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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주가 머무는 운중각(雲中閣)은 운중보 내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그 주위 사방에 네 개의 전각을 지어 놓았는데 고래부터 사방을 지킨다는 신수(神獸)의 이름을 붙였다. 청룡각(靑龍閣), 백호각(白虎閣), 주작각(朱雀閣), 현무각(玄武閣)이 그것인데, 네 전각은 보주를 호위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극히 귀한 손님을 묵게 하는 곳이기도 했다.

극히 귀한 손님이란 육파일방의 장문인(掌門人) 정도나 보주의 절친한 친구정도여서 사실 사신각(四神閣)에 머물 수 있는 인물은 손가락에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헌데 아무리 중원에서 괴짜로 소문났다고는 하나 풍철한 정도의 인물을 사신각 중 서쪽에 위치한 현무각(玄武閣)으로 안내한 것은 정말 의외라 아니할 수 없었다.

'기이한 일이다. 아무리 광검이라 해도 백양각(白楊閣) 정도라면 몰라도 현무각이라니….'

백양각(白楊閣)이라 해도 풍철한 정도의 인물로서는 과분한 편이었다. 한 문파나 세가의 주인 정도의 인물들을 모시는 곳이 백양각이기 때문이었다. 점점 알 수 없는 일 투성이였다. 설중행은 내색하지 않고 풍철한을 따라 현무각으로 들어섰다. 입구에는 시비로 보이는 여자 두 명이 서 있다가 일행에게 공손하게 절을 올렸다. 아마 현무각에 딸린 시비인 모양이었다.

"소앵(小櫻), 소연(小蓮)이 귀빈을 모시옵니다."

이층으로 되어있는 현무각은 운중보 대부분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아주 좋은 곳이었다. 풍철한은 무슨 생각인지 들어오자마자 곧바로 이층으로 올라가려고 했다. 아마 한눈에 내려다보기엔 확실히 이층이 좋을 터였다. 하지만 모가두가 말렸다.

"이층에는 이미 손님이 계시오. 불편하시더라도 일층을 사용하시길…."
"손님…?"

풍철한이 불쾌한 듯 뇌까리자 모가두가 귀찮은 듯 대답했다.

"함곡 선생과 그 여동생이오."

그 말에 풍철한이 복잡한 기색을 떠올렸다. 의혹스런 기색이 떠오르더니 약간 당황한 기색이 겹쳤다. 하지만 결국 그의 표정에 남아있는 것은 짜증스런 모습이었다.

"함곡… 그 재수 없는 자식이… 이곳에 있어? 더구나 같은 전각에 묵어야 한단 말이야?"

이미 알고 있는 사이였을까? 당황스럽고 신경질적인 표정이 역력했다. 그의 표정을 살핀 모가두가 몸을 돌리며 말을 툭 던졌다.

"재수가 있건 없건… 그 분들도 풍대협과 마찬가지로 보주께서 모신 분이오. 뷸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해주시면 고맙겠소."

풍철한이 혹시나 분란이라도 일으킬까봐 미리 부탁을 하는 것 같았다. 풍철한은 입술을 비틀며 씁쓸한 고소를 머금었다. 느낌이 별로 좋지 않았다. 모가두는 풍철한이 무어라 하기 전에 먼저 말을 이었다.

"아마 보주께서는 오후에나 풍대협을 부르실 거외다. 그 때까지는 편히 쉬시길…."

그는 정중하게 포권을 취하고는 힐끗 설중행을 바라보더니 현무각을 떠났다. 운중보에 들어 온 첫날 오시(午時) 초였다.


11.
"저 자는 왜 부른 거야?"

운중보에 도착하자마자 한시진이 넘도록 어딘가 다녀온 신태감이 들어오면서 물은 말이었다. 아마 운중보주와 만나고 온 것 같았다. 부교에서 실랑이를 벌이던 그 자를 말하는 것이었는데 이 자는 배정된 방에 그냥 처박혀 있지 않고 신기한 듯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있어 들어오다가 본 모양이었다.

