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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구상나무 군락입니다. 잎 모양이 전나무나 가문비나무와 비슷한 침엽수인 구상나무는 지구상에서 오로지 한국, 그것도 한라산을 중심으로 지리산과 덕유산에서만 자생하는 특산종입니다. 특히 한라산에는 1500m 고지를 중심으로 800여만 평에 이르는 구상나무 군락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 한라산의 명물 구상나무 군락
ⓒ 박정민
빼어난 수관과 특이한 열매 모양(솔방울 같은 것이 하늘을 향해 위로 달립니다)을 자랑하는 구상나무는 최근 들어 최고급 조경수로도 각광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한국뿐 아니라 유럽으로도 전파되어 매우 높은 인기를 얻고 있다는 자랑스러운 나무지요.

생태산행이라는 것은 이런 식입니다. 아마도 대부분의 한라산 등반객들은 구상나무를 알아보기는커녕 그런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채 정상을 향해 행군하듯 오른 후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야호"를 외치고(몽골의 군호에서 유래된 것이라지요), 도시락을 먹은 후 다시 행군하듯 내려올 것입니다. 산에 왔으니 당연히 나무와 풀이 있었을 뿐 그것은 그저 나무들, 풀들 이상은 되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네들에게도 버젓이 이름이 있고, 개성이 있으며, 자기들끼리 살아가는 질서가 있습니다. 그중에는 구상나무처럼 세계에 자랑할 만한 것도 있고, 여기가 아니면 구경하기도 어려운 희귀종도 있었을 것입니다. 서로 관계 맺으며 살아가는 모습이 사람이 사는 사회 못지않아 종종 감탄을 자아내기도 합니다.

▲ 산호랑나비의 애벌레. 나비 애벌레 중에서도 가장 화려한 외모를 자랑합니다. 나비 애벌레는 종류에 따라 먹이로 삼는 식물이 다 다른데, 산호랑나비 애벌레는 미나리과 식물을 좋아합니다.
ⓒ 박정민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생태기행에서만큼 절실하기도 어려울 듯합니다. 나무, 꽃, 새를 더도 말고 10가지씩만 알고 나서 여행지에 찾아가도, 자연이란 온갖 생명으로 가득 들어차 빈틈이 없는 그물망임을 새삼 절감하게 됩니다. 체험을 통해 이를 한번 느끼고 나면 산행의 목적과 방식도 이전과 달라질 수밖에 없겠지요.

고산초원에 감동하다

▲ 영실 코스의 고산초원
ⓒ 박정민
어느 순간엔가 갑자기 구상나무 군락의 끝이 드러납니다. 마치 일부러 조경을 해놓은 것 같은 변모에 어리둥절한 등반객의 앞에는 이미 드넓은 고산초원이 펼쳐집니다. 이제부터 1시간이 넘도록 마냥 이어지는 고산초원은 한라산이 아니면 어디에서도 보기 어려운 또 다른 장관입니다.

생태계 보호를 위해 목재 등반로가 조성되어있기 때문에 풀꽃을 밟을까 흙이 파일까 미안한 마음도 덜 수 있습니다. (이곳뿐 아니라 한라산의 등반로 전체는 나무와 돌 등으로 상당히 잘 정비되어 있는 편입니다.)

백록담 남서쪽 일대에 형성된 고산초원이야말로 한라산의 유달리 풍부한 식물상을 일궈낸 일등공신이라고 하지요. 그림처럼 펼쳐진 경관의 아름다움이야 말할 것도 없고, 다른 곳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야생화와 나무들이 즐비하게 들어차 있는 보물정원이기도 한 곳입니다. 하지만 희귀식물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고 아쉬워할 까닭은 없습니다. 9월의 한라산 고산초원은 누가 봐도 탄성을 내어놓을 정도로 야생화 동산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많이 보이는 것은 곰취, 바늘엉겅퀴, 눈개쑥부쟁이들입니다. 이 녀석들은 아예 곳곳에 꽃밭을 차려놓고 있습니다. 사이사이로 미역취며 범꼬리, 나비나물, 산박하, 오이풀, 진범…. 출석을 부르려니 끝도 없습니다. 역시 고산지대에나 와야 볼 수 있는 눈향나무도 즐비합니다. (바람을 피해) 낮게 누워서 자라는 향나무라는 뜻의 이름입니다. 하나의 종으로 굳어졌기 때문에 낮고 바람 없는 곳에 옮겨놓아도 곧게 자라지 않습니다.

▲ 바늘엉겅퀴. 역시 한라산 특산종으로, 보통의 엉겅퀴에 비해 유난히 바늘이 많이 돋아있습니다.
ⓒ 박정민
▲ 다른 데서는 구경하기도 힘든 바늘엉겅퀴가 한라산 고산초원에서는 여기저기 군락을 이루고 있습니다.
ⓒ 박정민
중요한 사실은 이처럼 풍부한 식물상이 거저 얻어진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과거 신산한 역사와 무분별한 난개발 및 행락대열로 인해 심각한 피해를 보았던 한라산은 1994년부터 막대한 예산을 들여 꾸준한 복원작업을 벌여왔습니다.

자연휴식년제를 도입하여 일부 구간의 출입을 제한했고, 헬기까지 동원해 파여 나간 흙을 보충했습니다. 지금도 등산로 주변으로 흙자루를 깔아놓은 것이 눈에 띕니다. 이런 노력의 결과 의미 있는 복원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이 잊혀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 고산초원 지대에 깔아놓은 흙자루. 쓸려나간 흙을 보충하고 더 이상의 토사유출을 방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 박정민
이윽고 태양전지판으로 지붕을 덮은 윗세오름 대피소가 보입니다. 해발 1743m로 기록되어있군요. 윗세오름이라는 이름은 '위에 있는 세 오름(기생화산)'이라는 뜻이라고 하지요. 유인대피소라서 컵라면과 음료도 팔고 있습니다.

등반로 옆으로 계속 이어져 나있던 '쇠막대기'의 비밀도 이곳에 와서야 풀립니다. 이곳 대피소까지 물건을 나르기 위한 모노레일 시설이라고 합니다. 등반로를 따라 최소한의 시설로만 놓여있으니 별문제 없을 것이라고, 잘 관리되고 있을 것이라고 믿어봅니다.

▲ 눈개쑥부쟁이. 역시 한라에서나 만날 수 있습니다. 눈향나무와 마찬가지로 누워서 자란다는 뜻의 이름입니다.
ⓒ 박정민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3편으로 이어집니다. 이 기사는 '유포터'에도 송고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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