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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한시간 64시간에서 나는 60시간 44 분으로, 총 도전자 186명 중 기권, 탈락 110명을 제한 76명 완주자 중 35위로 들어왔다.
ⓒ 김현우
밤으로 치면 두 번째 밤, 날 수로 치면 셋째 날, 내 몸은 이미 한계를 넘은 듯했다. 양말을 벗어 발바닥, 발가락에 응급 처치를 하는 내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러나 침착, 침착, 나는 이성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고 정신을 차리려 가끔씩 오늘이 며칠인지 무슨 요일인지 기억을 되살렸다. 준비해온 알콜 솜에 바늘을 찔러 소독 과정을 거치고, 그 바늘에 실을 꿰어 내 발가락 마디마디의 물집에 걸쳤다. 발바닥은 참혹했다.

모내기를 위해 마당에 준비 해 놓은 못줄에서 본 나이롱 실 표식 같이 너덜너덜 검은 실이 발바닥 여기저기에 꽂혀 있었다. 휴게소 안은 이동야전 외과 병원 같았다. 지칠 대로 지친 주자들이 여기저기 토막잠이라도 자기 위해 널부러져 있었다. 한 시간만 자고 싶어 눈을 붙여 보았으나 잠이 올 리 없었다. 끈적끈적 젖을 대로 다 젖은 몸은 시간이 지나며 한기만 더해 줄 뿐 쌓인 피로를 덜어주지는 못했다. 눈을 붙이는 둥 마는 둥 그냥 일어났다. 그리고 주섬주섬 젖은 양말을 다시 끼고 머리 위의 램프 꼭다리를 왼쪽으로 돌려 불을 밝히고 다시 주로에 섰다.

잠깐의 휴식으로 약간은 꼬들꼬들해진 사타구니 부위 쏠림현상은 다시 뜀을 계속하자 상처에 소금을 뿌린 듯 화끈거려 뛰는 자세를 요리저리 취권과도 같이 변형해 보지만 안타까움만 더했다. 불과 2~3 km도 못가서 나는 멈추어 섰다. 그리고 반대편 주유소 화장실을 어그적 거리고 들어갔다. 영락없는 산부인과 현관 앞에서 양수 터진 임산부 발걸음이었다.

흙발자국 어지럽게 더럽혀진 시골 동네 주유소 화장실 안에서 나의 처연한 자가 쏠림치료가 시작되었다. 배낭에서 키네시오 테잎을 꺼내고 비상용 소형 칼을 꺼내 젖어서 늘어지는 테잎을 한쪽은 이빨로 물고 한 쪽은 손으로 잡고 잘라서 벌건 고추장 묻은 주걱 같은 상처투성이 허벅다리를 감쌌다.

그렇게 또 하루 밤을 나는 보내고 3일째 낮을 맞았다. 쏠림 현상은 이제 더 이상 날 괴롭히지 않았다. 아니 그런 정도의 고통은 이제 아무것도 아니었다. 250km를 넘으며 발생된 발목 부기가 내 몸의 그 어떤 다른 고통도 다 반죽시켜버렸기 때문이었다. 무서웠다. 한 뜀, 한 뜀마다 도끼로 발등을 찍어대는 고통은 정말이지 환장할 노릇이었다. 더 이상 뛸 수가 없었다. 아니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었다.

중앙선의 하얀 가드 레일에 두 다리를 올리고 아스팔트에 드러누웠다. 지나가는 차량에 내 머리통이 박살나는 장면이 끊임없이 나를 일으켜 세우려 하지만 나는 일어설 수가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뿔 책받침을 반 접어 양손으로 수 없이 꺽으면 나중에는 그 자리가 허옇게 변하고 다음 단계에서는 뚝! 하고 부러진다. 내 다리는 이미 한계상황을 넘어 너무 많이 뛰었기 때문이다. 영원히 불구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시 일어섰다. 그리고 몇 걸음 걷다가 다시 뜀을 시작해 보지만 자세가 너무도 빈약했다.

제한시간 외 탈락, 검은 그림자가 날 다시 엄습했다. 다시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뛰기 시작했다. 뜀이 멈춰지면 어김없이 발목 부기는 날 잡아 먹을 듯 덤벼왔다. 이 고통을 그나마도 이기는 방법은 뛰는 것이다. 뛰어라, 육신아, 더 뛰어라 내 몸뚱아! 나는 절규했다.

