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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쉽게 만나고 소비하는 것들일수록 그것의 원재료가 무언지, 어떤 과정을 거쳐 완제품이 되는지에 관해서는 무심히 넘어가는 경우가 흔하다. 반면 공정에 대한 궁금증을 가진 이들도 적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마주하는 친숙한 제품의 탄생에서 소멸까지를 직접 제품의 입장이 되어 1인칭 화법으로 서술해보았다. 기획 네 번째 기사는 하이힐이다. <편집자주>
ⓒ 금강제화 제공
풍문 하나

기원전 4세기경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고대 그리스 벽화에 등장하는 '나'를 신고 있는 건 여자가 아닌 남자다. 중세 유럽의 남성들도 나를 즐겨 신었다. 말이 주요한 교통수단이었던 당시는 말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발에 꼭 끼는 내가 필요했다. 내가 여자들만의 전유물이 된 건 채 100년이 되지 않는다.

풍문 둘

루이 13세가 프랑스를 지배하던 1600년대 초반. 아라베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 중 최고로 아름답다고 평가받는 베르사이유 궁전이 세워진다. 그토록 미려한 건물에 불결한(?) 화장실을 넣는 게 싫었던 왕비 때문에 연회를 즐기던 귀족들은 부득불 궁전 정원에 실례를 해야 했다. 백작과 남작, 공작부인과 후작부인이 오물을 밟고 다닐 수는 없는 일. 그들은 자신들이 실례한 오물을 밟지 않을 요량으로 나를 즐겨 신었다.


그렇다. 나는 하이힐이다. 위의 이야기들은 나의 기원과 탄생에 관해 떠도는 갖가지 설(說)들 중 두 개를 요약한 것이다. 보름 전 공장을 나와 쇼윈도에 전시된 나는 오늘에야 최소한 1년은 나와 고락을 함께 할 주인을 찾았다.

올 봄 대학을 졸업하고 한참을 직장을 구하지 못해 애태우던 스물네살 B. 그녀가 드디어 내일 사회로 첫발을 내딛는다. 첫 출근, 설레는 그날을 위해 B는 사파이어블루빛 투피스에 어울리는 나를 구입해 책상 위에 올려놓은 채 방금 잠이 들었다.

맞은편 거울에 붙어있는 '나, 이젠 소녀가 아니다'라는 문구가 그녀의 비장한 각오를 짐작케 한다. 그렇다. 이제 B는 용돈받아 편하게 학교 다니는 소녀가 아니라, 동정과 용서없는 비정한 정글인 사회로 뛰어든 투사가 된 것이다.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지만, 발가락을 구부러지게 하거나 발톱을 변형시키기도 하는 위험성을 동시에 지닌 나. B는 자신이 헤쳐나가야 할 사회 역시 희망만큼의 절망이 잠복하고 있다는 엄혹한 사실을 차츰 깨달아 갈 것이다.

텔레비전과 형광등이 모두 꺼져 캄캄하고 적요한 밤. 긴장 탓에 선잠을 자고 있을 주인의 화장기 없는 뽀얀 얼굴을 내려다보며 내가 태어나던 그날을 떠올려본다.

구두제작의 기본이 되는 라스트의 치수를 분석하고 있다.
구두제작의 기본이 되는 라스트의 치수를 분석하고 있다. ⓒ 금강제화 제공
토라스팅 공정.
토라스팅 공정. ⓒ 금강제화 제공
나 이전에 '그들의 가죽'이 있었다

먼저 떠오르는 건 나의 모습을 그려내던 디자이너들의 바쁜 손놀림이다. 그들에 의해 그림이 된 나를 패턴으로 만들어, 재단사들이 재단을 마치면 기계가 그 재단에 따라 대량의 피스(조각)를 만든다. 나는 보통 10~15개의 피스가 조립돼 만들어진다.

