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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현관문을 열면 바로 보이는 '메달밭', 어머니는 아마추어 배드민턴계의 최강자였다.
우리집 현관문을 열면 바로 보이는 '메달밭', 어머니는 아마추어 배드민턴계의 최강자였다. ⓒ 김귀현
우리집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면 가장 먼저 사람들을 반겨주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금, 은, 동 색색의 메달들이다. 불과 몇 달 전까지 경기도를 주름잡던 아마추어 배드민턴계의 '슈퍼스타', 어머니께서 획득하신 메달들이다. 하지만 이제 어머니는 변변한 은퇴 경기도 없이 부상으로 선수생활을 마감하셨다.

49세라는 관절염이 걸리기엔 젊은 나이에 어머니께 찾아온 '퇴행성관절염'. 화려했던 어머니의 선수생활은 몇 달간의 참을 수 없는 무릎의 고통과 함께 막을 내리게 되었다.

어머니가 날 업고 뛰던 날, 등의 따스함을 잊을 수 없습니다

아직 내 왼쪽 뺨에는 20바늘을 꿰맨 흉터가 남아 있다.
아직 내 왼쪽 뺨에는 20바늘을 꿰맨 흉터가 남아 있다. ⓒ 김귀현
내가 여섯 살쯤 되었을 때였다. 워낙 개구쟁이였던 나는 친구들을 놀리고 도망가는 것이 그때의 낙이었다. 그날도 마침 친구 하나를 타깃으로 정해 놀리고 도망가기를 반복하였다. 그러던 중 그 친구는 더 이상 못 참겠는지, 무서운 기세로 날 쫓아왔다. 순하기만 하던 그 친구의 예상치 못한 반발에 난 두려워졌고, 전속력으로 아파트 2층인 집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결국 사고가 나고야 말았다. 계단을 오르던 나는 발을 헛디뎠고, 계단의 딱딱한 모서리에 내 왼쪽 뺨을 심하게 부딪힌 것이다. 나는 피를 질질 흘리며 주저앉아 울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나를 업고 뛰기 시작했다.

차도 없던 시절, 그는 정말 죽을 힘을 다해 달렸다. 나는 너무 큰 고통에 정신을 거의 잃을 정도였지만, 따스한 등의 익숙한 느낌에 이내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바로 어머니였다. 어머니의 등은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고, 고통은 서서히 사라졌다. 난 병원에서 20바늘이 넘게 꿰매는 대수술을 하였고, 내 뺨에는 아직 영광의 흉터가 남아있다.

이십 년이나 지난 일이라, 이 모든 일들은 그저 몇 장의 흑백 스틸 사진처럼 기억에 남아 있다. 하지만 어머니가 나를 업고 뛸 때 어머니 등의 따스함, 그 따스함에 의해 고통이 모두 사라진 그때의 그 기억은, 스킬 컷이 아닌 생생한 동영상으로 내 기억 속에 남아있다.

어머니를 처음 업던 날, 난 걸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운동에 탁월한 소질이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무렵 처음으로 배드민턴을 시작하셨고, 괄목할 만한 성장을 거듭하셨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무렵엔 경기도를 넘어 전국 대회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셨다. 이후에는 세계아마추어선수권대회까지 진출을 하셨다.

활달한 성격에 친구도 많고, 항상 밝은 어머니가 어떤 때는 인간적으로 부럽기까지 했다. 직장에 다니면서도 매일 아침, 저녁으로 네 시간씩 배드민턴을 치셨다. 내가 고 3때는 아들 공부하는데 방해가 될까봐 새벽 4시에 일어나 운동을 하고 돌아오셔서 오전 6시에 아침밥을 지어 먹이고 학교에 보내시곤 하였다.

어머니께서 선수로 활동하시던 시절의 모습. 왼쪽에서 세번째가 우리 어머니이다.
어머니께서 선수로 활동하시던 시절의 모습. 왼쪽에서 세번째가 우리 어머니이다. ⓒ 김귀현
항상 건강하시던 어머니가 변한 건 올 초부터였다. 운동을 하고 돌아오시면 항상 무릎이 쑤신다는 것이었다. 난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고, 어머니도 괜찮다고 운동을 계속하셨다.

그러나 어느날, 난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 술을 한잔하고 새벽이 다되어 집에 들어가게 되었다. 새벽 3시가 되어 누가 깰까 조심스레 집에 들어가니, 어디서 끙끙 않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 신음 소리는 바로 어머니께서 내는 소리였다. 어머니께서는 무릎을 부여잡고 고통을 참고 계셨다.

