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와 한화갑,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을 대표하는 두 사람의 행보가 너무 다르다.
'여의도의 햄릿'이란 김근태 의장은 단호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대북포용정책 재검토를 언급하자 "안 된다"고 했고, PSI 참여에 대해서도 '반대'를 분명히 했다. 현대를 찾아가 금강산 관광사업 지속을 천명했고, 오늘은 개성공단에 간다.
'외교 전문가'로 평가되는 한화갑 대표는 장고를 거듭해왔다. 북한 핵실험 후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과 노무현 대통령의 포용정책은 다르다는 입장만 피력했을 뿐 주 이슈인 양대 경협사업과 PSI에 대해선 말을 아껴왔다.
그러다가 어제, 라이스 미 국무장관이 방한한 어제 "북한을 민족적 차원에서 다룰 상대가 아니라는 게 증명됐다"고 선언했다. 양대 경협사업에 대해서는 '동맹'의 뜻이 중요하다고 했고, PSI참여 확대는 불가피하다고 했다.
공통점이 하나 있다. 김근태 의장은 당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개성행을 결정했고, 한화갑 대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외침을 내치고 '동맹'을 선택했다.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을 내쳤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선택은 도박에 가깝다. 판돈은 정치 생명이다. 정치 도박이 '회춘'으로 귀결될지 '조로'에 빠질지는 알 수 없다. 상황은 여전히 안개속이다.
한국과 미국은 경협사업 지속과 PSI 참여 여부에 대해 합의를 보지 못했다. 평양에서 돌아온 탕자쉬안 중국 국무위원이 어떤 보따리를 풀지도 현재로선 알 수 없다. 북한이 추가 핵실험을 할지도 모른다.
상황을 급반전시킬 요인들이다. 정치 도박에 들어간 두 사람에겐 축포가 될 수도 있고, 지뢰가 될 수도 있다. 궁금한 건 이유다. 두 사람은 왜 정치 도박을 마다하지 않는 것일까?
'DJ적자' 한화갑, DJ와 결별?
김근태 의장의 경우는 헤아릴 수 있다. 포용정책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 열린우리당도 스러질 가능성이 높다. 어떻게든 포용정책을 살려내야 한다. 잘 하면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다. 보수세력과 각을 분명히 세움으로써 개혁·평화세력의 지지를 회복할 수도 있다.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소신이다. 김근태 의장은 여러 차례 포용정책의 계승 발전을 주장했다. 소신이 확고하니 실천이 단호하다.
헤아리기 힘든 건 한화갑 대표의 경우다. 'DJ적자'를 자처해온 그가 김대중 전 대통령과 선을 그었다. 이 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여론의 흐름이다. 80% 이상의 국민이 북한 핵실험을 규탄하고 있고, 절반 이상이 포용정책 재검토를 주문하고 있다. 따라서 자칫 고립될 수도 있는 'DJ의 길'보다는 '보수의 길'을 걷는 게 안정적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마침 주목할 현상도 나타났다. 대선주자 가운데 가장 먼저(9일) 대북정책 전면 재검토를 요구한 사람이 고건 전 총리다. 그 후 고건 전 총리는 북핵 문제를 가장 잘 해결할 것 같은 대선주자 중 2위를 기록했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를 제쳤다.
상황의 흐름도 비슷하다. 우리 정부가 양대 경협사업과 PSI를 모두 내치는 건 무리다. 미국과 주고받기를 한다 해도 남북 긴장관계는 지속된다.
설령 우리 정부가 두 손에 떡을 모두 쥔다 해도 미국의 독자적인 제재는 계속될 것이고, 한반도 위기상황은 여전할 것이며 여기에 한미동맹 붕괴를 자초했다는 비판이 더해질 것이다. 상황이 호전된다 해도 그건 위기관리 측면에서의 호전이지 근원적 해결로까지 나아가지는 못한다.
여론과 상황이 이렇다면 방어 위치보다는 공격 지점에서 대선을 맞는 게 유리하다.
하지만 이런 분석은 너무 단선적이고 부분적이다. 당장 김근태 의장이 걸린다. 김근태 의장 개인이 아니라 그의 단호한 태도에 지지를 보내는 열린우리당 내 계파와 그 지지세력이 문제다.
한화갑의 불안정한 '양다리' 작전
한화갑 대표가 범여권 통합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또 어제 발표한 민주당의 당론에 진정성이 배어 있다면 정계개편은 사실상 어렵다. 통합이 아니라 분열로 가기 쉽다. 입장이 대동소이한 고건 전 총리를 얻는다 해도 범여권의 한 축을 잃어버린다.
호남에서의 주도권을 잃을 수도 있다. 상황 요인이 '안정적 위기관리'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면 그에 비례해서 김근태 의장과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행보가 힘을 얻게 된다. 그러면 한화갑 대표와 민주당의 입장은 '표변'으로 채색될 수도 있다.
다른 분석이 성립할 수 있다. 민주당이 어제 발표한 당론을 보면 PSI에 대해서는 참여 확대가 '불가피'하다고 분명히 표현한 반면, 양대 경협사업에 대해선 미국과 충분한 '협의'를 거쳐 결정돼야 한다고 에둘러 표현했다. 하나에 대해서는 단정을 내린 반면 다른 하나에 대해서는 여지를 남겨 놓았다.
우리 정부가 양대 경협사업 지속을 결정함으로써 공은 미국으로 넘어갔다. 받든지 거부하든지 둘 중 하나다. 얼핏봐선 미국이 거부할 공산이 커 보이지만 셈법이 그리 간단한 게 아니다. PSI가 걸려있다. '거래'하지 않을 수 없는 요인이 분명히 있다.
민주당이 양대 경협사업에 대해 '중단이 불가피하다'고 못 박지 않은 이유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미국이 양대 경협사업 지속을 용인할 경우, 그리고 북한의 추가 핵실험 등에 따라 정부의 양대 경협사업 지속 입장이 궁지에 몰릴 경우를 모두 염두에 둔 양다리 포석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너무 넓게 본 것이다.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양대 경협사업에 대해 한화갑 대표와 민주당이 사실상 미국편을 들었다는 지적을 피해갈 수는 없다.
발을 들여놓긴 했는데, 과연...
한화갑 대표가 도박장 입구에 발을 걸친 건 분명해 보인다. 그런데 도박장이 '바다이야기'인지 '황금성'인지 쉽게 구분되지 않는다.
단순하게 보면 어설프게 답이 나온다 일각에선 북한 핵실험으로 한민공조는 물 건너 갔다고 단언하지만 어제 민주당이 결정한 당론만 놓고 보면 전혀 그렇지가 않다. 오히려 한나라당의 대북정책과 흡사하다.
그럼 한화갑 대표는 한민공조의 불씨를 끄지 않은 걸까? 이렇게 보기엔 한화갑 대표의 판돈이 너무 크다.
어쩌면 이게 답일지도 모른다. 대선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아있다. 지금까지 운위돼온 정계개편론을 뒤흔들 중대 변수도 나타났다. 상황은 불안정하고 미래는 불투명하다. 열린우리당이 한나라당에 비해 거의 유일하게 우위를 점해온 대북정책마저 흔들리고 있다. 이럴 땐 모든 가능성을 남겨두는 게 밑지지 않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