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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마이뉴스 '평양-남포 통일 마라톤대회' 결승점으로 들어오는 필자(맨 오른쪽). 미리 준비한 수건을 펼쳤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아들아!

둘째날, 평양의 새벽이 밝았다. 아! 오늘은 뛰기 좋은 날이다. 나 같은 뜀꾼에게 어느 날 이고 간에 뛰기 안 좋은 날이 있을까 마는 오늘은 정말 뛰기 좋은 날이다. 분단 반세기, 어제 오후 내 조국의 위쪽 반 이곳에 도착해서 보냈던 첫 밤의 흥분은 이제 많이 가라앉았다.

칠흑의 밤을 보내고 새벽이 열리자 바깥세상이 궁금해서 창밖을 보니 출근하는 평양 시민들의 느린 모습이 보인다. 아마도 20층 호텔에서 내려다보니 더 느리게 보였을 것이다. 원래 우리 민족이 느린 민족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검정색 옷 일색인 시민들의 출근 발걸음은 매우 느리게 보여 잔뜩 흐린 바깥 날씨만큼이나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평양시민에게 전하고 싶은 얘기

▲ "영희야 종화야 아빠는 지금 평양을 달린다." 배 번호에 쓴 메시지.
ⓒ 박복진
가져온 옷가지를 침대 위에 펼치고 배 번호를 윗도리 앞가슴에 핀으로 꽂다말고 나는 아래 층 대회본부에 내려가 매직잉크 한 자루를 빌려왔다. 나는 배 번호에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쓰고서 평양거리를 달리고 싶었다.

주최 측이 나눠준 배 번호 '416'이라는 숫자만 달랑 적혀 있는 배 번호는 아무래도 이상하고 허전했다. 내가 남한의 현란한 광고에 너무나도 많이 익숙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 거대한 폐쇄 공간에 대한 나의 심장 떨리는 절규욕구 때문일까?

무엇을 쓸까? 나는 주저하지 않았다. 아니, 주저 할 필요가 없었다. 내 사랑하는 가족의 이름과 그리고 내가 지금 하려고 하는 것을 적으면 되었다. 아내의 이름과 이들 이름, 야릇한 흥분으로 손이 가늘게 떨린다. 하지 말라는 짓을 하고 있는 악동처럼 자꾸만 동작이 끊기었다. "영희야, 종화야. 아빠는 지금 평양을 달린다"라고 써서 가슴에 핀으로 꽂았다.

그래도 허전했다. 다음으로 나는 평양 시민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진심으로 하고 싶은 말이 더 있었다.

방의 욕실로 뛰어 들어가 대형 목욕 수건을 한 장 꺼내서 침대 위에 펼치고 그 위에 매직으로 글씨를 썼다. 나는 이걸 들고 뛸 것이다. 평양 시민 단 한 사람이라도 이 걸 봐 주길 바라며 마라톤 내내 이 걸 들고 뛸 것이다.

북녘의 동포에게 남한의 뜀꾼들이 갈구하고 있는, 꿈에서라도 이루어져야 할 소망을 알리고 싶었다. 수건을 펼쳤다. 그리고 수건의 겉 표면 잔 고리 때문에 쓰기가 쉽지 않은 면을 자꾸만 펼쳐가며 남한 뜀꾼들의 열망을 수놓았다.

"서울-평양 220km 울트라 마라톤"

이 수건을 반으로 길게 접어 글씨가 안 나오게 위장해서 땀을 닦는 용도라고 누구나가 알 수 있게 팔목에 칭칭 감았다. 그리고 나는 호텔 방 문을 나섰다. 평양의 거리에 섰다.

나는 이 수건을 감추었다가 완주선에서 활짝 펼 것이다.

아들아!

아빠가 지금 분단 역사상 처음인, 남한의 시민이 평양 시내 한 가운데를 팬티 한 장 달랑 걸치고 뛰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새겨 보거라. 내 나라 내 땅에서 그렇게 하는 게 하등 이상 할 게 없는 사실이 그동안 이상하게도 할 수 없었다는 이 기막힌 사실…. 지금 아빠의 이 한 뜀이 앞으로의 통일 역사에 어떤 순간으로 기록될지 아빠는 아직 알 수가 없다.

