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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돌산항의 거북선
여수 돌산항의 거북선 ⓒ 이상율
<난중일기>에 보면 임진년 2월 8일 "이날 거북선에 쓸 돛베 29필을 받았다", 3월 27일 "일찍 조반을 먹고 배를 타고 소포로 나가 쇠사슬 건너 매는 것을 감독하며 종일 기둥나무 세우는 것을 보고 겸하여 거북선에서 대포 쏘는 것도 시험하였다", 4월 12일 "식후에 배를 타고 거북선의 지현자포를 쏘아보았다"라는 거북선 창제의 기록이 남아있다.

국사학자 이선근은 <대한국사> 5권에서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그 무렵 여수에 본영을 두고 그의 속진을 정비 강화하는 한편 유명한 거북선을 건조하여 1592년 음력 3월27일(양 5월 8일)에 진수시키고 그 배에 장치한 지자포, 현자포의 시사를 음력 4월 12일에 마친 것 밖에는 달리 이렇다 할 방비가 없었다"고 기술함으로써 여수가 최초의 거북선을 만든 고장이라는 것을 재확인하고 있다.

그럼에도 KBS의 <불멸의 이순신>의 촬영장이 전북 부안이었던 것에 이어 한강의 거북선이 통영으로 감으로써 거북선 최초의 창제지(創製地)임을 자부심으로 삼아온 이 지역주민들에게는 적잖은 상처를 준 것이다.

특히 시당국이 도시 이미지를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거북선으로 상징화하여 '여수'하면 '거북선', '거북선'하면 '여수'라는 연상이 가능하도록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가운데 이 같은 일이 발생함으로써 거북선 명칭의 기득권을 확보하기가 어려워진 실정이다. 이 고장의 역사적 사실을 남의 잔치에만 내어 줄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캐고 가꾸어 향토의 자랑으로 부각시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의 심볼이나 마크, 향토물산의 상표 등에도 거북선 명칭 사용을 촉진하고 우선 거북선 상징화에 가장 확산성이 높은 여수 거북선 축제에도 거북선과 관련있는 프로그램 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해야 한다. 2003년 우여곡절 끝에 진남제를 '여수 거북선 축제'로 그 명칭을 변경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사)진남제보존회는 아직까지도 '여수 거북선 축제'라는 명칭 앞에 진남제를 삽입하는 등 변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어 이에 대한 명확한 조치가 필요하다.

이 충무공의 구국정신과 거북선 창제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하여 매년 개최되는 진남제는 과거만을 답습함으로써 사회적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여 전국 최우수축제에서 지역축제로 전락하고 말았다. 시민의 세금으로 치러지는 축제이므로 보존회와 축제위원회는 각계각층의 시민들이 모두 참여할 수 있도록 문호를 개방해야 한다.

보존회가 변화에 적응하지 않고 기득권만을 고집하는 경우 세계적인 축제를 위해 관ㆍ민 합동기구를 설치하거나 아니면 독립된 거북선 축제위원회를 따로 조직하여 추진하는 것도 검토해야 한다.

축제의 세계화를 위해 부실조직의 개편 없이는 예산지원을 하지 않겠다고 하여 정상화한 남원 춘향제, 전국의 유명인사를 망라한 축제위원회를 구성하여 20억원의 기금을 확보하기 위해 나선 통영의 한산대첩제를 타산 지적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새여수신문에도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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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닥다리 기자임. 80년 해직후 이곳 저곳을 옮겨 다니면서 밥벌이 하는 평범한 사람. 쓸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것에 대하여 뛸뜻이 기뻐하는 그런 사람. 하지만 항상 새로워질려고 노력하는 편임. 21세기는 세대를 초월하여야 생존할 수 있다고 생각 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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