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25일 남북한 열차 시험운행을 북한이 일방적으로 연기한 뒤 앞으로 남북관계가 어떻게 진행될 지 큰 관심을 끌었다. 냉랭한 관계로 갈 것이라는 시각과 심각한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이라는 시각이 엇갈렸다.
이런 상황에서 6월 4일부터 6일까지 제주도에서 경제협력추진위원회(경협위) 제12차회의가 열렸다. 애초 비관적인 전망이 있었으나 결국 6일 합의문을 내놓았다.
합의문에는 ▲'남북 경공업 및 지하자원개발 협력에 관한 합의서'(이하 경공업 합의서)를 채택하고 조건이 조성되는데 따라 조속히 발효하고 ▲한강 하구 골재채취사업을 군사적 보장조치가 취해지는데 따라 협의 추진하며 ▲개성공단이 국제적인 경쟁력을 가질 수 있도록 제반 조건을 마련한다 등의 내용이 들어 있다.
'경공업 합의서'는 남한이 북한에 의복·신발·비누 생산에 필요한 원자재를 북한에 제공하고, 북한은 이를 지하자원 생산물 및 생산권 등으로 상환하는 것 등이 주요 내용이다.
합의문에 따르면 '경공업 합의서'를 "조건이 조성되는데 따라 조속히 발효시킨다"고 했다. '조건'은 결국 열차 시험운행이 이뤄져야하는 것을 의미한다. 북한이 원래 약속했던 열차 시험운행을 해야 경공업 원자재를 지원할 수 있다는 말이다.
김천식 통일부 남북경제협력국장은 "열차시험운행이 이뤄지지 않으면 '경공업 합의서'도 발효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번 회담은 남북관계의 안정과 발전에 기여했으며 연기된 열차 시험운행의 이행력을 확보했다"며 "경공업 원자재를 8월부터 북측에 제공키로 한 만큼 논리적으로 열차 시험운행은 8월 이전에 마무리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단 남북한 사이의 대화는 계속 유지되는 모양새다. 그러나 최근 일련의 남북관계에서 주목되는 현상이 있다. 현 정부가 갈수록 북한에 "당신들이 무엇을 하면, 우리는 이것을 해주겠다"는 식의 말을 많이 한다는 점이다.
지난해 6월 한국정부는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북한 함경남도 금호지구에 건설중이던 경수로 사업을 중단하는 대신 남쪽에서 200만㎾의 전력을 직접 보내겠다는 '중대제안'을 했다. 올 4월 이종석 통일부 장관은 "납북자 문제를 풀기 위해 과감한 경제적 지원방식을 북한에 제안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북한이 납북자 문제에 있어 성의를 보이면 막대한 경제적 도움을 주겠다는 것이다. 이번에도 열차 시험운행을 하면 경공업 원자재를 주겠다고 했다.
오래된 논쟁의 역사
지난 2일 한국의 진보적 외교·안보 연구기관인 코리아연구원이 주최한 간담회에서 정창현 국민대 교수는 "요즘 한국정부는 정치·군사적인 문제를 돈으로 풀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며 "이는 사실상 상호주의로 실질적인 효과를 기대하기 힘들다"고 비판했다. 그는 "정치·군사적인 문제는 상호 신뢰와 조건을 형성해 풀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국에서 상호주의를 주장하는 쪽과 이에 반대하는 쪽(정경분리론 등)의 논쟁은 오래됐다.
상호주의는 남한이 무엇을 제공하면, 북한도 그에 대한 대가를 내놓아야 한다는 논리로 보수진영의 대표적인 주장이다. 이는 보통 남한의 경제적 지원에 대한 북한의 정치·군사적 양보로 이해된다. 이들은 "남한이 경제지원을 계속해왔지만 김정일정권은 개혁·개방에 소극적이며 핵을 개발했다"며 "조건을 걸지 않는 남한의 '퍼주기'는 북한정권의 생존 가능성만을 높여줬다"고 비판한다.