드디어 2005년 11월 24일 오전 10시 30분, 출발 총성이 울렸다. 내가 지금 평양에 와서 평양의 서산 축구장을 출발, 그 이름만으로도 가슴이 쿵쾅거리는 청춘거리, 광복거리, 청년영웅도로를 통과하는 통일 마라톤이 시작되었단 말이다.

▲ 24일 오전 10시 오마이뉴스 주최 '평양-남포 통일 마라톤대회' 남자부 참가자들이 평양 서산경기장을 출발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광복거리를 내달리며 괴성을 지르다

가슴이 벌렁거린다. 벅찬 감동에 자꾸만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차는커녕 건너가는 개미 한 마리 없이 툭 터진 왕복 12차선 광복거리를 내가 달린다. 나는 우선 냅다 괴성을 질렀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서는, 평생 막걸리 사발만을 들이켜서 목의 정맥이 튀어나온 사람보다도 더 힘줄이 튀어 나오도록 괴성을 질렀다.

언젠가 이산가족 상봉한 할머니가 반세기 만에 만난 북녘아들을 보고 불문곡직 달려들어 짐승처럼 물어뜯던 장면이 생각난다. 극도의 기쁨을 이렇게 표현했던 팔순 노파의 감정처럼 나는 나하고 싶은 모든 말을 하지 못하고 짐승같이 괴성을 질렀다. 평양의 제일 번화한 곳, 왕복 12차선 광복도로 중앙선을 달리며 뜻도 모를 괴성을 나는 거푸, 거푸 질러댔다. 우- 와이 야!!!

아들아! 저기 평양의 시민이 걸어간다. 저기 내 형제가 괘도버스를 기다리며 정류장에 서 있다. 저기 내 혈육이 빛바랜 검정 옷을 입고 손수레를 끌며 느리게 가고 있다. 저기에 내 동네 이웃이 나에게 미소를 보내며 무언가 나에게 말을 하고 있다. 너무 멀어 말은 들리지 않지만 나는 알고 있다. 동무, 힘 내라우! 힘 내라우, 힘! 그렇게 힘없어 어찌 마라톤 하갔어? 라고 말하며 손을 좌우로 흔들고 있다.

평양시민들 품으로 뛰어들다

평양 행 출발 하루 전, 아내는 저녁 밥상에서 나에게 신신 당부했다. 절대로 혼자 감정에 빠져 돌출 행동 하지 말라고… 정말로 걱정된다고… 나는 아내의 걱정을 진심으로 받아들였다. 내 정상적인 이성으로 생각해 보아도 그래서는 안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나는 이미 이성을 잃었다. 나의 뜨거운 동포애가 그렇게 만들었다. 나는 중앙선 주로를 이탈해서 길가의 보도로 달려갔다. 그리고 달리는 우리를 향해 두 손을 흔들어 주던 한 할아버지에게 다가가서는 내 하얀 면장갑 낀 손으로 그 분의 손을 덥석 잡고 눈을 맞추었다.

할아버지는 참으로 따스한 손을 가지고 계셨다. 그 짧은 순간이지만 할아버지는 나에게 진심 어린 반가움의 미소를 보내주고 있었다. "반갑습네다. 어서 뛰라우! 어서!"

그래서 나는 우리 민족이 처음 만나서 예의를 갖추기 위해 물어 보는 첫 질문을 드렸다. "할아버지 올 해 몇이나 되셨어요?" 그러자 그 할아버지는 내가 못 알아들을까봐 두 번을 반복해서 말해줬다. "쉰아홉, 쉰아홉" 내가 경칭을 쓴 쭈글쭈글 그 할아버지와 나와의 나이 차이는 불과 네 살이었다.

다시 중앙선 주로에 나와 뛰며 그 동안 나와 멀어진 일단의 후미 달림이들 속에 나를 묻었다.

그러나 12차선 중앙선 주로는 내가 애타게 그리던 평양 시민들의 체취를 느끼기에는 너무 멀었다. 나는 다시 주로를 이탈해서 길가 시민들에게 다가갔다. 울면서 다가갔다. 내 가슴과 머리는 이 기막힌 민족의 비극 때문에 통곡의 지령을 내리고 있었지만 내 울음은 내 목 바깥으로 나와서는 안 되었다. 죽을힘을 다해 삼켜보는 울음, 그렇지만 너무나도 끈적끈적해서 날아가는 점보 여객기라도 붙잡을 수 있는 울음을 참으려 애쓰며 나는 내 동포에게 다가갔다.