"엄마, 왜 그래요. 많이 아파?"
"아니야, 걱정하지마. 괜찮아. 그냥 밤만 되면 좀 쑤셔서 그래."
"심각한 거 아니야?"
"아니야, 괜찮데두."


어머니는 괜찮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괜찮다", "괜찮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이 말밖에 못하는 사람인가 보다. 이후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어머니께서는 몇 달 전부터 심한 통증에 밤잠을 설치셨다고 한다.

며칠 후 어머니는 결국 걷지 못할 정도가 되었고, 병원에서는 이미 연골이 닳을 대로 닳아 거의 없는 상태란 진단을 내렸다. 이유는 과도한 운동 때문이었다. 수술을 해도 연골의 재생은 불가능하고, 단지 고통을 조금 줄여주는 '뼛조각 제거 수술만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나를 비롯한 가족들은 억장이 무너지는 듯하였지만, 어머니는 이 말만 되뇌셨다.

"괜찮아, 걱정하지마."

어머니께서 수술하기 위해 병원에 입원해 계신 동안 방학이라 시간이 많았던 내가 어머니 간호를 맡게 되었다. 거동을 못하시는 어머니가 가장 힘들어하는 것은 바로 용변을 보는 것이었다. 가벼운 것은 간호사가 해결해 주었지만, 그렇지 않은 것은 어쩔 수 없이 움직여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때가 오고 말았다.

나는 어찌할 줄 몰라 일단 어머니를 업었다. 그리고 한 발짝, 한 발짝 내딛었다. 어머니는 한 걸음씩 갈 때마다 이 말을 되풀이 하셨다.

이제 어머니는 목발이 없으면 걷기조차 힘들다. 운동을 좋아하셨던 어머니에겐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다.
이제 어머니는 목발이 없으면 걷기조차 힘들다. 운동을 좋아하셨던 어머니에겐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다. ⓒ 김귀현
"미안해 아들…, 미안해 아들…."

우스개 삼아
- 이시카와 다꾸보꾸(1886-1912)

우스개 삼아 엄마를 업었으나
그 너무 가벼움에 눈물겨워
세 발짝도 못 걸었네.


일본 시인인 이시카와 다꾸보꾸는 어머니의 가벼움에 눈물 겨웠지만, 난 너무 무거움에 눈물겨웠다. 내가 짊어지고 가야할 세상의 모든 짐을 짊어지신 어머니. 그래서 난 어머니가 너무 무거웠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결국 세 발짝도 못 가 걸음을 멈추었다.

"엄마가 많이 무겁지. 우리 아들 고생시켜서 어쩌지."
"아니야…, 우리 엄마 완전 가볍네."


"엄마 가볍다"는 이 말을 하는데, 목이 메 말끝이 흐려졌다. 그리고 다시 성큼성큼 걸어갔다. 어머니를 화장실까지 모셔 드리고, 나올 때까지 기다린 후 세수도 시켜 드리고, 이도 닦아 드렸다.

업고, 세수시키고, 이 닦아주고…, 어머니는 평생 날 위해 이렇게 하셨지만, 난 처음이다. 처음으로 어머니를 업었고, 세수와 양치질을 시켜 드렸다.

나는 어머니에게 업혔던 여섯 살 때를 영원히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어머니를 처음 업은 이날 또한 잊을 수 없다. 어머니의 등에서 느꼈던 따스한 체온을 이제 어머니의 가슴에서 느끼고 싶다. 이제 난 종종 어머니를 업고 다닐 것이다.

어머니가 수술하는 날에는 인턴 활동을 하고 있어서 병원에 찾아가지 못하였다. 수술이 언제 끝나는지도 모르고 바쁘게 일하는데 어머니가 보낸 문자메시지가 도착했다.

'엄마 수술 잘했어. 걱정 말고 아들 일 열심히 하렴. 염려 끼쳐 미안해 아들.'

아픈 것조차 자식들에게 미안해 하는 우리네 어머니를 생각하며, 난 다시 목이 메 왔다. 그 좋아하시던 운동을 다시는 못하게 되어 마음이 너무나 아플 어머니. 걷는 것조차 목발에 의지해야 하는 우리 어머니를 생각하며 난 이 말을 가슴속으로 되뇌었다.

"이제 짊어지고 계신 제 인생의 짐, 모두 내려 놓으세요. 어머니, 이제 제가 어머니의 연골이 되어 드릴게요."

덧붙이는 글 | 김귀현 기자는 <오마이뉴스> 인턴기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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