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그녀가 자신의 처소로 돌아오다 말고 자신과 십여 년 동안 관계를 맺고 있는 그 여인에게 들러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사실 습관 때문이었다. 그 짐승 같은 작자에게 시달리고 난 뒤에 들르는 그녀의 방에는 항상 따뜻한 목욕물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녀는 그곳에서 그 작자의 체취를 살가죽이 벗겨지도록 닦아내고 그녀와 또 다른 쾌락을 추구했던 것이다.
헌데 자신이 찾은 그녀의 방안에서는 기이한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조금 전 자신이 질렀던 것과 같은 쾌락에 찬 신음이 간간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신음의 주인공은 자신과 십여 년 동안 살을 비벼 왔던 바로 그 여인이었다. 그리고 간간이 들리는 사내의 신음과 목소리에 그 사내가 누구인지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알 수 없는 배신감에 몸을 떨었다. 자신 역시 다른 사내와 살을 섞었다는 처지인 것을 망각한 채 그녀의 눈에는 살기가 떠올랐다.
'더러운 계집…. 추잡한 놈…!'
그리고는 그녀는 미소를 머금었다. 어차피 그 사내아이가 온 이상 저 여인은 거추장스런 존재일 뿐이었고, 잘못하여 저 여인의 존재가 알려지면 그 사내아이가 실망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녀는 어찌할까 망설였다. 그리고는 좀 더 지켜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른한 몸을 어둠 속에 묻었다.
"………!"
그 순간 그녀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자신만이 알고 있는 통로. 다른 사람의 이목을 피해 그녀의 방으로 들어갈 수 있는 조그만 공간에는 이미 다른 사람이 있었고, 그 사내는 자신을 향해 웃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올 줄을 알고 있었다는 듯 그녀와는 달리 느긋하게 웃고 있었다. 그녀는 상대가 누구라고 아는 순간 몸이 굳어 드는 것을 느꼈다. 저자가 여기는 왜 왔을까? 그리고 여기는 어떻게 알고 있을까?
하지만 그녀 역시 한순간의 당황함을 감추고 매혹적인 미소를 베어 물었다. 다시 돌아나가거나 그자에게 다가가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다. 그저 상대가 자신을 보고 있듯 자신도 그를 보고 있었다.
29
"자네는 밖에서 대기하고 있게."
경후는 능효봉을 바라보면서 하종오에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자리에 앉게."
경후가 들어서자 탁자에 앉아있던 하종오와 능효봉이 엉거주춤 일어섰던 모양이었다. 하종오가 나가는 것을 보고는 하종오가 앉았던 의자에 걸치며 말했다.
"………!"
능효봉은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왜 자신을 부른 것인지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그렇다면 그것에 대한 대비도 되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경후는 이미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고 있었다. 동창에서 시키지도 않은 일을 그들이 수행했고, 그것은 그들 모두가 죽어야 하는 일이었다. 헌데 이 자는 살아서 돌아왔고 나타나지 말아야 할 곳에 와 있었다.
"왜 죽였나?"
그 이유는 한가지였다. 자신들을 죽음의 구렁텅이에 빠뜨린 서교민을 죽이러 나타난 것이다. 이럴 때는 상대가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고 몰아가는 것이 의외의 소득을 얻을 수 있었다. 자신의 의도가 먹혀들어갔는지 능효봉의 입가에 매달린 미소가 사라졌다.
"첩형께서 내리신 종지(從旨)였소?"
"나까지 죽이겠다는 말로 들리는군."
"하지 못할 것도 없소."
"그것 때문에 죽인 건가?"
"나는 죽이지 않았소."
능효봉이 다시 느긋한 미소를 베어 물었다.
"홍교란 시녀는 분명 그 아이가 서당두의 방을 나온 후에 자네를 불렀다고 하던데…."
"그 때문에 저녁도 제대로 먹지 못했소."
경후의 얼굴에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기분 나쁘게 만드는 비웃음이 걸렸다.
"자네는 서당두 방에서 그 명령이 잘못된 것이었고 자신의 잘못이 아니었다…. 뭐 그런 변명을 들었겠군."
능효봉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경후의 날카로운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였다.
"듣지 못했소."
"왜?"
"그가 죽어 있었기 때문이었소."
그 대답에 경후는 의외라는 듯 말을 하는 능효봉의 얼굴 변화를 자세히 살피고 있었다. 취조와 신문에 능한 경후로서도 이상한 기미는 감지할 수 없었다. 능효봉이 얼굴을 굳혔다.
"그 종지는 잘못된 것이었소?"
능효봉의 눈에 살기가 감돌고 있었다. 방안의 공기가 싸늘하게 변하고 있었다. 이미 능효봉의 무공 수위가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는 경후로서는 그를 자극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내부인으로서는 유일하게 흉수가 될 가능성이 컸지만 아직 확인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네. 그 종지(從旨)는 가짜였네. 하지만 서당두가 속을 정도였으니 누구라도 속지 않을 수 없었겠지."
"그렇다면……. 우리는…?"
능효봉은 허탈하면서도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가짜 종지에 의해 죽임을 당해야 하는 함정에 뛰어들었던 것이오?"
"결국 그렇게 된 것이지."
"당신네들은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적으로 좋았겠군."
"무슨 말인가?"
경후가 지었던 비웃음이 이제는 능효봉의 입가에 걸리고 있었다.
"어차피 우리 조직의 입을 막으려고 생각하고 있지 않았소? 이제는 필요가 없어진 조직. 하지만 외부로 알려지면 매우 곤란한 조직. 아무리 말을 하지 않겠다고 약조를 했다지만 열여덟 명 중에 누구라도 입을 열면 동창의 치부가 드러나게 되니 말이오."
"자네가 오해 할만 하군."
경후의 말에 능효봉의 짙은 검미가 치켜 올라갔다.
"오해…? 웃기는군. 실상이 그러지 않았소? 이번 일이 가짜 종지에 의한 것이었다고? 그것까지 거짓말을 하려 하오? 차라리 모두 죽이려 했다고 솔직해져 보면 어떻소?"
오해의 소지는 분명했다. 이미 비영조는 불필요한 존재였다. 그렇다고 해체한다면 어찌될까? 열여덟 명의 입을 무엇으로 막을 수 있었을까? 그러던 중에 불가능한 일, 완벽한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는 곳으로 명령을 내리면 그들은 죽을 게 뻔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골칫덩이들을 처리하게 되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추석연휴 잘 보내셨습니까? 긴 연휴기간 동안 지친 심신을 재충전하셨기를 바랍니다. 저 역시 잘 쉬었습니다. 연휴 기간 동안 연재를 기다리셨던 독자 분들께 한편으로 죄송스런 마음과 함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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