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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는 '2006 올해의 뉴스게릴라상' 수상자로 뉴스부문 윤여문 기자, 사는이야기 부문 송성영 기자, 연재부문 김준 기자를 선정했습니다. '올해의 뉴스게릴라상'은 한해동안 최고의 활동을 펼친 시민기자에게 주어지는 상입니다. 올해의 뉴스게릴라상 시상식은 <오마이뉴스> 창간 7주년 기념식(2007년 2월22일)에 치러지며, 수상자에게는 상패와 상금 50만원, 부상이 주어집니다. <편집자주>
[기사 대체 오후 4시 50분]

2006년 호주문학기행 중 선착장에서.
2006년 호주문학기행 중 선착장에서. ⓒ 윤여문
윤여문은 말한다. 숨막힐 듯 갑갑한 세상과 불화 했노라. 마감뉴스를 지켜보다 텔레비전을 향해 술잔을 집어던진 날 밤 그는 이민을 결심했다. 날파람 같은 현실이 지질해졌다. 어차피 글을 쓴다는 것은 스스로에게 내리는 귀양의 형벌, 곧 유형이 아니었던가.

하나 뿐인 아들 또한 시인이기를 바랐던 그는 이민을 떠나던 날 아들을 데리고 수유리의 4.19 묘지를 찾았다. 그리고 '아들아, 가난한 시인이 되어다오'라는 제목의 시를 낮게 읊조렸다. 18년 전의 일이다.

'시인, 그것은 몽상가와 바보의 동의어'라 말한 사람은 <마담 보바리>의 작가 구스타브 플로베르였던가. 꿈이 저당 잡힌 땅에서 갈근거리며 사느니 남의 땅에서 객꾼으로 홀대받을지언정 꿈꾸기를 선택한 그는 바보다. 은행에서 현금을 인출할 줄도 모르는, 이를테면 '사회적 금치산자'다. 그래서 천상 시인이다. 아내는 종종 그를 '스물 아홉의 청년'이라 부르곤 한다.

지천명을 넘긴 시인을 스물 아홉의 철부지 청년으로 남게 한 것은 아름다운 시절의 기억이었는지도 모른다. 제법 날리는 소년 문사였던 윤여문은 전국 고등학생 백일장에서 장원을 먹었다. 심사위원장이었던 박목월 선생으로부터 사사 받았고 혜산 박두진 선생은 필명을 지어주기까지 했다.

"네가 윤가니까 목월의 시를 따서 '윤사월'이라 하자."

아름다운 청년의 기억은 낯선 땅에서 거름이 됐다. 낮에는 국립공원에서 잔디를 깎아 생활비를 벌고 밤에는 공부를 했다. 윤여문은 이것이 전형적인 '먹물기질이라 자조한다. 그렇게 10여 년을 보내고 나니 강의실에서 그의 자리도 바뀌었다. 강단을 바라보며 배움에 몰두하던 그가 이제는 강단에서 가르치게 된 것. 그 사이 밥벌이에 나선 아내는 이제 집안의 바깥사람이 됐고 영화를 하고 싶다던 아들은 법대에 진학했다.

- "부시 10분 동안 웃을지 모르지만 23시간 50분은 울고 있을 겁네다"
- 호주서 집 장사하다 두 번 망한 한국인

DJ의 초라한 퇴임이 맺어준 인연 <오마이뉴스>

…곧 죽어도 비굴하지 말자던/ 밤 새운 다짐일랑 잊자/ 진짜 부끄러운 굴종은, 끝까지/ 용서하지 않으려는 거다/ 용서받지 않고 죽으려는 거다…

독주 냄새가 진동하는 이 시를 쓴 것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퇴임 무렵이다. 김 전 대통령의 업적이 칭송되는 호주와 달리 한국에서 날아오는 소식에는 만경된 대통령으로 비하된 김대중만 들어있었다. 처연했다.

1987년 서울의 윤여문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비판적 지지그룹에서 활동한 바 있다. 글쟁이가 할 수 있는 일은 글을 쓰는 것. 퇴근 후 짬을 내 10여 개의 로고송 노랫말을 만든 일인데 이것은 김영삼 후보의 로고송과 함께 한국 최초의 대선 로고송으로 기록됐다.

단 한번 김대중 후보를 만나 노랫말을 함께 고민한 일은 그에게 지금도 소중한 추억이다. 윤여문은 호주로 떠났고 DJ는 대통령이 됐다. 1999년 김대중 대통령이 호주를 방문했을 때 시드니에서 동포간담회가 열렸지만 윤여문은 자리를 피하고 만다. 대통령이 각광받던 시절이었던 것이다.