이미 두 밤 세 날을 도로에서 보낸 나는 핏빛으로 충혈된 두 눈의 소유자가 되었다. 완주에의 집념 하나로 똘똘 뭉친 내 눈에는 보이는 게 없었다. 주로에서 만나는 주자마다 나는 같은 질문만 되풀이했다. 지금 이 속도로 뛰면 시간 내 완주는 가능합니까?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나와 같은 시간대 그곳을 통과했던 나의 울트라 동료는 나에게 상기해 주었다. 그 날 밤 박복진님은 시간 내 완주를 할 수 있겠느냐고 저한테 꼭 다섯 번을 물으셨어요. 기억나세요?

다시 세 번 째 밤은 찾아왔고 이 밤은 나의 남은 생애 전체를 통틀어 영원히 잊지 못할 밤, 고통이란 바로 이런 것이라는 것을 뼈 마디, 마디, 근육세포 줄기, 줄기, 신경세포 말단, 말단에 각인시켜 주었다. 자정 즈음 도착한 마지막 주자 확인 지점 280km 대관령 구 휴게소에서 경포대 완주선까지 불과 28km를 물경 8시간 58분간 나는 내 지나온 삶 그 어느 순간에도 경험하지 못하고 상상하지 못했던 극한상황을, 앞, 뒤 좌, 우 아무런 인간의 흔적이 없이 나 홀로 고통의 나락 끝에서 허우적거렸다.

캄캄한 도로, 길가 이정표를 읽으려고 지나가는 자동차 전조등을 기다리길 몇 번이나 했던고. 어쩌다 지나가는 택시에게 손을 들어 길 물으려 하지만 쌩- 하고 그냥 내 달리는 택시를 향해 얼마나 큰 소리로 육두문자를 날려 댔던고... 시간은 이미 걸어서 가도 완주시간 안에는 들어갈 수 있으리라는 계산이 되었지만 단 몇 백 미터를 더 가다가 영영 주저앉을 것만 같은 불안감에 그 얼마나 초조해 하며 나를 다그쳤던고... 가자! 어서 가자! 조금이라도 의식이 있을 때 한 발이라도 어서 가자. 그리하여 최후 몇 백 미터 앞에 내가 쓰러지면 내 몸뚱이를 굴려서라도 갈 시간을 벌어놓자. 가자, 아가야, 어서 가자 대한민국의 착한 아가야!

발목 부기가 너무 심해 지팡이를 찾았다. 길가 새로 심은 가로수를 지지해 주는 지지대를 뽑으려고 안간힘을 썼으나 그 지지대는 철사로 칭칭 감아 뺄 수가 없었다. 또 다시 다른 나무에 달라붙어 지지대를 빼려고 용을 쓰지만 허사이었다. 시간만 허비했다.

날이 뿌옇게 새고 내 정신은 내 육체를 앞질러 강릉 시내에 접어들었다. 울음이 나왔다. 아, 세 번째 밤도 나는 이렇게 보냈다. 길가의 수많은 나무 그림자들이 하나같이 사람 형상을 하고 혀를 날름거리며 내 앞에서 포기의 요기를 부렸지만 나는 굴하지 않았다. 쏟아지는 잠이 내 눈꺼풀을 강제 폐쇄할라치면 나는 소리를 질러댔다. 아무도 알 수 없는 뜻도 없는 비명을 질러댔다. 그리고 발걸음을 옮겼다. 뛴다고 했지만 이미 뛰는 자세는 나오지 않았다. 길게 울었다. 통곡했다. 조금 있으면 완주선에서 날 기다릴 아내와 아들을 보면 쏟아질 눈물을 나는 미리 쏟고 가야 했다. 나는 울어서는 안 된다.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나는 우아하게 완주선에 들어가야 한다.

길가 주유소 화장실에 들어가서 배낭을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비치해 놓은 싸구려 비누에 물을 묻혀 정성스럽게 머리를 감았다. 세수도 했다. 4일만의 세수였다. 눈썹 위에 한 방울 물방울을 검지 손가락으로 훔쳐 바닥에 떨구고 다시 배낭을 걸쳤다. 겨드랑이의 쏠림으로 벌겋게 변한 속살이 눈에 확 들어온다. 3일 밤 4일 낮 불에 달군 이글이글 용접봉 끝 같은 충혈된 두 눈이 태극기 자수 달린 모자의 차양 밑에서 거울 속의 나를 노려보고 있다.