"반갑습니다, 반가워요… 정말로 반가워요…" 그리고 두 손으로 그 한 손을 잡자 동포는 자기의 나머지 손을 내밀어 나를 더욱 꼬옥 잡았다. 한 아줌마에게 다가가서는 그 아줌마 손을 잡고 고개의 반을 엄마 치마폭에 묻고 있는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으나 그 아이는 수줍음으로 엄마의 치마 폭 뒤쪽으로 숨어버렸다. 그러자 주위의 북한 동포들이 왁자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나는 평양 시내를 달렸다. 그렇게 나는 나의 꿈속을 달렸다. 그렇게 나는 조금 있으면 깨고 없어질 환시 속을 달렸다. 아쉬워서, 너무나도 아쉬워서 지나가는 거리, 좁혀지는 거리를 안타까워하며 달렸다. 이 밤이 지나면 새벽에 출항하는 외항선의 사나이 품에 안긴 정부의 애달픔을 안고 달렸다. 느리게, 느리게 달렸다.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느린 속도로 달렸다.

그렇게 뛰고 있는 나를 향해 남한의 한 취재기자가 질문을 던졌다. 어제 인터뷰 때 지금 심정이 어떠냐고 물으니, 아직 감정 정리가 안 되어 뭐라 할 말씀이 없다고 했는데 지금 이렇게 평양 시내를 뛰니 기분이 어떻습니까? 나는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아직도 나는 내 스스로의 감정 정리가 안 되어 있어 뭐라 말씀을 드릴 수가 없네요. 그러면 아까 긴 궤도 버스에 탔던 평양 시민을 향해 넓죽 절을 하셨는데 그건 무슨 뜻입니까? 나는 대답했다. 고마워서요.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 있어 줘서 고마워서요… 그리고 나는 북받쳐 올라오는 울음을 삼켰다.

그랬다. 정말 그랬다. 사상이나 이념을 떠나 질기고도 질긴 민초들의 목숨 그 자체는 언제나 나의 눈물샘을 건드린다. 반만년 역사 그 어느 시대에도 화려한 조명 한 번 받지 못했지만 결국 역사의 수레는 이들의 땀으로 일궈져 갔지 않은가? 남이나 북이나….

▲ 평양마라톤대화에 참가한 남북 선수들이 24일 오전 안개낀 평양 시내를 달리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새가 되어 분단의 벽을 훌쩍 넘었어요"

한참을 다시 뛰어 가니 남한의 남녘, 전남 곡성에서 온 한 예쁜 주부 한 분이 뛰어 가신다.

그 분의 등에는 "섬진강곡성마라톤대회"라고 쓰인 마라톤대회 홍보문구가 또 나의 가슴을 적신다. 남녘의 섬진강마라톤대회와 지금 평양의 시민과 아무런 연관이 없어 보이지만 언젠가는 북녘의 우리 동포들과 같이 뛰어 보고 싶어 등 뒤에 이 글을 달고 힘차게 뛰어가는 얼굴 곱고 마음씨 고운 이 분. 이 분은 학창 시절 광주의 아픔을 안고 책갈피에 최루탄 가스를 끼고 산 또 다른 우리네 자화상이다. 이 분은 인천공항에서 나에게 말씀하셨었다.

정말 믿어지지가 않아요. 내가 평양을 간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아요. 더구나 평양 시내를 내 두 발로 휘젓고 뛴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아요. 학교 때 선배한테서 임수경양 소식을 듣고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몰라요. 그런 그곳에 제가 간다니… 간다니….

북한 사람들에게 내 사는 고향 아름다운 섬진강 곡성 마라톤에 모두 모두 초대하고 싶어요. 내가 지금 신고 있는 이 신발의 상표가 무언지 아세요? 새처럼 자유롭게, 'Free As A Bird'라는 뜻의 'FAAB'예요. 제가 아마 새가 되었나 봐요. 그렇지 않고 이렇게 분단의 벽을 훌쩍 넘어 이곳에 올 수가 없잖아요. 내가 지금 새가 되었나 봐요…. 그러면서 등 뒤의 섬진강 마라톤 로고를 나에게 돌려 보여주곤 북녘의 시민들에게 다시 손을 흔들며 뛰어 나갔다.

