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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달려라, 배추!
달려라, 배추! ⓒ 박봄이
아, 이 얼마만에 들어보는 청소년들의 언어인가 싶어 흥미진진하기만 했다. 참, 물색없는 것들. 스물여덟이나 된 것들이 십대들 싸움 보며 즐거워하는 모습이라니…. 하지만 어쩌랴. 재미있는 걸.

"너 xx, 잠만 기다려, 체육복 입고!"

푸핫! 그 살벌한 와중에 교복 치마 안에 체육복을 입어야 한다니…. 소녀는 소녀구나. 드디어 체육복을 갈아입은 치킨소녀들이 마주보고 섰고 그 긴장감에 우리도 마른 침을 삼켰다.

"선빵 날려."
"니가 선빵 날려."
"됐거든? 니가 선빵 치라고!"
"먼저 치지도 못하는 x이…."
"뭐랏!"


[주3 : 선빵 - 결투에서 먼저 상대에게 첫 공격을 시작하는 것으로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나, 위와 같은 상황에서는 상대방의 강함을 알아보기 위하여 요구하는 것으로 보아야 적합하다.]

소녀들은 정말로 머리끄덩이를 붙잡고 싸우기 시작했고, 지켜보던 우리는 사태가 생각보다 커질 수 있음에 신고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죽어!!!!!"
"싸가지 없는 x!!"
"xxx, xxxx, xx, xxxx!!"
"abcdefg!!"


그때!

"조용히 안혀!! 너거들 뭐여!"

치킨소녀 vs 배추도사

철망으로 된 학교 담벼락 사이로 지팡이를 푹푹 쑤시며 소리를 지르는 노인. 배추도사였다. 밤만 되면 동네 사방팔방으로 뭘 이리저리 줍고 배회하시는 배추도사.

그날도 한가득 뭔가를 잔뜩 주워 돌아오시는 길이었나 보다. 세렝게티 주변을 모두 자신의 영역이라 여기시는 배추도사에게 이런 야밤 소녀들의 결투는 결코 넘어갈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됐거든요? 할아버진 그냥 가시면 되거든요?"
"뭐셔? 이것들이!"
"그냥 가시라고요! 남의 일에 꼽사리끼지 마시라고요!"


[주4 : 꼽사리 - 끼어들거나 참견, 들러리를 서는 행위. 조금 더 순화된 표현으로 '묻어가다'도 포함된다. 즉, 배추도사가 현재 눈치 없이 결투에 참견하는 것을 나무라는 소녀들의 표현이다.]

전혀 굽힐 줄 모르는 치킨소녀들의 당돌함에 배추도사 급기야 불켜진 교실 쪽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신다.

"선생들 뭐 하는 겨! 여기 이런 것들 안 잡고!!! 선생들 나와! 나오란 말여!!"

소녀들은 급작스러운 사태에 놀랐는지 후다닥 도망치기 시작했다.

'타앗!'

그 순간 배추도사,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아이들이 도망가는 방향으로 뛰기 시작한다. 그 스피드는 도저히 노인의 스피드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그야말로 세렝게티의 치타와도 같았다.

'역시, 저 노인은 인간계가 아니라 신선계임이 분명해.'

오늘도 무사히 보낸 하루에 감사, 또 감사.
오늘도 무사히 보낸 하루에 감사, 또 감사. ⓒ 박봄이
온 동네 개들이 짖고 소녀들을 쫓는 배추도사의 외침과 은둔고수를 몰라본 소녀들의 비명이 세레나데처럼 울려 퍼졌다.

"너 여기서 어떻게 사냐?"

걱정 어린 친구의 물음.

"괜찮아, 원래 세렝게티의 맹수도 자기 배부르면 다른 동물 안 잡아먹는다잖아. 저 영감 굶고 사는 것 같진 않아."
"고기 좀 갖다 드려라, 그게 니 살길이지 싶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이 새삼 충만하는 꼬냥이, 그렇게 세렝게티 옥탑의 밤은 어허야 둥기둥기∼ 평화롭게 깊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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