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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 세종서적
아이들아, 지금 너희들은 꿈은 무엇이니? 꿈에 젖어 그 열망에 두 눈이 다 아프도록 밤을 지새워도 모자랄 ‘청소년기’를 지나가고 있는 너희들은 지금 어떤 자리에서 어떤 꿈을 향해 ‘내 삶의 지도’를 그려 가고 있는 중이니? 가끔은 이런 나의 질문에 너희들은 이렇게 차가운 대답을 내려놓기도 하더구나.

“저는 꿈을 갖는 게 꿈인데요!”

아침도 거르고 지각할까 두려워 전전긍긍해야 하는 너희들의 등굣길에 너희들이 바라보는 것은 푸른 하늘이 아니라 마른 먼지 날리는 땅바닥이더구나! 학교에서조차 옆에 있는 친구를 믿지 못하고 책과 문제집, 노트에 경쟁하듯 조금 더 굵은 글씨로 주인임을 알리는 협박문을 아득바득 적어 넣기 바쁘지. 우정이란 것은 대학가서 만들어도 충분하다는 어른들의 이야기를 못이 박히도록 들으면서 말이야.

정규 수업시간이 끝나도 여전히 그치지 않는 보충수업과 야간 자율학습에 붙들려 철창이 있든 없든 자유를 빼앗긴 신세가 되어 가끔씩 한숨 섞인 듯 창문 너머의 세상을 안타깝게 바라보겠지.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쏟아지는 졸음을 커피 몇 잔과 싸우면서.

하고 싶은 게 끝도 없이 많을 나이의 너희들에게 어째서 세상은 이토록 매정하기만 한 것일까? 친구를 향해 웃어주고 싶고, 정말 좋아하는 것에 매진하고도 싶고, 서툴겠지만 사랑이 무엇인지도 알고 싶은 너희들에게 주어진 것은 온통 ‘하지 마라!’는 통제와 규제뿐인 것만 같구나! 방황하는 것조차 마음대로 허용되지 않는 너희들의 현실이 자꾸만 아파오는 가을날이다.

이른 가을날, 아이들이 찾아낸 가을들.
이른 가을날, 아이들이 찾아낸 가을들. ⓒ 국은정
내 삶의 멘토, 좋은 스승과 오래도록 사귀기

누가 그랬지? ‘좋은 스승은 만나기 어렵고, 좋은 스승과 가깝기는 더 어렵고, 좋은 스승과 만남을 오래도록 유지시키는 것은 더 어렵다’고. 나의 학창 시절에도 내게 참 좋은 스승 두 분이 계셨단다. 고3인데도 마음은 잡지 못하고 오로지 학교 밖으로 빠져나갈 궁리만 하는 나에게 ‘문학’이라는 꿈을 실현시켜 주신 분들!

한 분은 문학 선생님이셨지. 내가 유일하게 글쓰기에 대한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담당이 아닌 자율 학습 시간에 찾아오셔서 교실을 한 바퀴 천천히 둘러보시다가 무심코 내 책상 위에 시집 한 권을 내려놓고 조용히 교실을 빠져나가시는 거야.

학교에서 성적 때문에 점점 더 밀려나기만 하는 불량품 같았던 나를 진정 ‘사람’으로 대해주셨던 고마운 분이란다. 그분의 모습을 보기만 해도 가슴이 따뜻하고 벅차오르지. 내가 그렇게 방황을 하면서도 끝까지 학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도록 사랑과 관심으로 붙들어주셨던 분이니까.

다른 한 분은 국어 선생님이었는데 이분 역시 내가 문학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내가 쓴 글들을 꼼꼼히 읽어주시면서 짧은 한 마디씩 코멘트를 달아주셨어. 가끔 내 얼굴이 못 견디게 우울해 보이면 “너, 00에서 열리는 백일장에 가서 바람이나 쐬고 오거라” 하면서 나의 학교 탈출을 앞장서서 격려해주셨던 조금은 엉뚱(?)하지만 자상한 분이였단다.

사실은 성적으로는 전혀 꿈도 꾸지 못할 나에게 대학에 갈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신 고마운 분들이지. 결국 나는 성적이 아니라 각종 대회에서 수상한 상장을 들고 대학의 문턱을 무사히 넘을 수 있었고, 지금까지 내가 문학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도와주신 너무도 고마운 분들이란다. 내게 만약 이분들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여전히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몰라 여전히 아이처럼 방황하고 있지나 않을까?