이 과정에서 남한에서는 끊임없이 대북지원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져 국민적 공감대가 훼손됐고, 이것이 역으로 대북지원과 남북교류의 확대를 가로막는 하나의 요인이 됐다는 비판도 있다. 더 나아가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을 경우, 남한의 정권이 바뀌면 이제까지의 남북교류도 후퇴할 수밖에 없게 된다는 논리로 이어진다.
열차 시험운행이 불발되었는데도 만약 경공업 원자재를 지원한다면 일단 국민여론이 반발할 것이고 국회 동의를 받기 힘들 것이다. 이것은 남한정부에게 큰 부담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반대쪽의 주장은 다르다. 일단 정치·군사 문제는 단지 남한과 북한만의 문제가 아닌 미국이 끼여 있다. 주한미군이 주둔하고 있고 미국이 북한에 대한 핵 선제공격을 포기하지 않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또 정치·군사적 문제는 사실 북한정권의 생존과 관련된 문제다. 일부 경제적 지원으로 북한이 정권의 생존과 관련된 문제에서 쉽사리 양보할 것으로 기대하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경제적 지원과 남북한의 교류가 조금씩 확대되고 강화되어야 결국 정치·군사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이 문제의 해결로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두가지 문제를 연계시키기 시작하면 결국 경제교류마저도 영향을 받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일부에서는 북한의 약속위반을 문제삼지만 남한 역시 마찬가지라는 비판도 있다. 예를 들어 개성공단이 위치한 곳은 북한의 군사적 요충지다. 북한은 개성 땅을 내줬으나 현재 2만8000평의 시범단지에 15개 기업이 입주해 있을 뿐이며 전략물자 통제 등 미국의 압력 때문에 전망이 불투명하다.
지난 5월 28일 북한 군부는 담화문을 통해 "개성공단만 봐도 터 조성 작업만 해놓고 한쪽 모퉁이에 '시범공단'이나 운영하는 정도에 머물러 있다"며 "개성공단을 비롯한 모든 남북협력이 단명으로 끝난 금호지구(경수로)처럼 되는 것은 아닌지 주시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한 전문가는 "북한은 한국정부가 과연 미국의 압력을 이겨내고 개성공단을 끌고 갈 수 있을 지 의문을 품고 있다"고 지적했다.
상호주의가 북한의 양보를 이끌어낼 것인가
오랜 논쟁이 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상호주의는 실질적으로 북한의 양보를 이끌어낸 경우가 드물었다는 점이다. 상호주의적 요구를 받을 때 북한은 대개 문을 닫아버려 남북관계는 단절되기 일쑤였다. 남북한 사이에 채널 자체가 없으니, 북한에 무엇인가를 요구할 통로가 없고 따라서 양보도 있을 수 없었다.
현 정부에서도 무엇인가 조건을 내건 제안 역시 별 효과는 없었다. 오히려 '중대제안'은 1994년 제네바합의로 건설중이던 북한 금호지구 경수로 공사를 부시행정부가 중단시킬 수 있는 명분과 조건을 제공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한국 정부가 전기를 직접 송전하는데 왜 경수로가 필요한가"라는 논리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종석 장관은 대규모 경제지원을 약속하며 납북자 문제를 풀려고 했지만 지난 4월 18차 남북장관급 회담에서 이 문제는 전혀 진척이 없었다.
철도 시험운행은 대단히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문제다. 과연 북한에 약 8000만달러 상당의 경공업 원자재를 제공한다고 이 문제가 풀릴 지 의문이다. 설사 이렇게 해서 철도 시험운행이 이뤄지더라도 과연 다음 단계로 나갈 수 있을까?
정 교수는 "이번 지방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이 참패했다"며 "남한 정세에 지극히 민감한 북한은 이 선거결과를 보고 앞으로 남한정부에 더 거칠게 나올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즉 힘 빠진 노무현정부에 큰 기대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5월 9일 몽골을 방문했을 때 "(북한에 대해) 본질적 정당성의 문제에 대해서 양보하는 것이 아닌, 다른 제도적·물질적 지원은 조건없이 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최근 한국정부의 태도로 볼 때 노 대통령의 몽골발언은 구체적인 계획 하에서 나온 게 아니라 우발적으로 나왔음이 다시 한번 증명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