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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사지 전경
감은사지 전경 ⓒ 김성후
제가 좋아하는 답사의 상상은 감은사지와 대왕암에 관한 것입니다. 감은사는 삼국통일을 완성한 신라 문무왕의 은혜에 감사드리기 위해 건립된 절이라고 합니다. 문무왕은 동해로 침입하는 왜(倭)를 막기 위해 자신이 죽은 뒤 동해의 용왕이 되기로 합니다. 그래서 동해 감포 앞바다에 수중 무덤을 만들었는데 우리는 대왕암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이곳에 얽힌 지리적인 사실과 이야기 그리고 대왕암이 가진 역사를 바탕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볼까 합니다.

감은사와 대왕암이 있는 곳은 토함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대종천이 동해바다와 합류하는 곳입니다. 우리는 지금 대종천의 모습이 아니라 당시 대종천의 모습을 그려봐야 합니다. 감은사 바로 앞에 배를 댈 수 있는 선착장 흔적이 있습니다.

감은사지 선착장 흔적
감은사지 선착장 흔적 ⓒ 김성후
이에 비추어볼 때 지금 논밭까지 포함하는 아주 넓은 곳에 대종천의 강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대종천이 지금보다 훨씬 넓었다고 추정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고려시대 몽고군이 침입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몽고군이 황룡사의 대종을 바로 이 대종천을 따라 싣고 가다 빠뜨렸기 때문에 이 하천을 대종천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물론 그렇게 큰 종을 싣고 내려가려면 당연히 하천의 폭이나 깊이가 지금보다는 훨씬 넓고 깊었다고 추측할 수 있을 겁니다.

지리적인 요건을 볼 때 이곳이야말로 왜(倭, 지금의 일본)가 신라의 수도인 경주를 공격하는 가장 유리한 방법은 동해까지 배를 타고 와서 대종천을 거슬러 계속 토함산 쪽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확실히 알아야 할 점은 당시의 왜는 엄연한 국가로서 정규군대를 보내 신라를 공격한 것이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노략질을 일삼는 왜구(倭寇)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왜가 신라를 공격하는 이유는 자신들에게 앞선 문화를 전해주고 자신들의 천황과 친하게 지내며 동맹관계에 있던 백제의 멸망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왜를 막아내려면 동해와 대종천이 만나는 이곳에 군대를 주둔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당시의 통치자라면 삼국을 통일한 막강한 국력을 가진 신라가 왜에 겁을 먹어 여기에 대규모 군대를 주둔시킨다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뭔가 다른 구실을 만들어 군대를 주둔시키면 좋을 것이라고 고민하던 중 아주 기발한 발상을 하게 됩니다.

바로 문무왕의 무덤을 동해 바다에 만드는 것이죠. 그것도 문무왕의 유언 형식을 빌어서 말입니다. 그래서 하는 이야기입니다만 과연 대왕암에 문무왕의 시신이 안치되었을까 아닐까 하는 문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봅니다. 실제 시신이 있든 없든 아주 거창하고 화려하게 장례식을 치르고 난 뒤 군대를 주둔시켰을 겁니다. 왜를 방어하기 위한 목적의 군대가 아니라 왕의 무덤을 지키기 위한 목적의 군대라는 이름으로 말입니다.

문무왕의 뒤를 이은 신문왕은 돌아가신 선왕 즉, 대왕암을 무덤으로 삼은 문무왕의 은혜야말로 너무나 크고 감사하기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인근에 부왕의 명복을 빌어주는 감은사라는 절을 짓고 그곳에도 군대를 주둔하게 했을 겁니다. 앞서 말한 감은사 아래 선착장은 바로 군사들이 드나들던 곳이 아니었을까요?

이만큼만 상상하고 마무리하자면 뭔가 허전한 기분이 듭니다. 그래서 당시 이곳과 관련된 이견대(利見臺)와 만파식적(萬波息笛)의 이야기를 더하여 상상을 추가합니다. 이견대에 관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고 그 위치를 볼 때 동해 바다가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자리 잡습니다. 당연히 왜가 쳐들어오나 감시를 하는 곳이 되겠죠.

그리고 동해바다에서 건져 올린 대나무로 만든 피리인 만파식적이 울면 외적이 물러간다는 하나의 이야기 뒤에 감추어진 부분이 없나 싶어 이렇게 당시 상황을 재해석해 봤습니다.

이견대에서 동해바다를 살피던 군사들이 왜의 침입을 알리는 신호를 보냅니다. 그러자 감은사와 인근에 주둔하던 모든 군대가 전투 준비를 하기 시작합니다. 한편 경주에도 왜의 침입이 있으니 경계를 철저히 하고 전투 준비를 하라는 신호를 보냅니다. 저는 그 신호의 마지막이 경주에 있던 만파식적이 울리는 것이라 추측합니다.

감포 앞바다에서 치열한 전투가 펼쳐지고 왜는 패배하여 물러가고 없습니다. 왜가 물러간 사실이 다시 경주에 전해질 때는 하루 정도의 시간이 흐른 다음이 될 것입니다. 경주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감포 앞바다에서 펼쳐진 치열한 전투는 모르고 있습니다. 다만 이들이 알 수 있던 것은 외적이 침입하여 만파식적이 울었다는 것과 외적이 물러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파식적이 울면 외적이 저절로 물러간다는 이야기로 만들어지지 않았나 하는 것입니다.

이제까지의 이야기는 역사적인 검증이 불가능한 제 개인적인 상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동안의 자료와 현장의 흔적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그 당시에 사건이 이렇게 펼쳐졌을 가능성은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답사 공부의 마지막은 상상이며 그 상상의 객관화를 위해 또다시 공부를 하는 것이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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