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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류기화씨는 마지막 물막이공사를 앞두고 방조제 위에서 개최된 '새만금의 봄'행사에서 어민 대표로 올라와 새만금을 살려달라고 도요새 처럼 눈물을 흘렸다.(2006년 3월)
ⓒ 김준
갯벌은 생명을 잉태하는 질척거리는 자궁이지만 생명을 거두는 안식처이기도 하다. 방조제가 막히고 세번 정도 많은 비가 왔다. 그 때마다 갯벌에 숨어 있던 생합들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고개를 내밀고 갯벌로 나왔지만 그렇게 그리던 바닷물이 아니었다. 빗물이었다.

한번 고개를 내밀고 갯벌위로 나온 생합들은 다시 마른 바닥을 헤집고 자궁 속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그리고 입을 벌린 채 죽어갔다. 이렇게 생합은 빗물에 속아 죽어갔고, 갯벌 속 생합들도 바닷물을 마시지 못하는 생합들은 썩어갔다.

수십 년을 땅 한 뙤기 갖지 않고 생합에 의지해 살아온 어민들은 더 이상 드러난 갯벌위에서 그레질을 하기 어려워졌다. 그래서 그들이 선택한 것이 '물생합'이었다. 그곳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었다. 생명과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있는 깊은 갯골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었다. 그곳은 자연의 영역이고 신의 영역이었다.

▲ 물생합작업을 하는 어민들.
ⓒ 김준
어찌하랴, 어리석인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방조제는 어민들을 깊은 갯골로 몰아넣었다. 가슴까지 차오르는 물골에서 뒷걸음질로 그레질을 하다 얼굴이 수면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굽혀 생합을 주워냈다.

그곳의 생합들은 주먹만 했다. 방조제가 막히기 전에 잡았던 그 생합들이 그곳에 있었다. 인간의 폭력 앞에 생합들은 그 깊은 물골에 몸을 숨긴 것이다. 하지만 갯골도 더 이상 생합들의 '소도'도, 안전지대도 아닌 모양이다.

고 류기화(39)씨는 함께 다니던 순덕이 언니에게 입버릇처럼 이야기했다.

'물생합하다가 누구 하나 큰 일 날 것이여.'

류씨를 비롯해 '순덕이이모(새만금사람들에게 그렇게 통한다)', 부녀회장 추귀례씨 등은 계화도에서도 특공대로 통할 정도로 생합잡이에 전문가들이다. 계화도 갯벌을 손바닥 보듯 했던 그들은 새만금사업에 가장 강력하게 반대했던 탓에 '갯벌의 여전사'라는 별명이 붙었다. 류씨는 그 중에 탁월했다. 남편 고은식씨와 함께 새만금으로 아파하는 곳에는 늘 그녀가 있었다.

어느 여름날 학생들을 데리고 계화도 갯벌을 답사하는 날에도 그녀는 백합죽을 큰 솥에 끊이고 있었다. 지난 '새만금의 봄' 행사에서도 무대에 올라 도요새처럼 새만금을 죽여서는 안 된다며 울먹였다. 해창산 싸움에도, 삼보일배에도 새만금 갯벌의 곳곳에 그녀의 기억들이 남아 있다.

다른 사람을 데려갈세라 먼저 간 것일까

▲ 갯벌배움터 '그레'를 열던 날 노래를 부르던 류기화 고은식 부부.(2004년 11월)
ⓒ 김준
부부는 닮는다고 했던가 어눌한 말로 시작해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부부의 언술은 그 어떤 논리보다 앞섰다. 갯벌을 지키고자 했던 그녀는 생합과 갯골이 부름을 받고 잡던 생합을 등에 지고 물속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새만금과 함께 하고 싶어 했던 그녀, 갯벌을 지키고자 했던 그녀는 이제 영영 새만금의 갯벌이 되어 버렸다.

소식을 듣기 사흘 전 학생들을 데리고 새만금 갯벌을 방문했다. 태풍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것이 그녀를 데리러 북상하는 죽음의 사자였던 모양이다. 하늘이 열리고 계화도에 한줄기 빛을 내리더니 이내 검은 구름이 하늘을 덮고 빗줄기를 뿌려댔다. 그리고 다시 하늘이 맑아졌다. 학생들을 보내고, 그녀의 남편 은식씨와 맥주를 한 잔 하다 광주로 향했다. 전화가 왔다.