그래.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란다. 미치 앨봄이 지은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이라는 책을 읽을 때마다 나는 내게 살아가는 이유를 깨닫게 해주신 그분들 생각에 가슴 저 밑바닥부터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지. 지금 너희들에겐 그런 스승이 있니? 주위를 한번 둘러 보거라. 가까이에서 찾을 수 없다면 내가 마음껏 존경하고 오래도록 사귀어도 나쁘지 않을 선생님 한 분을 추천해주마.

그 선생님은 바로 아까 말한 책에서 나오는 ‘모리’라는 분이야. 그는 지구 반대쪽에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서도 울 줄 아는, 돈과 명예보다 ‘문화’의 힘과, 사랑을 나누는 법이 훨씬 더 소중하다는 것을 몸소 실천해 주는 분이지.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니까 세상엔 없는 그런 사람이 절대 아니란다. 이 이야기는 지은이의 실화 속 선생님을 모델로 해서 그려낸 것이니까.

“내가 그 말들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아니? 이 사람들은 사랑에 너무 굶주려서 그 대용품을받아들이고 있구나. 저들은 물질을 껴안으면서 일종의 포옹 같은 것을 기대하고 있구나. 하지만 그런 식으로 해서 될 리가 있나. 물질은 사랑이나 용서, 다정함, 동료애 같은 것을 대신할 수 없는데….” - 본문 중에서.

어때? 이런 스승이라면 한번 사귀어보고 싶지 않니?

갈라진 벽에서 피어난 애기똥풀, 저렇게 강인한 너희들이 되길 바란다.
갈라진 벽에서 피어난 애기똥풀, 저렇게 강인한 너희들이 되길 바란다. ⓒ 국은정
‘우리의 문화’를 만드는 방법

지금 모리는 이 세상에 없단다. 모리는 ‘루게릭’이라는 불치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지. 세상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도 오로지 제자들에 대한 사랑을 한결 같이 지켜낸 분이야. 사람이 한결 같다는 게 얼마나 힘드니? 하지만 그는 자신의 온몸이 굳어가는 그 순간에도 이웃을 걱정했고, 제자들에게 조금 더 좋은 것을 발견하게 해주려고 노력했단다.

모리가 제자들에게 들려준 여러 가지 좋은 말들 중에서도 내게 가장 깊이 남은 것은 바로 ‘문화’에 대한 이야기란다. ‘문화’라는 말은 언뜻 들으면 아주 애매하고 광대해서 그저 나와는 상관없는 것처럼 느껴질지도 몰라. 내가 너희들 또래에게 ‘문화’에 대해 물으면 너희들은 어떤 줄 아니? 교과서에서 시험보기 위해 밑줄치고 외웠던 부분을 앵무새처럼 똑같이 뱉어내곤 하더구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방식이에요!”라는 불 보듯 뻔한 대답 말이야.

그래, 너희들의 대답이 틀리지 않았어. 하지만 너무 문화를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는 거야. 문화란 그냥 ‘내가 누려서 행복하면’ 되는 거 아닐까? 저 가슴 깊은 곳에서 그것을 향유하면서 느끼는 행복과 충만함! 하지만 너희들은 어떠니? 아주 단편적이고 일시적인 유희에 빠져서 정작 본인이 하는 게임이 자기 삶의 유일한 기쁨이라는 착각을 하고 있잖아.

생각해 보렴. 너희들이 과연 컴퓨터 게임에 한참 빠져 있으면서도 가슴 저 깊은 곳에서의 ‘행복’을 느끼고 있니? 그건 아마도 아닐 거라는 거지. 너희들이 잘 생각해 보렴. 과연 너희들은 너희들만의 문화에 웃을 수 있는 지에 대해서 말야.

죽음을 앞둔 모리는 자신의 제자에게 그런 이야기를 건네준단다.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행복하다고 느낄 때는 바로 ‘문화를 내 이웃과 함께 누릴 때’라고. 문화라는 것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것이고, ‘독점’하기보다는 ‘나눔’을 실천할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라고 말이야. 참 좋은 말이라고 생각해. 요즘 현대인들은 주로 ‘같이’ 하는 것에는 통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여. 소통이 그만큼 어려워진 것이겠지.

