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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9월 16일 부터 19일까지 4일동안 나는 강화도 부터 강릉까지 조국의 허리를 뛰고 또 뛰었다.
ⓒ 박복진
이 조국의 산하를 동서로 가르는 한반도 횡단 길을 내 두 발로 뛰어 본다니... 무박 4일 동안 내 온 육신의 혼과 령으로 핥으며 보듬고 안고 더듬으며 뛰어 본다니... 조국의 산하야, 기다려라! 내 자라 오늘이 올 줄 어떻게 알았더란 말이냐?

서해에서 동해까지 동서 칠백 칠십 리, 강화도 창우리 선착장 출발지에서 건네받은 배번에 선명하게 인쇄된 '한반도 횡단 308km, 무박 64시간'의 글씨가 들떴던 내 가슴에 만량 같은 무게로 다가온다. 옷핀의 끝을 펴서 내 가슴에 다는 배번의 네 귀퉁이는 아무리해도 바르지가 않았다. 그러나 상관이 없었다. 정말 바라건대 조국은 날 이대로 그냥 안아 줄 것이다.

밤의 땅거미가 내려앉기 시작하고 주변이 어둑어둑해지며 186명 도전자들의 머리 위에 울트라의 불이 밝혀지자 출발 신호가 울렸다. 그리고 나는 출발했다. 무박 4일, 64시간의 내 조국 산하의 허리를 보듬고 핥는 대장정이 시작된 것이다. 마라톤을 하며 어렴풋이 품었던 내 조국 산하 횡단 마라톤의 꿈. 오늘이 바로 그 날이다.

강화읍을 지나며 한 무리의 울트라 동료들이 식사를 위해 대로변 뒷골목으로 들어간다. 그렇다. 이제는 초장이다. 배를 채워야 첫 밤을 밤새 달리고 내일 아침에는 하남시의 100km 지점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냥 지나쳤다. 어쩐지 배고픔은 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배고픔보다도 매 50km 지점에서의 제한 시간이 나에게는 더 무서웠다. 나는 길을 서둘렀다.

배낭 속의 한 줄 김밥을 우직우직 입 속에 밀어 넣으며 뜀질을 계속했다. 그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얼마 안 있어 이 비는 양동이 물로 바꿨다. 기분이 좋았다. 이 비는 내 몸 속에 감춰진 야성을 자극해줬기 때문이다. 그래, 이제 시작이다. 나는 느긋했다. 씹는 김밥이 목구멍에서 미처 다 씹히지 않아 걸그적거리자 나는 주저 없이 남은 밥 알갱이를 길바닥에 뱉어 버렸다. 지금부터 내 앞길을 막는 그 무엇도 나를 막을 수 없다. 앞으로 전진만 할 것이다. 너덜너덜 실밥이 다 헤진 모자 차양에서 빗물이 쏟아진다. 동대문에서 사서 그 모자 위에 단 우표 딱지만한 태극기는 비에 젖어 청적 색깔이 점점 선명해져간다. 그리고 완주를 위한 내 전의도 더불어 타들어간다.

마라톤 거리 정도 가니 어둠 속에 외국인 한 분이 허리를 부여잡고 고통스러워하며 달리고 있다. 뉴질랜드에서 온 크파 호키앙아이었다. 그는 복통을 호소하고 있었지만 나는 분명히 읽을 수 있었다. 그는 그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그를 안심시키며 달랬다. 뒤처지는 그를 위해 몇 번의 뒷걸음질 후 나는 그를 50km 지점 주자 확인점 위에 눕힐 수 있었다. 미안했지만 뒤에는 이제 많은 주자들이 있으니 길 잃을 염려는 없다고 달래며 나는 치고 나갔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는 150km 지점에서 뜻을 접었다. 자기 생애 최초의 경기 포기라고 하며 쓴 웃음을 지어 보였다.

비는 양동이 수준을 넘어 이제 아나콘다 몸통 굵기의 호스로 퍼붓는 펌프 물 수준이었다. 아스팔트 가장자리 배수구를 향해 쏟아져 흘러내리는 빗물 줄기를 거스르며 철벅, 철부덕! 나는 영락없는 북괴의 124군 훈련요원이었다. 그래서 그랬는지 그런 나의 얼굴에 지나가는 버스가 튀기는 흙탕 빗물이 내 왼쪽 얼굴 위에 사정없이 휘갈겨졌다. 상관없었다. 하얀 면장갑 낀 손바닥으로 쓰윽 한 번 문지르고 그냥 웃었다. 입속에 잔 모래 자갈이 씹혔다.