이제 2km 남짓, 시간상으로 나는 3시간 여 여유를 부리고 완주선을 밟을 것이다. 지난 3일 밤 4일 내내 시간 외 탈락을 걱정하며 정식 식사 단 두 끼, 농가의 비닐하우스에서 새우잠 딱 50분, 그리고 둔내 휴게소에서 오한을 느끼며 토막 잠 30분. 그리고 대관령 오기 전 어느 버스 정류장 나무 의자에서 7~8분, 이렇게 짜게, 짜게 나를 휘몰아쳐 내친 대가는 정말 컸다.

그토록 걱정하고 또 걱정하며 나를 긴장시킨 제한시간에서 나는 3시간 여를 벌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나에게는 횡단 완주 그 자체보다 내 능력 그밖을 넘본 초인적 인내심 3시간이 더 소중해 보인다. 그리고 그걸 가능하게 해준 주로상의 내 울트라 동료들. 긴긴 밤 내 아내와 내 아들 이상으로 나의 무사 완주를 기원해 준 울트라 선배 고수 제현들, 자원봉사자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런 기회를 열어준 우리의 용감한 울트라 선구자들.

아, 저 멀리 경포 해수욕장의 해송이 보이기 시작한다. 내 사랑하는 아내가 날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대관령 고개 정상에서 강릉 시내의 불빛을 보며 아내에게 전화했었지. 전화 전에 눈물을 다 쏟고 바싹 마른 감정 없는 언어로 조용하게 말했었지. 몇 번의 연습으로 감정이 폭발하지 않도록 심호흡을 하며 말했었지.

"나야. 대관령 정상이야. 이제 완주 할 것 같아... 올 수 있으면 와봐... 응 응... 괜찮아..."

그 전화 받고 달려온 아내와 아들이 저곳에 있겠지. 그렇게도 출전을 말리려 한 아내가 저곳에 있겠지. 예민한 신경으로 지레 병치레를 했었던 아내가 저곳에 있겠지. 나는 이번의 완주 마지막 순간에도 역시 아내의 이름을 부르며 들어갈 것이다. 내 지금껏 마라톤 시작 7 년여, 단 한번도 완주선에서 아내 이름 부르기를 빼먹지 않은 그 기록을 또 이을 것이다.

경포 해수욕장 모래바탕 끝, 동해 바다가 넘실대는 저 곳에 완주를 알리는 플래카드의 글씨가 선명하니 보인다. 내 조국 대한민국이 가을날 아침 새벽 공기를 한 아름 내 콧궁기에 밀어 넣어주며 마지막 몇 걸음에 힘을 주시고 계시다. 아, 내 조국! 나는 내 조국을 온 몸으로 느꼈다. 결코 아무도 넘볼 수 없는 내 사랑 내 조국의 이 상쾌한 아침 공기. 이 햇살.

나는 내 사랑하는 나의 자랑스런 조국이 있어 좋다.
나의 사랑스런 동포, 형제, 자매가 있어 좋다.
내 육신의 재를 뿌릴 강산이 있어 좋다.

나는 해냈다는 성취감으로 충만된 내 야윈 얼굴에 미소를 가득 머금고 마지막 온 힘을 다해 아내의 이름을 부르며 2005년도 한반도 횡단 울트라 마라톤 308 km 완주 테이프를 가슴에 걸쳤다.

"영희야!"

자, 이제 다 왔다. 두 손을 들어 만세를 외치고 싶다. 그러나 마음뿐 내 두 손은 극심한 탈진으로 올라가지 않고 곁의 아내와 아들이 잡고 있어 그냥 거기 덜렁 달려 있는 것 같은 느낌뿐이었다. 나의 울트라 동료들의 진한 축하를 받으며 사진이 찍혀지고 꽃다발이 건네진다. 아, 제한시간 64시간에서 나는 60시간 44분으로, 총 도전자 186명 중 기권, 탈락 110명을 제한 76명 완주자 중 35위로 들어왔다.

거기서 그렇게 내 조국은 날 안아 주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2005년 9월16일 부터 19일까지 열렸던 강화도에서 강릉까지 308km 울트라 마라톤에 참여했던 종주기입니다.

젊은이여, 조국이 싫거든 조국의 허리를 두 발로 뛰어 보시오.
서해에서 동해까지 더도말고 덜도 말고 무박 64 시간만 뛰어보시오.
이 글은 마라톤 동호인 사이트에 게재되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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