그런 대통령의 초라한 퇴임 소식은 자닝스러웠다. 윤여문은 오래 전 그날 텔레비전을 향해 던진 술잔을 다시 들어 한 자 한 자 활자로 채워갔다. 2003년 한국에 봄기운이 움트기 시작한 2월 25일의 일이다.

떠나가는 겨울을 꽃으로 단장해 배웅하는 봄날의 마음이 한국인 본디의 마음이라는 뜻에서 제목은 '복사꽃에 절하다'로 지었다. 그리고 이것을 한국에 보냈고 동료시인은 그에게 <오마이뉴스>를 소개했다. 윤여문과 <오마이뉴스>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그로부터 1년 후인 2004년 3월, 노무현 대통령 탄핵사태를 보면서 그와 닮은 호주의 예를 소개한 기사 '29년 전, 호주엔 무슨 일이 있었나?'를 내놓는다. 이것이 자신이 쓴 최고의 기사라 평가하는 윤여문은 3년 반이 넘는 세월 동안 총 71건의 기사로 <오마이뉴스> 독자와 만났다.

그리고 국제뉴스를 다른 시각으로 보자는 포부를 안고 <오마이뉴스> 해외통신원 2기로 윤여문이 합류한 것은 그해 12월. 현재는 6기 해외통신원이 활동을 하고 있다. 총 19개국 28명으로 불어난 해외통신원 가운데 윤여문 대선배로 모범이 되고 있다.

학업과 생업에 떠밀려 마감 기한을 넘기기 일쑤인 동료 통신원들에 앞서 듬쑥한 걸음으로 꾸준히 기사와 전쟁했다. 올해 특히 호주 소식이 꾸준했던 이유다. <오마이뉴스> 해외통신원으로서 자부심도 느껴봤다.

지난 10월 말 북한이 핵실험을 결행한 후, 호주 주재 박명국 북한공사를 단독 인터뷰한 것. 박 공사는 6자회담의 대표로 활동하는 등 북한의 대표적인 미국통 외교관이다. 극구 사양하는 박 공사를 설득해 북한외교관 최초의 단독인터뷰를 성사시킨 것은 그에게도, <오마이뉴스>에도 '사건'이었다.

지난 10월 말 북한이 핵실험을 강행한 후 호주 주재 박명국 북한공사를 단독 인터뷰하는 모습.
지난 10월 말 북한이 핵실험을 강행한 후 호주 주재 박명국 북한공사를 단독 인터뷰하는 모습. ⓒ 윤여문
그의 기사는 '마이너리티 리포트'

<오마이뉴스> 뿐만 아니라 윤여문은 각종 신문, 잡지, TV 다큐멘터리를 통해 다양한 집필 활동을 풀쳐왔다. 80년대 말, <신동아>에 시를 발표한 것이 인연이 돼 르포기사를 쓰기 시작했고 2004년 말부터는 '윤필립 시인의 시드니 통신'을 연재하고 있다. 1995년 <주간동아>의 창간멤버로서 지금까지 호주 소식을 들려주고 있다.

혹자는 질타한다. <동아일보>와 <오마이뉴스>는 양립할 수 없는 매체라고. 딱히 부정할 방도는 없다. 그러나 윤여문은 자신이 양면성 투성이라는 말은 배겨낸다 해도 그가 쓰는 글을 공박하는 것은 수용할 수 없단다. "각을 세워야 할 때도 있지만 항상 대결구도로 가는 건 소모적"이라고 생각하는 까닭이다. 이것이 도그마의 위험이라고 그는 믿고 있다.

하루 24시간의 절반을 글쓰는 일로 채우는 윤여문에게 글쓰기는 농부가 농사를 짓는 것과 똑 같은 일이다. 고은 시인은 물었다.

"어떻게 밥은 먹고 사냐?"
그는 대답한다. "저야 뭐 전업시인인걸요"라고. 곧바로 돌아오는 고은 시인의 놀림.
"응, 건달이구먼!
그는 반격한다. 전업시인이 건달이면 대통령이나 재벌총수도 건달이라고. 밤낮 없이 자기 일에 몰두하는 이들은 모조리 건달이라고.

향수에 들피진 '건달', 윤여문의 펜은 그러나 곧추서지 않는다. 비스듬히 누운 펜을 타고 잉크는 아래로 아래로 흘렀다. 이를테면 소수자, 소수의견, 비주류, 사회적 약자, 열패자에 바치는 '마이너리티 리포트'. 이것은 거대담론이 아니라 소박하기 그지없는 연민과 연대의식의 발로다.