이번 한반도 횡단 긴 여정 중 두 번의 옷과 신발을 교체할 수 있는 지점 중 그 첫 번째 100km 도움막에 다다랐다. 그러나 따뜻한 옷을 갈아입고 젖은 신발을 갈아 신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날아가 버렸다. 맡겼던 가방을 건네받으니 가방 속에 빗물이 가득, 쓴 웃음이 나왔다. 상관없었다. 어차피 몸은 젖고 또 앞으로도 더 젖을 것이다. 그것보다도 밤새 맞고 온 비로 쏠린 사타구니가 몹시 쓰라려 바세린을 한 움큼 건네받아 바지를 열고 사타구니에 도배를 했다. 이런 날씨에 이렇듯 밤을 새우며 주자들의 건강을 챙겨 주는 달리는 의사들의 손길이 더 없이 고귀해 보인다. 그저 고맙고 또 고맙지만 나는 또 내치고 나아가기 시작했다. 제한 시간 외 탈락. 나의 적은 이것이었다. 나의 뇌 속에는 이것 말고는 아무 것도 들어 있질 않았다.

팔당에서 양평 읍내 입구까지의 직선거리는 혹독한 시련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포기자 110명 중 이 구간에서 거의 절반이 뜻을 접었다 했다. 그 다음 양평에서 150km 주자확인 지점까지는 정말로 피를 말리는 끈기의 시험무대이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길, 이미 사타구니의 쓸림은 극에 달해 한 걸음 한 걸음은 내딛을 때마다 비명이 새어나왔다. 이번 횡단길에서 맨 처음 눈물이 쏟아졌다.

그러나 이건 사타구니 쓸림의 고통 때문이 아니었다. 이미 부풀어 오른 발뒤꿈치, 앞 발가락의 물집 풍선 때문이 아니었다. 내가 탈락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래, 가자! 어서 가자! 비는 그 기세를 늦추지 않고 계속 부어댔고 사타구니 쓰라림 때문에 나는 한동안 갈지자를 그리며 요상한 자세로 달리기를 계속했다.

주자들이 거의 멈춰 식사를 하고 가는 기분 좋은 휴게소라는 이름 좋은 휴게소. 나는 그냥 통과했다. 배고픔은 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문제는 제한시간 외 탈락이었다. 나는 무슨 수를 쓰든지 탈락의 쓴잔은 마셔서는 안 되었다. 누구 목을 따는 한이 있더라도 탈락은 있을 수 없었다. 탈락, 탈락, 나는 이 단어를 뇌일 때마다 반사적으로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최면을 걸었다.

최면으로는 부족했다. 150km 지점의 제3 주자 확인지점은 정말 멀고도 멀었다. 머얼리 어쩌면 내 가족 이상으로 내 선전을 기원하고 있던 나의 울트라 동료들의 모습이 히끄무리하게 보이자 나는 나도 모르게 뛰던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서서 눈물을 훔쳤다. 왜 이 구간에서 그토록 많은 주자들이 포기를 결정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두 번째 밤이 시작되었다. 앞선 주자의 깜박이가 멀어져간다. 극심한 허기가 몰려온다. 이 밤의 공포를 이기기 위해 나는 동료와 짝을 맞추어 뛰어야 할 것 같아 갓길의 배수구 턱에 걸터앉아 후미 주자를 기다리며 또 다시 깁밥 한 줄을 꺼내 씹기 시작했다. 이건 음식이 아니라 내 뜀질을 위해 태울 불쏘시개라는 생각으로 아무런 감정없이 아구리에 쳐 넣었다.

비는 또 다시 억수같이 쏟아졌다. 야성을 살려준다는 어줍잖은 사치스런 생각은 이제 더 이상 들지 않았다. 아, 제발 좀 그쳐 주었으면. 조금이라도, 몸의 어느 한 구석만이라도 보송보송한 곳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했다. 가면서 보니 군데군데 버스 정류장이라고 해 비를 피할 수만 있는 곳이면 어김없이 주자들이 앉은 자세로 졸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처연했다. 히말라야 죽음의 고지 위에 널부러진 눈구덩이 속 시신을 바라보며 전진하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의 내 머리에는 더 이상 그날 밤의 기억이 없다. 그저 뛰고 또 뛰었다는 기억뿐. 거리를 좁혀간다는 사념도 없었다. 그저 이 밤 내내 뛰다보면 날이 샐 것이고 날이 새었으면 거리는 좁혀졌을 것이고 이런 단순한 생각으로 나는 밤을 허우적거리며 오로지 앞으로, 앞으로만 되뇌였다.

그러자 황재인지 횡재인지를 넘어 200km 확인점이라는 둔내 휴게소 앞에 주자 유도등 같은 게 뒤집어 쓴 바람막이 비옷 후드 사이로 보였다. 아, 내가 다시 200km를 뛰었구나. 지난 3월 모래 강풍을 뚫고 제주도 일주를 했던 바로 그 거리 200km를 다시 뛰었구나. 눈물이 핑 돌았다. 나를 얼싸 안아주며 둔내 휴게소 안으로 안내해 주는 나의 울트라 동료의 어깨가 그렇게 클 수가 없었다.

두 번째 기사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2005년 9월16일 부터 19일까지 열렸던 강화도에서 강릉까지 308km 울트라 마라톤에 참여했던 종주기입니다.

젊은이여, 조국이 싫거든 조국의 허리를 두 발로 뛰어 보시오.
서해에서 동해까지 더도말고 덜도 말고 무박 64 시간만 뛰어보시오.
이 글은 마라톤 동호인 사이트에 게재되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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