피스의 숫자가 많을수록 내 디자인이 복잡한 것이라 보면 된다. 단순한 여성화의 경우엔 2~3개의 피스로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내 경우는 보통 10개 이상의 피스가 필요하다. 나는 어떤 친구들보다 복잡한 미적구조를 가진 것이다. 이 첫 단계를 '재단공정'이라 칭한다.

나의 원재료가 되는 가죽 이야기를 좀 하자. '카프 스킨'이라 불리는 생후 6개월 미만의 송아지 가죽은 고급스런 나를 만들 때 주로 사용된다. 이보다 하품인 '카우 스킨(생후 2년 이상의 소가죽)'은 중저가의 나를 만드는 재료다.

생후 1년 미만의 염소가죽인 '키드 스킨'과 물소가죽 역시 고급원료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최고의 고급원료로 치는 건 파충류의 가죽이다. 악어와 도마뱀, 뱀가죽은 요철과 비늘이 빚어내는 섬세하고 아름다운 무늬가 있어 최고급품의 나를 만드는데 이용된다.

나만 이야기하려니 당신들은 심심하고 난 입이 아프다. 나와 관련된 재밌는 문제 세 가지를 내볼테니 한번 맞춰보는 건 어떨까?

첫 번째 문제: 굽의 높이가 몇Cm가 넘어야 나로서의 자격요건을 갖추는 것일까?(힌트, 제목을 보라)
두 번째 문제: 가장 굽이 높은 나를 생산하는 나라와 그 높이는?
세 번째 문제: 나를 가장 많이 가졌다고 이야기되는 사람과 그 숫자는 어느 정도일까?


정답은 기사 가장 아래 있다. 특히 마지막 문제의 답은 대충 알던 사람들이 많겠지만, 다시 들어도 놀라울 정도다.

라스트에 제갑을 붙이고 있다.
라스트에 제갑을 붙이고 있다. ⓒ 금강제화 제공
최고의 미싱기술은 최고의 나를 만드는 중요한 요건의 하나

피스로 만들어진 나는 이른바 '제갑공정'을 거친다. 제갑이란 재단된 피스를 미싱으로 박는 과정. 겉감과 안감을 박음질해 신발의 발형인 '라스트'에 씌우기까지의 모든 과정이 제갑이다.

제갑의 외형미와 견고성을 높이기 위한 '접음질 작업', 분리된 제갑물을 연결하여 완전한 형태의 제갑을 만드는 '덧붙임 작업', 지활재와 날개 앞안감 부위를 덧붙임하는 '갑피 안감 재봉작업' 등이 모두 제갑공정에 포함된다. 이 공정을 마친 나는 완성 바로 전 단계에 접어든다.

나를 즐겨 신는 여성들은 "여체가 가진 아름다운 선을 잘 드러내주고, 키를 커 보이게 해 자신감을 심어준다"는 예찬론을 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여성들은 "편안해야 할 신체의 일 부분을 억압하는 애물단지"로 취급하기도 한다.

ⓒ 금강제화 제공
한국에서 나를 본격적으로 신기 시작한 때는 가수 윤복희가 미니스커트를 입고 비행기 트랩을 내려서 그때까지도 여전히 건재하던 조선의 유림(儒林)을 경악케 한 1967년과 대략 일치한다. 당시 나를 판매하기 위한 지면광고를 한번 보라. 촌스럽지만 정겹지 않은가?

한국의 여성화 시장규모는 대략 8천억원. 업계 수위는 1954년 설립돼 오늘에 이른 금강제화가 지키고 있고, 에스콰이어와 소다 등의 회사가 그 뒤를 잇고 있다.

최근 만들어진 내 친구들 중 가장 비싼 몸값을 자랑했던 녀석은 200만 달러(한화 약 21억원)로 그 귀하다는 다이아몬드를 구슬처럼 주렁주렁 매달았었다. 반면 서민들의 재래시장에선 만원짜리 한 장으로 구입이 가능한 친구들도 흔하다.

