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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산바다 쭈꾸미 통신> 겉표지
ⓒ 2005 소나무
이 책을 읽는 내내 푸짐하고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의 바다에 빠졌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상상할 수 없는, 똥구멍이 찢어지도록 가난했던 '그때 그 시절' 이야기들을 한 점의 미화 없이 솔직하게 이야기 하는 저자의 입심에 반해버렸다고 할까.

지은이 박형진은 58년 개띠로, 전북 부안 모항이라는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농군 시인이다. 공식 학력은 중학교 중퇴지만 구구절절한 글 솜씨며, '농사꾼은 농촌에 있어야 한다'는 신념을 몸으로 실천하는 '된' 사람이다.

얼마 전 국회를 통과한 쌀 협상 비준으로 수입쌀이 우리 밥상에 오를 날도 머지않아 보인다. 언젠가부터 일부 상류층에서는 우리나라 쌀보다 미국 캘리포니아산 쌀이나 일본산 아키바레 쌀을 선호한다는 소문마저 돌았던 터라 더욱 심란해진다.

이 책의 큰 목차를 둘러보면 '고구마 두둑 쩍쩍 금이 가던 가을', '가마솥 콩 물 줄줄이 흘러 넘치던 겨울', '쑥개떡 향 아른아른 한 봄', '너벅너벅한 상추쌈 볼때기 터지는 여름' 등 음식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많다. 그중에서도 유독 고구마에 얽힌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양식이 귀해서 보리에 고구마로 끼니로 때우던 그 시절, 새색시가 선을 보러 와서 그 집 고구마 저장 가마를 보고는 '원 없이 고구마가 먹고 싶어서' 시집을 왔다고 했을 정도로 빈한했던 시절이었다. 너나 할 것 없이 어려웠던 시절이지만, 별식을 하면 이웃과 나눠 먹는 푸근한 인심만큼은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온 식구들이 모두 농사일이며 집안일을 하는 덕인지 이 책의 곳곳에는 두부 만들고, 메주 쑤고, 김장하는 큰 것부터 자잘한 반찬들 예를 들면 밥하면서 쪄서 만드는 음식들(호박나물, 가지나물, 무 젖(양념게장) 찌기, 된장 찌기)에 박속 무침, 쭈꾸미 회무침 만드는 법을 구수하게 들려준다. 어렸을 적 어머니가 해주신 음식들을 떠올리며 '나도 한 번 이대로 만들어 볼까' 하는 마음이 동할 정도이다.

지은이 박형진이 태어나고 자라 지금도 살고 있는 시골마을 모항리의 곳곳을 더듬으며 현재와 과거를 넘나드는 진솔한 이야기들을 읽으며 '똥만 싸면 그것인 세상'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책 이야기하다 말고 갑자기 "웬 똥이냐" 하고 의아할 것이기에 간단히 책 속의 한 에피소드를 추려본다.

'…들에 곡식이 영글고 추분이 지나 밤이 길어지면 동네 청년들의 본격적인 서리가 시작된다. 오십여 호 되는 동네에서 열일고여덟 살 때부터 군대 가기 전까지의 또래들이 모인 처녀총각들의 클럽이 몇 개 있었는데, 밭에서 나는 것은 곡식과 양념 채소를 빼고는 다 훔쳐다 먹었다. 초여름의 감자에서부터 여름의 수박, 참외, 밭 구석에 심는 단수수, 가을의 고구마, 강냉이, 단감, 정 없으면 반찬 하려고 심어 놓은 가지, 오이에 겨울이면 주로 닭과 제사 지내려고 해다 놓은 떡, 동지 때 쑤어놓은 죽도 동이째 들어다 먹고 집 뒤꼍 김치 항아리 속에 든 동치미까지 퍼다 먹었다.’

가히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이다.

'…첫 닭울음에 새벽 똥을 싸는 버릇이 있는 '김대장님'이라는 별명을 가진 분이 있었다. 닭 중에 청 좋은 새벽 울음으로 김대장님의 벗을 하던 닭이 있었는데 어느 날 하필이면 이 닭을 도둑을 맞은 것이다. 그날 따라 개도 짖지 않고 초저녁에 눈이 오다 그쳐서 닭장 앞에 도둑놈들의 발자국이 어지러웠다. 똥을 싸고 일어나면 울던 닭이 울지 않으니 자연히 닭장 앞의 발자국과 닭장 속의 횃대를 들여다 보게 되었다.

평소 말을 빨리하는 버릇이 있는 데다 더듬기까지 하는 김대장님은 그때부터 동네 술집의 독한 술에 취해서는 꼭두새벽 동네방네 돌아다니며 손짓 발짓으로 "아… 아 똥만 싸면… 똥만 싸면… 그 그그그것인디… 그것인디… 발자국이 바바바발자국이 여그 있고… 또또또 여그 있고…"라고 수도 없이 말 아닌 말을 반복하셨던 것이었다.

김대장님 딸과 함께 놀며 닭 잡아다 먹은 팔촌 형님이 김대장님의 그 넋두리 흉내를 하도 잘 내어 그해 겨우내내 웃고 놀았다. 그래서 지금도 동네 사람들은 앞뒤가 맞아떨어지지 않는 일이 생기면 '똥만 싸면 그것이어야 하는디'를 들먹이는 것이다.'


박형진은 이 에피소드 말미에 따끔한 소회를 덧붙인다.

"소리개가 병아리를 채 가면서도 업고 간다고 하니까 시끄러운 요즈음 세상을 보면서 똥만 싸면 그것처럼 좀 명확하게 예측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 제  목 : 변산바다 쭈꾸미 통신
지은이 : 박형진
출판사 : 소나무


변산바다 쭈꾸미 통신 - 꼴까닥 침 넘어가는 고향이야기

박형진 지음, 소나무(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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