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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고 후 남편은 매일 회사 앞에서 사원들의 출·퇴근과 점심시간에 맞춰 하루 2, 3번씩 1인 시위를 했습니다. 남편이 싸움에 나서면서 경제 상황이 나빠지긴 했지만 저는 집회에 필요한 방송 장비나 경비 등에는 절대 돈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남편 대신 생계를 책임지느라 남편 싸움에 '강 건너 불구경하듯' 관심을 보이지 않은 데 대한 미안함도 있었지요.
워낙 끼니도 해결하기 어려울 정도로 가난하게 자랐기 때문에 아끼면서 사는 게 힘들지는 않았습니다. 수돗물을 아끼기 위해 빗물을 최대한 모아 활용하고, 2천 원짜리 슬리퍼도 꿰매 신었습니다. 그래도 제가 하는 비디오 대여점에서 나오는 돈으로 근근이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도 사람인지라 가끔은 화도 나고 슬슬 지치기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 경제적인 문제를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물건을 남에게 잘 빌려주지 않는데 남편은 카메라건 차량이건 잘도 빌려줬습니다. 여러 사람 손을 전전하던 카메라는 결국 어디로 갔는지 사라졌고 차를 빌려간 사람이 신호위반, 주차위반에다 큰 사고를 내도 모두 제 돈으로 처리해야 했습니다. 덕분에 보험료까지 껑충 뛰어올랐지요. 그리고 집회나 기자회견을 하면 업무방해를 했다는 죄목으로 심심찮게 '벌금형'을 선고받기도 했습니다.
투쟁하는 데도 돈이 들더군요. 그동안 벌어 놓은 돈이 바닥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2001년 남편은 미안했는지 장사를 하겠다며 차를 팔아 중고 트럭을 사서 백만 원을 들여 탑을 적재했습니다.
그리고는 삼성 SDI 건너편 인도에서 포도 장사를 하면서 복직투쟁을 했는데 2001년 11월 결국 업무방해와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해 두 번째로 구속됐습니다. 결국 탑차는 기름값만 많이 드는 쓸모없는 쇳덩어리가 됐고 출소 후에는 남편 건강도 좋지 않아 틀렸다 싶어 탑을 떼어 버렸습니다. 힘들게 번 돈으로 탑을 붙였다 떼었다, 쇼를 한 겁니다.
아이가 아플 때 남편은 집에 없었습니다
노동운동에 빠져들면서 남편에게 가족은 뒷전으로 밀려났습니다. 특히 툭하면 온다 간다 말도 없이 사라져 황당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언젠가 가게 보랴 아이 보랴 정신없이 있다가 아이가 목을 못 움직이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병원에 가려고 남편에게 전화해 어디냐고 물었더니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지금 창원 가고 있다."
갈수록 남편이 집에 있는 날은 줄어들었습니다. 이상한 건 남편이 없을 때마다 영양실조 끼도 있고 허약했던 아이가 자주 코피를 흘리고 아팠다는 겁니다. 한밤중에 아이를 둘러업고 혼자 쩔쩔매면서 택시를 잡아타고 병원으로 가는 길에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특히, 남편이 감옥에 있을 때 아빠가 너무너무 보고 싶은데 왜 안 오냐며 아이가 울먹일 때는 정말 난감했습니다. 언젠가는 아빠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이 안 난다며 아빠 사진을 들여다보느라 잠도 자지 않더군요. 아빠 생일날에 꽃 한 송이를 주고 싶은데 아빠가 철창 안에 있어서 아무 것도 줄 수 없다며 안타까워했습니다. 딸은 눈물을 흘리면서 "엄마, 나 가슴이 아프다. 왜 그래?"라고 하더군요.
2003년 6월 출소한 지 얼마 안 돼서 또 일이 터졌고 남편은 다시 바빠졌습니다. 하지만 오랜만에 아빠를 만난 아이는 방문 앞에 서서 "아빠, 가지 마세요. 제발 가지 마세요"하며 악을 쓰고 발을 동동 구르며 울부짖었습니다. 그래도 남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미안해하며 집을 나섰습니다.
감옥살이 때문에 목 디스크가 심해져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도 남편은 병원에 가지 않았고, 제가 아파도 서울에 투쟁하러 갔습니다. 그리고는 목이 아파 견딜 수 없었던지 급하게 내려와서는 지인에게 목 디스크 견인기만 빌려 곧장 다시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병은 초기에 고쳐야 하니 제발 치료 받으라고 해도 남편은 들은 체도 안했습니다.
