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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코카콜라에 파는 것은 '인간 두뇌가 비어있는 시간'이다."

프랑스의 민영TV <테에프1(TF1)>의 사장 파트릭 를레가 던진 명언(?)이다. 우리는 자칫 TV 프로그램 사이사이에 광고가 끼어든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주객이 전도된 오해에 불과하다. 를레에 따르면 방송의 주목적은 광고이며 시청자가 광고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 TV프로그램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인들은 TV를 혐오한다?

▲ 2005년 한해동안의 프랑스 방송프로그램 시청률 100위 순위. 공영방송인 프랑스 텔레비전의 프로그램이 18위(20시뉴스), 77위(미국영화 <오션스 일레븐>), 83위(텔레필름 '저주받은 왕') 등 3개만 들어있고 나머지는 상업방송인 <테에프1>이 차지했다.
ⓒ TOUTE LA TELE.com
프랑스의 시청률 조사기구인 '메디아메트리'에 따르면 지난 2004년 4세 이상의 프랑스인이 TV 앞에서 보낸 시간은 하루 3시간 24분이었다. 반면, 지난해 7월 여론조사 기관인 'TNS 소프레스'가 18세 이상의 프랑스인 1006명을 대상으로 TV 만족도를 조사한 결과에서는 2004년보다 5% 증가한 53%의 응답자가 불만을 표시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60%의 프랑스인은 현재 TV 프로그램의 질적 수준이 이전보다 떨어진다고 평가했다.

그렇다면 두 명 중 한 명이 TV에 불만을 갖고 있다는 프랑스에서 매년 TV 시청 시간이 증가추세를 보이는 이유는 뭘까.

프랑스 인들은 TV시청을 부끄러운 여가활동으로 여기기 때문에 이를 무마하는 방법으로 TV 프로그램을 까탈지게 비판한다. TV에 대한 프랑스인의 바람과 현실의 가장 큰 균열은 다음 질문에서 드러난다.

"당신의 기대에 가장 부응하는 채널은 무엇인가?"

프랑스 지상파TV 6개 채널 중 21%의 프랑스인이 선택한 채널은 놀랍게도 불독 합작 공영 문화채널인 <아르테>였다. 20%를 얻은 대중 민영채널 <테에프1(TF1)>을 제치고 1위를 차지한 것. 그러나 <아르테>가 지난해 평균 시청률 3.8%를 기록한 것을 생각하면 이 결과는 적이 미심쩍다. 프랑스인의 기대에 부응하는 방송도 공영방송 55%, 민영방송 41% 순으로 나타났으나 실제 시청률은 민영방송 쪽이 훨씬 높게 나타났다. 프랑스인들이 'TV 소비자'로서가 아니라 '시청자로서 보여주고 싶은 이미지'를 위해 답변했기 때문이다.

현재 프랑스의 지상파 방송은 공영방송인 <프랑스2> <프랑스3> <프랑스5>(저녁 시간은 <아르테>)와 민영방송인 <카날 플뤼스> <테에프1> <엠시스(M6)> 등 총 6개 채널이다. 이중 공영방송은 45%의 시청자를 보유한 반면, 민영방송은 55%를 장악하고 있다. 특히 <테에프1>에만 33%의 시청자가 몰려있다.

그렇다면 프랑스의 시청자들은 공영방송과 민영방송의 차이에 민감할까? 프랑스의 시청자 10명 중 6명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긍정적 대답을 준 6명 중 절반은 공영방송과 민영방송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답했다.

민영방송 먹여 살리는 '리얼 TV' 그리고 '편파보도'

▲ 민영방송 <테에프1>의 제5회 스타아카데미 사이트. 스타 아카데미는 스타를 꿈꾸는 20여 명의 젊은이들을 성에 모아놓고 가수 교육을 시키는 일종의 학교. 시청자 투표를 통해 한 명씩 성을 떠나게 되며 최후의 승자에게는 앨범을 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참가자들의 일거수 일투족이 시청자에 공개되고 이들의 운명을 시청자들이 결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리얼TV의 원칙을 그대로 적용하고 있다.
현재 프랑스에서 시청자가 공영방송과 민영방송을 구별하는 경계는 프로그램의 질이다. 프랑스 인의 54%가 민영방송 프로그램이 저질이라고 답했는데 주된 이유는 '리얼TV'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프랑스판 리얼TV의 시작은 지난 2001년 4월 26일 민영채널 <엠시스>를 통해 방영된 <로프트 스토리>다. <로프트 스토리>는 초호화 저택에서 공동 생활하는 10명 안팎의 젊은이들을 화장실을 제외한 모든 공간에 설치된 26대의 카메라를 통해 인터넷과 TV로 24시간 실시간으로 방송했다.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프랑스에서는 상상조차 불가능한 것이었다.

엉뚱하거나 기상천외한 세계의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시간에 미국의 <백만장자와 결혼하기>나 <서바이버>와 같은 소위 '저질' 리얼 TV의 몇 장면을 보여주며 마음껏 비아냥거리던 것이 바로 프랑스 TV였던 것.

