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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들과 함께 한 홍콩에서 9박 10일. 더 이상 가슴에 묻어둘 수 없다. 눈물과 웃음이, 투쟁과 놀이가, 세계 민중들과 어깨 걸고 진행된 홍콩의 생생한 기록을 10회에 걸쳐 연재한다.

▲ 한국농민들이 숙소에서 자신들이 나오는 뉴스를 관심있게 바라본다.
ⓒ 오도엽
12월 16일 홍콩 TV와 신문은 한국 농민들의 삼보일배 행진을 크게 보도했다. 삼보일배를 "강력하고, 자기고통을 감수하며 어려움을 이겨낸 싸움이었다"는 호의적인 평가와 함께 "언제 한국에서 보여 준 격렬한 싸움을 벌일까"에 대한 기대를 보이고 있다.

거리 선전전에서 시민들의 뜨거운 호응과 촛불집회도 관심을 가지고 보도했다. 숙소에서 한국 농민들은 TV 앞에 모여 뉴스에 어떻게 보도됐는가에 촉각을 세웠다. 태퉁의 숙소 관리자는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한국 노래를 방송한다.

▲ 우카샤 캠프에 도착하자 홍콩 시민들이 환영의 인사를 한다
ⓒ 오도엽
WTO를 반대하기 위해 홍콩에 온 참가단은 집회와 거리행진만 한 것은 아니다. 집회장 주변에선 다양한 포럼과 토론회가 열려 각 나라의 경험을 교류하고 연대를 다지는 장이 되었다.

16일 우카샤에 있는 YMCA 캠프에서는 브라질 농민운동과 베네수엘라 혁명의 경험과 과제에 대한 강연과 토론이 열렸다.

브라질 '무토지 농민운동단체'에서 온 강연자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식민지지배를 받았던 브라질은 토지 사유화 과정에서 흑인 노예, 원주민은 제외되고 왕족과 포르투갈 갑부들에게 땅을 집중시켰다고 설명했다. 1987년 브라질에서 직선제를 쟁취한 뒤, 땅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소수에게 집중된 땅을 점령하여 농사를 짓기 시작하며 '무토지 농민운동단체'가 만들어졌다.

▲ 브라질 '무토지 농민운동단체'에서 강연을 했다
ⓒ 오도엽
▲ 한국 농민이 '브라질도 농산물 수출국이 아니냐?'는 질문을 한다
ⓒ 오도엽
소수 지주의 땅을 점령해 농사를 짓기 위해서 많은 희생도 따랐다. 지금까지 1800명이 사망을 했다고 한다. 또한 강연자는 "정부탄압도 갈수록 강해진다. 농민 1명당 3에서 5명의 경찰을 투입한다. 진압도 폭력적이고 야만적이다. 피도 눈물도 협상도 없이 우리를 땅에서 몰아낸다. 맞아 죽을 각오가 아니면 농사를 지을 수가 없다"며 어려움을 호소했다.

지금은 브라질 27개 주 가운데 23개 주에 '무토지 농민운동단체' 조직을 세웠다. 자체적으로 학교와 병원을 세워 교육과 의료문제를 해결한다고 한다. 땅을 점거해서 농사를 짓는 것에 멈춰서는 안 되고, 사회개혁을 해야 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자본주의 제도 아래에서 힘들다는 것을 깨닫고, 전 세계 민중과 연대해 맞서야 한다"고 연대를 당부했다.

강연을 들은 한국 농민은 "브라질도 농산물 수출국이 아니냐?"는 질문을 하며 연대의 한계성을 지적했다. 이에 브라질 강연자는 "브라질에도 기아로 죽어가는 사람이 숱하게 있다. 브라질 농민은 수출을 반대한다. 수출은 소수 기업형 농장에서 하는 것이다. 브라질 국민은 굶어 죽어 가도. 농산물은 공장에서 만든 상품이 아니다. 농사의 주된 목표는 그 땅을 일군 농민이 먹는 게 1차이고, 다음이 주민을 먹이는 거다. 그리고 남는 것은 국내에 배분을 해야 한다. 우리도 이걸 주장하고 있다"라고 답을 해 박수를 받았다.

▲ 최연소 참가자 장지훈(13)군이 강연내용을 적고 있다.
ⓒ 오도엽
▲ 장지훈군은 마지막까지 한국농민과 함께 했다.
ⓒ 오도엽
이날 강연장에는 열심히 공책에 강연 내용을 적는 사람이 있었다. 이번 홍콩 투쟁에 가장 어린 나이로 참여한 장지훈(13)군이다. 경북 농민의 아들인 장군은 홍콩으로 출발한 12월 12일이 자신의 생일이었다고 한다. 장군은 거리 행진을 할 때면 전농 깃발을 들고 맨 앞에 섰으며, 18일 전원 연행될 때도 함께 잡혀갔다가 풀려났다.

강연과 토론이 끝나자 숙소가 태퉁에 있는 경남 농민들은 전세버스 대신 대중교통을 이용해 숙소로 돌아갔다. 전철역에선 고등학생이 직접 나서 갈아타는 역과 열차표를 자동판매기로 구입해 준다. 전철 안에선 갈아타는 곳과 내리는 역을 설명하며 함께 움직여주는 시민이 있다. 버스를 타고 갈 때는 갈아타는 곳에 함께 내려 숙소로 가는 버스가 서는 곳까지 함께 가주는 시민이 있다.

▲ 홍콩의 지하철 내부
ⓒ 오도엽
▲ 홍콩 식당에서 일하는 여성이 한국농민과 함께
ⓒ 오도엽
경남 의령 농민은 숙소로 가는 도중 저녁을 먹으려고 한 식당에 들렀다. 밥을 먹고 계산을 하려는데 돈을 받지 않는다. 지배인이 와서, "시민 한 분이 명함을 주며 자신이 계산하겠다며 돈을 받지 말라"고 하였단다.

▲ 홍콩의 번화가 몽콕의 거리
ⓒ 오도엽
▲ 홍콩의 2층 버스 내부
ⓒ 오도엽
버스를 타고 숙소 앞에 도착해서 맥주 3병을 시켜 한 잔씩 마시고 일어서서 계산을 하려고 하니, 주인이 "우리는 친구"라는 영어를 되뇌며 돈을 받지 않는다.

농민들은 술집에서 술을 마실 수 없다고 한다. 한국 농민의 조끼를 보면 여러 곳에서 술을 보내와 도저히 술 취한 모습을 보일 수 없을 것 같아 일어난다고 한다. 거리에 유인물을 들고 선전을 나갔던 농민은 빵과 물을 박스 채 사가지고 오는 시민들이 많아 선전물을 들고 다닐 수 없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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