지금은 각선미가 뛰어난 외국 모델들이 주로 나를 광고하지만,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는 옥소리, 심혜진, 신은경, 오미란, 채시라 등의 탤런트와 모델이 나를 팔기 위한 전선에 적극 나섰다. 이중 오미란은 포즈가 뛰어나고 다리선이 예뻐 업계에서 '최고의 여성화 모델'로 자주 지목됐었다.

'못 박힘의 고통'을 감내하며 마침내 제 모습을 찾다

자, 이제 내가 태어나던 마지막 순간을 설명할 시간이다. 제화공들은 접착제를 사용해 제갑을 마친 나의 몸에 솔과 힐을 고정시켰다. 다음 단계는 못을 박는 공정이다.

'스크류'와 '보조네일(nail)'로 이름 붙인 작은 못들이 몸 곳곳에 박히는 고통을 감내해야만 비로소 나는 하나의 제품으로 완벽한 생명을 얻는다. 아래는 그런 과정을 모두 마친 내 친구의 모습이다. 어떤가. 이 정도 아름다움이라면 못 박히는 고통을 참을만하지 않은가?

ⓒ 금강제화 제공
나를 신는 발을 '제2의 심장'이라고도 한다. 이는 발이 인체에서 그만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반증일 터. 그렇기에 발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물론 편안하게 보호하는 것 역시 나의 책임이다.

그런 까닭에 21세기 나의 화두는 '아름다움과 편안함의 행복한 결합'이다. 나를 만드는 회사들 역시 이 당연명제를 머리와 가슴에 새기고 있다. 그러니, 나를 '여성의 발건강을 위협하는 주범'으로 폄훼만 하지 말아주길.

체 게바라, 안토니오 히메네스와 함께 혁명 쿠바의 '매혹적인 3두 체제'를 이끌었던 피델 카스트로. 그는 대학 재학 시절 바티스타 독재가 조종하던 법정에서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하리라"는 근사한 최후진술을 남겼다. 아래 시인 이성복을 인용한 내 나름의 최후진술을 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맺을까 한다.

"짧은 시간 세상에 머물면서 아름다움을 좇는 사람이란 언제나 고통과 친구가 될 수밖에 없다."

내게 꼭 맞는 하이힐을 고르려면...
생리 일주일 전 오후가 구입의 적기

▲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하이힐의 진화.
ⓒ금강제화 제공

요사이 생산되는 하이힐의 대부분은 발이 가진 특성을 과학적으로 분석해 제조된다. 하지만, 보통의 소비자가 겉모양으로 좋은 신발과 나쁜 신발을 구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전문가들은 하이힐을 포함한 모든 신발을 오후에 구입하길 권한다.

발은 생체리듬에 따라 팽창과 수축을 거듭하기 때문인데 보통 오후에 팽창한 상태가 된다. 자칫 오전에 구입했다간 작아서 못 신게 될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또, 생리 때 생기는 발의 부종을 고려한다면 생리 일주일 전에 하이힐을 구입하는 것이 조임을 사전에 방지할 수 있다.

보통 엄지발가락에서 1Cm 여유가 있는 것을 사는 것이 좋고, 구입을 최종결정하기 전에 매장을 10~20보 걸어본 후 착용감을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

하이힐의 구입하는 여성의 경우 자신의 발 모양보다는 구두의 모양을 우선적으로 보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신발의 수명을 짧게 하는 것은 물론, 건강에도 나쁜 영향을 미치므로 자신의 발 모양을 고려한 선택이 최우선이다.

덧붙이는 글 | 정답:

1. 6Cm
2. 이탈리아, 15Cm
3. 필리핀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부인인 이멜다. 남편이 권좌에서 물러났을 당시 망명지인 하와이로 가져갔던 신발이 9천 켤레. 그러고도, 그녀가 머물던 대통령궁엔 채 못 챙겨간 3천 켤레의 구두가 더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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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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