그러나 언론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시청자들은 이 해괴한 리얼TV 속으로 빠져들었고 <엠시스>의 평균 시청률은 12.7%에서 16.7%로, 30초짜리 광고 수입은 두 배로 껑충 뛰어올랐다. 이런 <엠시스>의 '성공 신화'는 또 다른 민영 채널 <테에프1>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오늘날 프랑스 민영 채널 브라운관의 황금 시간대를 점령해 버린 프랑스판 '트루먼 쇼'들은 유사한 원칙의 아류작 형태로 대량 생산돼 상업 방송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미국식으로 인사하고 미국 젊은이들을 흉내 내는 리얼TV 출연자들은 프랑스 젊은이들의 트렌드를 선도하며 중고등학교 학생들에게 미국식 삶을 전파하고 있는 것이다.

▲ '젊고 매력적인 백만장자 올리비에가 결국 반쪽을 찾다.' 프랑스 판 '백만장자와 결혼하기' 1편.
ⓒ ACTU STAR
이에 <프랑스2,3,5>채널을 아우르는 '프랑스 텔레비전'의 전임 사장 마크 테시에는 "리얼TV를 방영하는 경솔한 짓은 하지 않겠다"고 천명함으로써 민영 채널과의 대비를 명확히 하기도 했다.

<엠시스>가 청소년을 겨냥한 반면 <테에프1>은 프랑스에서 가장 넓은 시청자 계층을 보유하고 있다. 옛 제국주의 프랑스에 강한 향수를 간직하고 있는 보수 성향의 중노년층을 겨냥한 <테에프1>은 현존 채널 중 극우당 국민전선(FN) 지지자들의 구미에 가장 적합한 채널이기도 하다. 프랑스의 미디어 재벌 '부이그' 그룹이 태반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는 <테에프1>은 지난 1995년 대선 당시 '부이그'의 측근이자 우파 정당인 프랑스 민주연합(UDF) 후보 에두아르 발라뒤르를 공공연히 지지하며 선거 운동을 펼쳐 물의를 일으킨 바 있다.

외국인 이민자를 향한 적개심을 조장할 목적으로 극우당 국민전선이 '치안 부재' 문제를 부각시켰던 지난 2002년 대선 당시 보도도 논란을 일으켰다. 대선 1차전 전날 오를레앙 근교에서 폭행당한 뒤 불에 탄 사체로 발견된 부아즈 노인 사건의 용의자로 '확증 없이' 인근 아랍인들을 지목하는 방송을 내보낸 것. 방송은 이민자 범죄에 초점을 맞춰 인종 간 불신을 부채질했고 '이민자로 인한' 극심한 실업문제를 부각시켰다. 이로 인해 국민전선의 장-마리 르펜 후보가 대선 2차전에 오르는 이변이 연출되기도 했다.

2004년 7월 10일 발생한 '마리 L.' 사건과 관련된 보도는 더 충격적이다. 당시 마리 L.(27)은 파리 교외선(RER)에서 흉기를 든 아랍 청년 6명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자르고 폭행한 뒤 배에 나치문양을 그려놓고 달아났다고 증언했으나 다음 날 허위 신고였음이 밝혀졌다. 그러나 <테에프1>은 '마리 L' 사건이 충분히 발생 가능한 일이라며 이민자 범죄 위협을 끊임없이 강조해 다시 한 번 프랑스에 인종주의를 조장했다. 사회당(PS) 의원 줄리앙 드레가 'TF1'을 'TFN', 즉 극우당 '국민전선(FN)의 TV'라고 비아냥거리기까지 한 것은 이 같은 일련의 편파 보도 사태에 기인한다.

레지스탕스 정신 강조하는 프랑스 공영방송

반면 조선총독부와 미군정청을 거쳐 군사 독재 정권의 정치 선전 도구로 이용된 부끄러운 과거를 갖고 있는 한국의 공영방송과 달리 프랑스의 공영방송은 레지스탕스 정신 위에 세워졌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됐을 때도 프랑스 TV는 나치의 선전선동에 이용되지 않았다. 독일 점령군을 위한 오락프로그램을 방송한 것이 전부였다. 해방이 되자 프랑스는 항독 국민회의(C.N.R)의 결정에 따라 국가가 모든 방송을 손에 쥐었다.

이후 모든 방송을 통합한 유일방송 기관 <프랑스 라디오-텔레비전(RTF)>이 등장했으며 이것은 <오에르테에프(ORTF)>를 거쳐 프랑스 공영채널을 총괄하는 <프랑스 텔레비전>으로 재탄생했다. 이때부터 프랑스 TV는 미국의 상업 방송과 부르주아에 맞서 레지스탕스 정신의 탄생을 알리게 되는데 역사가들은 이를 '승리의 독점'이라 불렀다.

그러나 1천만 시청자를 확보하는 등 TV가 대중 미디어로 자리 잡은 1968년에는 프랑스 방송계에도 돌풍이 불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드골이 TV를 정치적으로 이용한다는 의혹과 더불어 재정적 난관에 봉착하면서 TV종사 노동자들의 파업이 벌어진 것. 이로 인해 제2의 채널이 출현하고 하루 1분씩의 광고방송이 허용되면서 민영방송의 가능성이 열렸다.

