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기아차그룹 임직원 300여 명은 토요일(8일) 새벽을 반납했다. 검찰 수사를 피해 미국으로 도피 출국 의혹을 받았던 정몽구 현대·기아차 회장의 새벽 입국 때문이었다.
임직원 300여 명은 이날 새벽 2시부터 인천공항을 지키고 있었다. '회장님' 도착 3시간 전부터 만반의 준비를 한 셈이다.
새벽 4시 10분께 인천공항에 도착한 기자는 현대·기아차 직원들이 타고 온 '현대관광' 버스, 정장을 입고 삼삼오오 모여 담배를 피는 수십명의 직원을 볼 수 있었다.
공항 편의점은 때아닌 '정몽구 특수'
공항 건물 안에는 더 많은 현대차 직원들이 있었다. 정장을 입은 직원 40~50명씩 몇 무리가 휴게석을 점령하고 멀뚱멀뚱 CNN 방송을 보고 있었다. (새벽 시간인 탓에 채널 선택의 폭이 별로 없어 보였다.)
기자는 피곤함을 달래기 위해 공항 안 편의점으로 갔다. 커피 한 잔이 그리워서였다. 편의점은 그야말로 북새통이었다. '정몽구 귀국 특수'를 누리고 있었다. 아르바이트 직원이 3명이나 나와 계산대에 서 있을 정도였다. 현대·기아차 직원들 대부분은 커피와 음료수를 계산대에 내밀었다. 허기를 달래려는 직원들도 있었다.
"사발면 어디서 먹죠?"
"공항에서는 드실 수 없는데요."
몇몇은 사발면을 들고 계산대로 오다가 아쉬운 듯 사발면을 진열대에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2분만에 끝난 회장님 귀환 작전
새벽 4시 30분쯤 현대차 직원들의 작전회의가 진행됐다. 40~50명씩 그룹별로 모여 구석에서 작전 지시를 받았다. 이어 새벽 4시 40분께 작전회의를 마친 직원들은 정몽구 회장이 나올 B출구에서 양 옆으로 2~3줄씩 늘어섰다.
새벽 4시 50분이 좀 넘어서 현대차 김동진 총괄 부회장을 위시해 설영흥 중국담당 부회장, 이전갑 부회장, 서병기 현대차 사장, 이현순 사장(연구개발 총괄본부장) 등이 모습을 드러냈다. 조남홍 기아차 사장, 정석수 현대모비스 사장도 정 회장의 귀국을 맞았다. 이들도 역시 새벽 2시부터 나와 있었다.
새벽부터 나와 피곤했던 탓인지, 한 임원은 쭈그리고 앉아있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히기도 했다.
새벽 5시 20분께 인천국제공항 B출구로 모습을 드러낸 정 회장이 40여m 앞 3번 게이트에 준비된 차량에 탑승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딱 2분이었다.
두세 겹으로 스크럼을 짠 현대·기아차 임직원 300여 명은 효과적으로 사진기자들을 막고 길을 열어 정몽구 회장이 안전하게 차에 오르게 만들었다. 이 장면을 사진으로 접한 네티즌은 관련 기사 댓글을 통해 '모세의 기적'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사진기자와 방송 카메라 기자들은 현대·기아차 경비용역업체 직원들과 욕설과 고성이 오가는 싸움을 벌였지만, 한쪽에서는 "그래도 잘 했어"라는 찬사가 흘러나왔다.
강요된 복종은 배반을 낳는다
상사의 명령에 따르는 것은 샐러리맨의 숙명이다. 현대·기아차라고 예외일 수 없다. 주말 새벽을 반납하고 공항에 나와 보디가드를 자처한 현대·기아차 임직원 300여 명을 탓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강요된 복종과 일방적인 조직 문화는 또다른 배반을 부를 개연성이 높다. 내부 제보자에 의해 힘없이 무너지는 세계적 기업 현대·기아차의 모습은 그래서 더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