사회가 아무리 변했다고는 하지만 그리 오래 되지 않은 우리의 농경사회를 생각해 보렴. 더불어 살면서 얼마나 많은 것들을 공유할 수 있었니! 모리가 들려주는 문화에 대한 강의를 너희들도 꼭 읽어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돈과 명예를 다 가진 ‘미치’가 어째서 다시 ‘모리’라는 스승을 그리워할 수밖에 없었는지 잘 헤아릴 수 있을 거야.

때론 갈대처럼 흔들리기도 하면서 크는 거란다.
때론 갈대처럼 흔들리기도 하면서 크는 거란다. ⓒ 국은정
죽음에게 말 걸기

모든 사람은 죽음을 피할 수 없단다.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는 진시황제 역시 그 엄연한 진리 앞에서 자유롭지 못했지. 너희들은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니? 우리가 이렇게 살아있는 순간에도 우리 주변에서는 누군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우린 너무 잘 알고 있지.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의 죽음’에 대해서는 그렇게 절실하게 생각해 보지 않는 것 같아.

우리도 언젠가는 이 세상을 떠나야 하겠지? 그 생각을 하면 슬퍼질 때도 있단다. 가끔은 죽음이 엄습할까봐 사는 게 온통 어둠으로 보일 때도 있곤 할 거야. 죽음 때문에 사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게 느껴지기도 할 테고. 그런 우리에게 모리는 “어떻게 죽어야 좋을지 배우게.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배우게 되니까.”라고 충고한단다. 너무 간단한 대답 같이 들리기도 하지만 실제로 죽음을 앞두고 있던 모리는 자신의 죽음 앞에서도 놀라울 만큼 덤덤했단다.

왜냐하면 그는 매일 ‘죽는 연습’을 했기 때문이야. 가까운 친구들과 가족들을 불러 놓고 ‘살아있는 장례식’을 치르기도 하면서 죽음이라는 것이 우리의 삶과 그렇게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늘 깨닫고자 한 거지.

이런 모리를 보면서 나는 ‘죽음’보다 오히려 ‘삶’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 보게 된단다. 죽음을 코앞에 둔 사람에겐 수 억 원의 돈보다 얼마나 행복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았는지가 훨씬 더 중요할 테니까 말야. 결국 나를 지탱하게 해주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사랑하는 관계’라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되겠지. 그것을 생각하면 지금 우리는 얼마나 불행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되돌아 반성해 볼 수 있을 거야. 이런 식으로라면 죽음도 결코 아름다울 수 없을 테니까.

우리는 모두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에만 혈안이 되어 있지, ‘어떻게 하면 사랑할 수 있다’에는 지나치게 무관심 한 게 아닐까?

“매일 밤 잠자리에 들 때면 나는 죽는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깨면 나는 다시 태어난다.” - 마하트마 간디

아름다운 방황의 때를 즐겨라

아이들아, 내가 두서없이 많은 말을 했구나! 나 역시 그 시절 많은 방황을 했지. 이렇게 어른이 되고 보니 너희들의 방황이 남의 일 같아 보이질 않아.

누구나 한번씩 살아가면서 겪어야 할 ‘질풍노도’의 시기가 지금 너희들의 발아래 와 있는데도 방황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너희들이 더욱 더 안쓰러워. 어른인 내가 미안하기도 하고.

하지만 2등이면 어떻고 꼴등이면 어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살면서 자신의 인생에서 무엇이 좋고 진실하며 아름다운지 발견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을 위한 방황이라면 얼마든지 오랫동안 방황해도 참 아름다울 시기라고 생각해. 부디 이 책을 읽으면서 너희들의 현재가 지금보단 조금 더 풍성해질 수 있기를 바랄게. 사랑한다, 얘들아!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진정으로 그리워할 스승이 있었는지? 당신이 있는 그대로 귀한 존재로, 닦으면 자랑스럽게 빛날 보석으로 봐준 그런 스승이 있었는지? 혹시 운이 좋아서 그런 스승을 찾아낸다면, 그에게 다시 가는 길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머릿속으로만 그럴 수도 있고, 나처럼 선생님의 침대 곁으로 직접 찾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 본문 중에서

청소년 종합문예지 <미루>에 참여하는 청소년들의 토론장면. 나와 사람들의 생각과 더불어 성장하는 아이들.
청소년 종합문예지 <미루>에 참여하는 청소년들의 토론장면. 나와 사람들의 생각과 더불어 성장하는 아이들. ⓒ 국은정

덧붙이는 글 | <당신의 책,그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응모.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 살아 있는 이들을 위한 열네 번의 인생 수업

미치 앨봄 지음, 공경희 옮김, 살림(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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