이어 현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이 총리였던 1974년 8월 7일, 새로운 방송법이 통과됨으로써 하나의 채널로 통일됐던 공영방송도 자체 경쟁에 돌입했다. <오에르테에프>가 붕괴됨으로써 공영채널은 세 개로 나뉘었다. 1982년엔 프랑스 최초의 민영채널인 <카날 플뤼스>의 등장과 함께 TV의 국가 독점 시대도 마침내 막을 내렸다.

1987년에는 공영방송이었던 <테에프1>이 민영화됐는데 이는 재정적으로 튼튼했던 공영 채널이 민영화 된,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상업 방송으로 시작된 미국이 1966년 공영방송 <피비에스(PBS)>를 만들어 프로그램의 질을 향상시키려 노력한 것과 정반대다. 방송의 국가 독점 탈피와 위성을 통해 유입되는 외국전파, 특히 미국의 상업TV에 맞설만한 대안이 필요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TV가 시장에 좌지우지 되면서 방송의 상업화가 극대화 되는 시청률 경쟁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수신료 혹은 광고?

프랑스 민영방송의 수입이 광고에 의존한다면, 공영 방송의 특징은 '규제'다. 고등시청각위원회(CSA)는 방송사가 올리는 3.2%의 매출을 유럽 영화에, 또 이 중 2.5%는 프랑스 영화에 투자해 TV가 프랑스 영화 발전에 기여토록 하고 있다. 각 공영 채널은 재방송을 포함해 총 60%의 유럽 제작 프로그램을 방송하고 이 60%중 40%는 불어권 프로그램을 방영할 의무가 있다. 독립제작사 프로그램 선매나 공동제작도 장려한다.

▲ 다큐멘터리와 정보, 토론 프로그램으로 채워진 공영방송 <프랑스2> TV 홈페이지.
특히 <프랑스2> 채널은 시간 당 8분 이상의 광고를 내보낼 수 없으며 상업적 성공이 불가능한 프로그램을 제작할 수 있어야 한다. 때문에 프랑스도 TV가 상업적 경향에 흔들리지 않도록 보장하는 수신료 제도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지난 2003년 '프랑스 텔레비전'이 올린 총 매출 22억8210만 유로 중 64%가 수신료로 채워졌다. 공영방송의 위력이 강한 독일과 영국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취약하지만 프랑스 TV는 프랑스국립영화센터(CNC)의 지원을 받고 있어 유럽에서도 탄탄한 재정을 자랑한다. 상업 방송의 시청률 경쟁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텔레비전'의 신임 사장 파트릭 드 카롤리스가 "공영방송은 시청자와 프로그램의 질을 조화시켜야 한다"고 자신 있게 천명할 수 있었던 이유다.

그러나 시청자가 납부하는 수신료 없이는 운영이 불가능한 프랑스의 공영 방송이 설립 정신에 충실하다고 단언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프랑스3> 채널의 인기 토크쇼 '모두의 마음에 들 수는 없다'가 좋은 예다.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이 토크쇼는 휴대폰 문자 메시지를 이용해 시청자들의 참여를 유도하며 수신된 문자 메시지를 화면 하단에 공개한다.

▲ 지난해 7월 6일 <프랑스 텔레비전>의 새로운 사장에 임명된 파트릭 드 카롤리스.
지난 2003년 12월, 유대인 전투복 차림으로 등장한 코미디언 디우도네가 무슬림 청년을 향해 독설을 퍼부으며 유대인의 호전성을 비아냥거린 코믹 스케치를 선보였을 때 이에 분노한 시청자들이 인종차별 문자 메시지를 집중 전송했지만 이 모든 것이 여과 없이 방송됐다.

이어 지난해 11월 30일 유료민영 채널 <카날 플뤼스>의 간판 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는 '그랑 주르날'은 생방송 도중 난입한 10여 명의 청년들로 인해 3분 30초 간 중단되기도 했다. '인종주의를 선동하는 미디어 반대'라고 적힌 검은 색 티셔츠 차림으로 생방송 무대를 점령한 청년들은 '인종차별주의를 조장하는 공영방송에 수신료 납부를 거부한다'며 모든 시청자들이 동참해 줄 것을 호소했다.

그러나 대중적 관심과는 거리가 있는 다큐멘터리나 시사 교양 프로그램 위주로 편성되는 프랑스의 공영방송은 이처럼 불미스러운 몇 가지 일화를 만회할 만큼 대체로 건강한 편이다.

앞서 언급한 'TNS 소프레스' 여론조사에서 프랑스인 53%가 TV에 불만을 나타낸 결과와 대비해 지난 2003년 또 다른 여론조사 기관 '입소스(Ipsos)'의 발표를 보면 62%의 프랑스인이 '공영 프랑스 텔레비전'에 만족하고 있다고 나왔다. 결국 이것은 시청률에 흔들리지 않는 수준 높은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올바른 미디어로서 공영방송에 거는 시청자들의 기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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