"예? 부른 거라니요?"

서교민은 신태감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한 듯 어리둥절한 표정을 띄웠다. 그것을 본 신태감이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부른 게 아니라면 저 자가 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게야? 요사이 자네가 맡은 비영조(秘影組)는 할 일이 그렇게도 없어? 조장이 조원들을 다 두고 여기는 왜 온 거냐구?"

그 말에 서당두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답답했다. 도대체 이 작자는 자신을 놀리는 것일까? 아니면 이레 전 자신에게 내린 명령을 아예 새카맣게 잊어버리고 있는 것인가? 서교민으로서는 미칠 노릇이었다.

"태감께서 혹시 잊으신 것은 아닌지…?"

그래도 서교민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공무에 바빠서 명령을 내린 것도 잊어먹었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아래 사람이 대들었다간 작살날 것이 뻔했다. '너무 바빠서 잊어버렸네. 근데 이 자식아 왜 대들어?' 한다면 아래 사람으로서는 할 말도 없고, 본전도 못 찾는 꼴이다. 조심스럽게 말을 했는데도 벌써 그런 조짐이 보였다.

"내가 잊긴 뭘 잊어?"

이 불알도 없는 놈은 정말 새카맣게 잊은 모양이었다. 어쩔 수없이 그는 차근차근 말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레 전 비급(秘級) 종지(從旨)를 주시지 않았습니까? 비영조 전체를 움직이라고…."

신태감의 눈초리가 치켜 올라갔다. 서교민이 예상했던 표정이 아니었다. 정말 모른다는 의미였고,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무슨 말이야? 내가 언제 자네에게 그런 종지를 내렸어?"
"예…? 잊으셨습니까?"
"잊다니 뭔 소리야? 자세히 말해봐."

신태감의 목소리가 갑자기 나직해졌다. 그것은 일종의 위험신호였다. 심각한 일이 있으면 신태감의 목소리는 오히려 나직해지고, 진짜로 화가 났을 때는 더욱 가라앉는다. 서교민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신태감의 표정으로 보아 정말 모른다는 표정이었다. 그렇다면 엿새 전 받은 비급 종지는 무엇인가?

"속하는…."

서교민이 당황하기 시작하자 신태감은 얼굴을 싸늘하게 굳혔다.

"차근차근 하나도 빼놓지 말고 말해."
"엿새 전 비(秘) 자가 새겨진 첩지가 전과 다름없이 그곳에 놓여져 있었습니다. 내용은 운중보로 향하고 있는 혈간(血竿) 옥청천(玉淸天)을 무슨 일이 있더라도 살해하라는 것이었고, 상대가 상대이니 만큼 비영조 전체를 움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서교민의 말에 신태감은 입을 쩍 벌렸다. 이건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소린가?

"말도 안 되는 소리! 더구나 옥청천을…?"

혈간(血竿) 옥청천(玉淸天). 철기문의 현 문주인 옥청문(玉淸雯)의 형으로 철기문 최고의 고수. 운중보주와 친구로 소문파인 철기문을 일으켜 지역의 패자로 군림케 한 인물이다. 가정을 갖지 않고 동생에게 문주 위를 잇도록 종용한 인물로 명리에 연연하지 않는 반면에 손속은 잔혹할 정도로 용서가 없는 인물이었다.

“종지의 겉봉에 있는 착자(戳子:인장,印章)는 확실했고, 필체 역시 다름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최종 확인을 위해 사용하는 음호 역시 정확했습니다.”

문제가 발생했다. 태도로 보아 신태감이 잊은 것이 아니었다. 서교민은 가슴에 차가운 냉기가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잘못된 명령이었던 것일까? 그는 창백하게 얼굴이 변해 가는 신태감을 보며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

신태감의 눈에 당황한 빛이 역력했다. 그런 명령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은 분명 그런 종지를 내린 바 없었고, 자신이 모시는 어른 역시 그런 명령을 내릴 수 없는 일이었다. 혹여 내린다 하더라도 자신과 상의했을 것이고, 자신을 통해 명령을 내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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