유복한 가정에서 나고 풍요로운 환경에서 성장한 그는 태생적으로 무산계급에 대한 부채의식을 갖고있다고 고백한다. 이것은 차라리 원죄의식에 가까웠다. 그의 나이 스물 한 가운데 김성식, 서유민과 함께 출간한 3인 공동시집의 제목이 <부끄러운 시들>이었던 까닭이다. 배부른 자의 엄살이라고?

이제는 자신의 이야기다. 호주 땅을 밟는 순간 그는 영락없는 마이너리티가 됐다. 언어가 다른 나라에서 온 이민자에다 동전 한 닢, 밥 한 그릇 만들어내지 못하는 시인은 자본주의의 첨단을 달리는 호주에서 어쩔 수 없는 소수자였던 것이다. 그래서 윤여문의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는 더덜이 없이 날것의 냄새가 난다. 그의 시에 묻어나는 알콜의 그것과 같이.

"모국어로 시를 쓰는 시인은 국적을 바꾸지 않는다"

"시를 알면 다 아는 것이다."

스물 아홉 청년을 키운 고집이다. 시를 알려면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는. 기사는 '삶과 꿈을 가꾸는 언어의 집'이라는 선배 시인들의 정의를 믿는 윤여문은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고 삶의 의미를 담아내는 작업'이라는 거창한 주장에도 기꺼이 동의한다.

'시대성과 역사성을 담보해야한다'는 시대적 요청 또한 간과할 수 없는 일이다. 여기서 주어를 '기사'에서 '시'로 바꿔도 무방하다. 윤여문의 시는 이렇게 기사와 화해하고 있다.

우리 가족.
우리 가족. ⓒ 윤여문
시인 뮈세에 따르면 "시인은 태어나는 것"이다. 시인으로 태어난 윤여문은 살기 위해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시를 쓰기 위해 산다. 윤여문은 죽어서도 시인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

'가슴팍 살점을 떼어내어 언어의 집을 짓는', '홀로 부르다 아득해진 노래들로 거푸집 한 채 짓는' 윤여문에게 시는 '깊은 밤 깊은 곳에 꽃을 여의듯 아무도 모르게 놓아버릴 목숨'(윤여문의 자작시 '시집'의 일부)인 것이다. 밥을 먹고 숨을 쉬는 일 뿐만 아니라 기사를 쓰는 일조차 시를 쓰는 준비과정이라 말하는 그는 지금까지 천 편이 넘는 시를 쏟아냈다.

그의 단독 시집 출간을 독려해온 고은 선생이 1994년 시드니를 찾았을 때 그의 시를 들고 한국으로 돌아가 출판사에 맡긴 일이 있다. 고은 시인이 발문을, 서정주 시인이 축사를 썼다.

태어났다면 '시드니 랩소디'로 불렸을 시집은 그러나 인쇄에 들어가기 직전 윤여문이 작업을 중단시킴으로써 유산됐다. 일생에 시집 한 권이면 족한 윤여문의 시 세계가 당시의 시편으로 확정될까 두려웠던 것이다.

"내 시집이 인쇄되려면 나무 수백 그루가 잘려야 한다. 내 시는 아직 그만한 무게를 지니지 못했다."

서운해하는 고은 시인과 아내에게 그가 에둘러 댄 변명이다. 이제는 자신의 시에서 그만한 무게를 감지한 것일까. 내년에는 마침내 윤여문의 단독시집이 한글과 영문판으로 한국과 호주에서 동시 출간될 거라는 반가운 소식도 들린다.

호주 땅에 살고 있는 한국 출신 시인. 한국으로 돌아가 은결든 몸을 누이고 싶은, 아니 고향인 충남 부여에 가서 살고 싶은 그는 코리언 디아스포라다. 아내와 아들이 호주시민권을 얻은 지금도 영주권 하나로 버티고 있는 이유다.

모국어로 시를 쓰는 시인으로서 차마 국적을 바꿀 수는 없었던 것이다. 독일의 시인 아이헨도르프가 틀리지 않았다면 '조국 또한 결코 시인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시인 윤여문은 <오마이뉴스>가 선정한 올해의 뉴스게릴라다.

덧붙이는 글 | 윤여문 기자는 18년 전에 호주로 이민하여 시드니에 거주중인 시인이다. 신문, 잡지, TV다큐 등에 글을 쓰고 있으며 현재 <신동아>에 ‘윤필립 시인의 시드니 통신’을 연재중이다. 2001년 <호주WCP문학상> 수상했고 현재 호주시인그룹 국제담당 이사다. 시집 <부끄러운 시들>(삼인사/공저), 산문집 <시드니에는 시인이 없다> (고려원) 한국문학을 소개한 영문책자 <다양한 목소리들(Many Voices)>(WCP Press/공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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