남편은 투쟁이라면 지지치 않는 백점짜리 운동가였지만, 집에서는 낙제에 가까웠습니다. 이사할 때도 남편은 장롱만 제 위치에 갖다 놓고 문갑과 서랍장은 문 앞에 놓은 채 사원 모임에 가버렸습니다. 결국 새벽 1시에 가게를 마치고 제가 서랍장과 문갑을 밀어서 옮겼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웬만한 집안일은 스스로 척척 하는 용감한 아줌마가 되었습니다. 물론 남자가 하는 일, 여자가 못할 게 뭐 있냐며 알아서 하는 성격 탓도 있지요. 시멘트 못을 사서 싱크대 선반도 직접 설치하고 커튼 봉이나 가게 천장의 깨진 텍스도 드릴로 직접 박았습니다.
내가 살기 위해 이젠 심리상담을 받아요
하지만 이젠 한계에 다다른 것 같습니다. 두 번의 옥살이로 남편은 소중한 건강을 잃었습니다. 지난해 목 디스크 수술을 받았고 올해 결국 지체장애 5급 판정을 받았습니다. 회사 다닐 때만 해도 건강 나이가 10대라며 유일하게 국민건강보험에서 주는 손목시계를 받은 남편이었는데….
계속되는 남편의 구속과 생활고로 스트레스를 받아서 우울증에 걸렸던 저 역시 건강에 이상이 생겼습니다. 설거지를 하다가도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쉬어야 할 정도로 무기력해졌고, 남편이 억울하게 당한 것만 생각해도 몸이 부들부들 떨렸습니다. 잘못 돌아가는 세상을 생각하면 분노가 치밀어 자살을 결심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요즘 들어서는 새벽이면 커다란 바윗덩어리가 가슴을 짓누르는 것 같이 답답하고 호흡이 불규칙해져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남편과 아이에게 들킬세라 숨죽이며 참았습니다. 그런데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얼마 전 잠자다 깬 남편에게 들키고 말았습니다. 많이 놀랐는지 남편은 제 어깨를 흔들어대며 물었습니다.
"미경아! 와 이러노, 니 언제부터 이랬노?"
"자기가… 감옥에… 갔을 때부터…."
몸이 심하게 떨리고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파서 저는 울먹이며 겨우 대답을 이어갔습니다.
"그라믄 내한테 말을 하지."
"자기도 감옥에서 괴로울 텐데 내가 어떻게 말을 해요…. 출소해서도 계속 아팠는데 또 어떻게 말해요…."
"안되겠다. 응급실 가자."
"안 가요. 이러다 조금 지나면 괜찮아져요."
남편이 물을 갖다 준다고 했지만 알아서 마시겠다며 일어서는데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습니다. 비틀거리며 한 발짝씩 내디뎌 부엌으로 가서 물 컵을 드는데 손이 파르르 떨렸습니다. 물 한 모금을 들이켰는데 목구멍에 탁 걸려 넘길 수가 없더군요. 물 한잔도 부드럽게 넘기지 못할 정도로 몸이 많이 떨려 포기하고 자리에 누웠습니다.
더 이상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저는 지난 1월부터 심리상담을 받고 있습니다. 제가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속속들이 알게 된 상담사는 제 말이 거칠어지고, 가슴에 분노가 쌓이고 눈에 독기가 서리는, 제가 겪고 있는 일들이 모두 자연스럽고 지극히 정상적인 거라고 하더군요.
저 같은 상황에 처하면 누구라도 보따리 싸서 도망갔을 텐데 어떻게 지금까지 견뎌왔냐며 놀랐습니다. 제가 신처럼 느껴진다며 상담하면서 의자에 앉아 있는 게 신기할 정도라고도 했습니다. 첫 상담 때는 말하는 내내 눈물과 콧물 범벅이었지만, 상담 횟수가 7회에 달하다 보니 요즘은 웃는 얼굴로도 상담합니다.
그래도 남편은 나의 영원한 동지
제가 남편에게 바라는 건 없었습니다. 결혼해서 월급봉투 한 번 못 받아봤지만 저는 아무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돈도, 빽도 없는 인간이 건강하기나 할 것이지, 산전수전 온갖 고초 다 겪더니만 결국은 몸까지 망가진 걸 생각하면 정말 '웬수'가 따로 없습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세상을 향해 한 치의 부끄럼 없이 올바르게 살다 이렇게 생고생하는 것을 보면 제 책임도 조금은 있는 것 같아 남편에게 미안할 때가 많습니다.
미운 남편, 그러나 결코 미워할 수 없는 나의 영원한 동지입니다. 사는 게 아무리 힘들고, 고달프지만 푸른 하늘을 보며 크게 한번 웃어봅니다. 지금은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하지만, 예전에 누군가가 저에게 그랬거든요. 백만 불짜리 미소라고요. 그동안 어렵게 운영해 온 비디오 대여점이 정리되면, 남편과 아이를 먹여 살리기 위해 공장에라도 다닐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