껌업계의 화두는 단연 '자일리톨'이다. 롯데만이 아니라 해태 등 껌제조사가 판매하는 제품의 50% 이상이 자일리톨이 함유된 껌이다. 최고 인기 품목임은 불문가지. 자작나무와 떡갈나무 등에서 추출하는 자일리톨은 충치를 예방하는 등의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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