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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약과 비료로 잘 익은 배추
ⓒ 정판수
오늘(9일) 아침 연못에 물을 주고 돌아서 나오다 무심코 배추밭을 둘러보고는 깜짝 놀랐다. 배추가 너무 알차게 영글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그동안 밭에 심은 남새는 아내에게 모두 맡겨둔 터라 씨를 뿌리고 난 뒤 거의 둘러보지 않았다.

한 달 전쯤에 싹이 튼 것과 얼마 전에 잎이 조금 봉긋한 모습만 기억 속에 남아 있었는데…. 갈맷빛을 자랑하며 이제 곧 짚으로 묶일 일만 남았을 정도로 성숙한 배추는 내게 크나큰 충격이었다. 더욱 더 충격적인 건 배춧잎의 싱싱함이었다.

문득 작년의 일이 떠올랐다. 시골살이 첫해에 엄청난 기대(?)를 갖고 남새밭 가꾸기에 달려들었다. 그러나, 처음 시도한 배추심기부터 벽에 부딪혔다. 약을 치지 않으면 벌레가 먹고, 비료 주지 않으면 자라지 않는다는 어른들 말이 바로 현실로 나타났기 때문.

심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달려든 벌레에 잎은 다 먹히고 앙상한 뼈(식물의 잎에 그어진 가는 줄무늬를 뭐라 하는지)만 남은 모습들. 그 때문에 아내와 다투기까지 했다. 정말 먹을 게 거의 없었다.

생각나는 바 있어 아내를 불렀다. 역시 예측대로였다. 약을 치고 비료를 줬다는 것. 내가 언성을 높이려는데 아내가 먼저 선수를 쳤다. '약과 비료는 씨뿌리기 전에 딱 한 번 쳤다'고. 아무래도 믿을 수 없어 다시 눈을 치뜨려는데, '정말 딱 한 번뿐이었다'는 걸 강조하는 게 아닌가.

그리고 올해 고추농사를 상기시켰다. 새 땅엔 병충해가 잘 달려들지 않는다는 말을 믿고 80포기를 심었다. 심을 땐 우리가 필요로 하는 고추는 우리 손으로 마련하자는 게 희망사항이었다. 그런데 심자마자 들이닥친 병으로 하여 풋고추도 제대로 따먹지 못하고 붉은 고추는 고작 두 근만 얻었다. 다 약을 치지 않았기에 나온 결과라는 게 아내의 주장이었다.

어쩌면 아내의 말이 맞는지 모른다. 감기에 거의 걸리지 않는 이가 약을 지어먹으면 금방 효과가 나타나는 것처럼 농약과 비료를 한 번도 맛보지 않은 땅이 그 맛을 보자 바로 효과를 드러낼 수 있다는 것. 그러나 이 주장이 맞아도 문제는 다음에 약을 칠 때는 그 이상 치지 않으면 효과가 없다는 것. 비료도 마찬가지다.

사실 그동안 우리 밭에는 동네의 벌레란 벌레는 다 몰려왔다. 약과 비료를 한 번도 치지 않다보니 피신처를 찾아 우리집으로 녀석들이 몰려들었다. 그 덕분에 요즘도 밤에는 반딧불이 나는 모습이 예사로 보인다. 그런데 이제는 달라질 것이다. 벌레들에게 위험지역으로 낙인 찍혔을 테니까.

작년 나희덕의 '배추의 마음'이란 시를 가르치며, "늦가을 배추포기 묶어주며 보니 / 그래도 튼실하게 자라 속이 꽤 찼다 / - 혹시 배추벌레 한 마리 / 이 속에 갇혀 나오지 못하면 어떡하지? / 꼭 동여매지도 못하는 사람 마음이나…"란 시구에 반해 올해 만약 배추를 심으면 반드시 짚으로 묶을 때 꼭 동여매지 않으려 했는데…. 이제 꼭 동여매도 괜찮게 됐다. 어차피 약 때문에 벌레 한 마리 들어오지 못할 테니 말이다.

올 겨울, 무슨 일이 있더라도 유기농법을 배워야겠다. 그래서 적어도 우리 마을에서 우리 집만이라도 벌레들이 날아오는 곳으로 만들어야겠다. 아니 이보다 내가 약 치고 비료 주며 큰 남새에 반해 또 타협할까 겁이 나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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