"교수님 광운이 엄마예요. 광운이 아빠 어딨어요? 전화를 안 받아요"

귀에 익숙한 목소리다. 반갑다. 내가 받은 그녀의 첫 전화였다.

"요즘 생합잡이 어때요. 건강하지요?"

이 말을 하기도 전에 전화는 끊어졌다. 돌아오면서 안부를 묻지 않았던 것이 무척 후회되었다. 육감이라는 것이 정말 있나보다. 이날 같이 후회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이틀이 지난 수요일(7월 12일) 10시쯤 고은식씨와 통화를 했다. 울먹이며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광운이 엄마가 생합 잡으러 갔다 죽었어요. 우리 각시가 죽었어요."

그리고 전화가 끊겼다. 새만금 갯벌은 그녀를 그렇게 데려갔다. 뭐가 급하다고 어디에 필요해서 데려갔을까. 아직도 광운이와 은별이는 물론 새만금갯벌도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데….

고인의 소원대로 한줌의 재가 되어 매일 오가던 살금갯벌에 뿌려졌다. 계화도 간척지 위로 옅은 무지개가 나오더니 이내 사라지고, 신시도 뒤로 계화도 갯벌을 뻘겋게 달군 해가 넘어간다.

▲ 고인은 한줌의 재가 되어 평생 드나들 던 살금갯벌에 뿌려졌다.
ⓒ 김준
▲ 고인을 갯벌로 보내고 가족들과 함께 그레질을 하던 엄마들이 모여 그녀의 삶을 기록한 오종환 감독의 '갯벌여전사'를 보고 있다.
ⓒ 김준
갯벌배움터 '그레'에서는 그녀와 함께 매일 생합을 잡던 엄마들이 모여 얼마 전 부안영화제에서 상영된 오종환 감독의 '갯벌여전사'를 보면서 고인을 추모했다. 딸 은별이 내레이션을 맡고 고인이 주인공으로 출연했다.

영화는 그레를 들고 갈매기를 쫒는 엄마를 보며 은별이의 '엄마는 내일도 모레도 계화도 갯벌에서 생합을 잡을 것이다. 아! 엄마다'라는 말로 마무리되었다.

한 엄마는 '갈매기가 되어 날아갔구만'이라고 고개를 돌리며 눈물을 훔쳤다.

어리석은 인간의 선택에 바다는 분노의 이빨을 숨기고 있다. 바다는 부자들이 선택하는 최고의 놀이공간이지만, 가난한 사람들이 선택하는 최후의 삶의 공간이기도 하다. 바다는 이렇게 놀이와 삶이 어우러진 공간이다.

고인은 바다와 갯벌에서 그녀의 희망을 찾았을 것이다. 방조제의 배수갑문이 막히기 전 멀리 서해바다로 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조기를 따라 칠산바다를 거쳐 태평양 깊은 바다로 나가 영원한 안식처를 찾고 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새만금을 잊지 못하고 조기떼를 몰아, 생합씨를 듬뿍 물고 계화도를 찾아 방조제를 몸으로 부딪치며 배수갑문을 열라고 소리칠지 모른다. 그녀의 영혼이 편하게 하려면 저 죽음의 방조제 물길을 열어야 한다. 그것은 산자들의 몫이 되어야 한다.

그녀는 생합만 잡게 해달라고,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대법원 앞에서, 방조제 위에서, 청와대 앞에서 외치다, 그토록 살리고 싶어 했던 '새만금 갯벌'이 되었다.

그대 갯벌과 함께 고이 잠드소서.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전라도닷컴>의 '섬섬玉섬'에도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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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동안 섬과 갯벌을 기웃거리다 바다의 시간에 빠졌다. 그는 매일 바다로 가는 꿈을 꾼다. 해양문화 전문가이자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 사진작가이기도 한 그는 갯사람들의 삶을 통해 ‘오래된 미래’와 대안을 찾고 있다. 현재 전남발전연구원 해양관광팀 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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