반가워요… 반가워요… 이렇게 만나서 여러분 반가워요… 섬진강에 오세요….

정말 그럴 것이다. 초대해서 아름다운 섬진강을 보여주고 싶고, 대봉의 홍시감도 따서 냉장고에 얼렸다가 눈바람 싱싱 부는 한겨울에 꺼내어 얼음보숭이처럼 드시라고 하고도 싶었을 것이다.

아름다운 마음씨 남녘의 섬진강 곡성 동백 아가씨는 남한의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그 마음을 자기 등 뒤에 쓰고서 평양을 달린다. 우리 민족의 희망을 달고 달린다. 가지런한 치아까지 내려온 환한 눈가의 웃음을 평양의 청년영웅도로에 꽃비 내리며 달려 나간다. 우리의 동백 아가씨는 달린다.

이렇게 나를 울린 마라톤은 없었다

아들아 !

나는 지금까지 60여 회의 마라톤을 뛰었다. 마스터스의 꿈이라고 하는 미국 매사추세츠 보스턴 마라톤도 뛰었고, 인간의 한계인 마라톤을 넘어 100km 대회도 뛰었고, 한반도가 좁아 바다로 나가 아름다운 제주도를 한 바퀴 일주하는 200km도 뛰었고, 사랑하는 조국 대한민국 한반도 허리를 가로 지르는 무박 64시간 서해 강화도 선착장에서 동해의 강릉 경포대까지의 308km도 뛰었다. 그러나 평양을 달리는 지금 이 마라톤, 오마이뉴스 평양-남포 통일 마라톤대회 만큼 나를 감동시키는 대회는 없었다. 나를 울린 마라톤은 없었다.

아들아!

내가 그러지 않더냐? 이건 이제 시작일 뿐이라고. 아주 작은 시작일 뿐이라고…. 우리의 통일은 통일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좁은 한반도에서 웅지를 펼 수 없었던, 그래서 외세의 흉계를 알지 못했고 그래서 당할 수밖에 없었던 쓰라린 역사를 이제는 반복해서는 안 된다고….

우리는 대륙을 향해 나가야 한다. 만주도 우리 땅이고 더 드넓은 중앙아시아도 우리 땅이다. 우리의 선조가 통 크게 대륙을 호령하며 말을 몰고 내달았던 중원 시베리아도 물론 우리 마당이다. 내달리다 지치어 말에게 물을 먹인 바이칼호수도 우리 땅이다.

집 앞에 금을 그어 놓고 남의 주차를 봉쇄하는, 그 금 안에 남의 차 타이어가 10cm 침범 했다고 타이어에 구멍 내어 멱살 드잡이하는, 그게 우리의 진짜가 아니다. 우리는 대륙으로 나가야한다. 진짜 통 크게 놀아야한다.

보거라, 이 거리, 왕복 12차선 도로가 직선으로 10여 km가 뻗어 나가있는 이 거리의 장대함을 우리는 북에서 배워야 한다. 이 통 큼이 원래의 우리 민족 기상이거늘 어찌하여 우리는 이렇게 쪼그라들어 서로가 헐뜯고 할퀴는 데만 혈안이 되어 왔었는지 우리는 부끄러움을 알아야한다.

그러기 위해서 아빠는 그토록 몽매간에도 잊지 못하고 바라던 여기 이 곳 평양을 뛰고 있다. 이것은 과거의 불운을 딛고 저 먼 유라시아 대륙을 거쳐 유럽, 이탈리아 반도 끝까지 갈 수 있는 길의 첫 단추이기 때문이란다.

▲ 묘향산 향산호텔 안내원과 함께
ⓒ 박복진
기다리거라 아들아, 그 날은 반드시 온다. 서울, 평양 간 220km 울트라 마라톤의 그 날은 이제 금방 온다. 여기 이 평양 마라톤 소식을 듣고 만사 제치고 잰 걸음에 달려온 것처럼 나는 그 뜀에서도 맨 앞장에 서서 달릴 것이다. 유라시아 저 드넓은 대륙을 달리는 우리 민족의 씩씩한 기상으로 맨 먼저 앞장 서 달릴 것이다.

아들아, 서울-평양간 220km 울트라 마라톤을 단숨에 뛰어 내달릴 그 날의 연습으로 아빠는 지금 여기 평양을 달린다.

아들아! 내 사랑하는 아들 종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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