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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겉표지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겉표지 ⓒ 창비
책이 경고를 할 수 있을까? 그 시대의 악행이, 후대에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경고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을까?

<나의 서양미술 순례>와 <디아스포라>로 잘 알려진 재일조선인 서경식은 그것을 믿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 앞에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를 내놓았다. 도저히 인간이 벌인 짓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만행을 다시는 반복하지 않도록 경고하기 위해서 말이다.

서경식이 만난 쁘리모 레비는 누구인가.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그는 유대계 이탈리아인으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 나온 몇 안 되는 사람이다. 이 짧은 소개만으로도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나치의 만행을 고발한 책들의 하나라고 말이다. 그렇다.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는 그런 책이다. 그러나 동시에 다른 책이기도 하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유대인과 나치의 이야기가 담겼다고 하면 '그런 책'이라고 단정 짓고 있다. 과거형으로 말이다. 뿐인가. 되레 고발한 책들을 핀잔주고 있다. 팔레스타인에서 벌이는 유대인의 폭거를 묵인하게 만드는 부작용을 일으키고 있다는 식으로 말이다.

이 모든 말들은 그것이 현실과 단절돼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하고 있다. 또한 독일이 사죄했다는 것에서 시작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이 문제는 그리 쉽게 해결할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독일의 일부 '정신병자'들의 소행이 아니기도 하거니와 과거형으로 끝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누가 뭐래도 현재형이며 미래형이다. 서경식은 그것을 알기에 쁘리모 레비를 찾아 떠난 것이다.

쁘리모 레비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왔다는 것에 사람들은 운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작가로써 그 현장을 증언해야 한다고 믿었던 쁘리모 레비의 마음은 사람들이 상상하던 것과 달리 괴로웠다. 집에서 생활하게 됐고, 또한 사랑하는 아내가 생겼다는 것과는 별도로 그것은 영원한 상처로 남아 있었다.

그 상처는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서경식이 찾은 쁘리모 레비의 증언에 의하면, 그것은 언제 어디서나 반복될 수 있는 문제였다. 또한 일부의 문제가 아니라 모두의 문제가 될 수 있었다. 독일인들은 그 문제가 일부의 것이라고 말하지만, 쁘리모 레비는 증언하고 있다. 맑은 날, 수용소에서는 연기가 올라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고. 그 연기란 다음 아닌 생지옥의 증거였다.

쁘리모 레비는 우연히 노동에서 벗어날 기회가 생긴다. 그때, 독일인 민간인 여성들과 함께 있게 되는데, 그녀들은 쁘리모 레비를 앞에 두고 수다를 떤다. 주말에 무슨 일을 할까?, 따위의 아주 신변잡기적인 이야기들을. 누군가는 언제 죽을지 몰라서 벌벌 떨고 있는데, 누군가는 그렇게 일상을 영위하고 있었다. 물론 앞에 있는 유대인을 인간보다 못한 존재로써 믿으면서 말이다.

쁘리모 레비를 불렀던 학자는 어떤가. 그는 왜 불안해하느냐고 묻는다. 참으로 난센스적인 질문이다. 아우슈비츠에 수용된 유대인에게 두려워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묻는 것은 그렇게 밖에 볼 수 없는데, 더욱 당황스러운 것은, 훗날 그 학자가 쁘리모 레비에게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일을 두루뭉술하게 사과한다는 것이다. 아니, 사실상 사과도 아니었다. 과거를 묻어두고 미래를 향해 함께 가자는, 그렇고 그런 말을 할 따름이다.

그렇다면 독일인만 이렇게 문제였던가? 아니다. 쁘리모 레비는 고백한다. 살아온 것이 부끄럽다고.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유대인들은 반란을 일으킨다. 그 결과는 참담했다. 반란은 싱겁게 끝났고 반란에 참여한 유대인들은 차례로 죽는다. 그때 쁘리모 레비와 같은 유대인들은 무엇을 했던가? 그는 고백한다. 동지들이 인간성을 위해 목숨을 바쳐 투쟁했고, 그 결과 개처럼 죽을 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고. 그는 그렇게 살아온 것이다.

그렇게 살아왔는데, 쁘리모 레비를 반겨준 사람들의 반응 또한 심각했다. 그들은 쁘리모 레비의 이야기를 듣고 말한다. "힘들었겠는걸, 무서웠겠는걸, 그런데 오늘 저녁에 뭘 먹지?" 하는 말들을 하고 있다. 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섭섭함? 그런 문제가 아니다. 이것 또한 심각한 문제였다. 지옥을 현실로 만드는 일이 동시대에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는데, 다들 시큰둥하게 여기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다. 그들 또한 그런 일을 당할 수 있는데 말이다. 그 마음을 상상한다는 것 자체가 어렵기만 하다.

참혹한 것을 경험하고, 결국 자살했던 쁘리모 레비를 보는 서경식의 마음은 어떠할까? 군사정권에 고문당한 형제가 있었고, 재일조선인이라는 신분으로 살았던 서경식은 레비의 역사를 세계의 역사와 일치시킨다.

인디언을 정복한 미국, 조선을 정복했던 일본, 팔레스타인을 공격하는 유태인 등으로 이 문제를 세계의 인간으로 확대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이 논의를 단순히 나치와 유태인의 문제가 아닌, 세계의 문제로 확대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 책은 '그런 책'이 아닌, 특별한 책이 되고 있다.

우리는 생지옥이 만들어진 것을 일부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 또한 과거형으로만 여기고 있다. 더러는 이 문제를 언급하면 과거에 집착해 발전적인 미래를 모색하지 못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쁘리모 레비를 이야기하는 서경식을 만나고 나면, 그런 생각을 수정하게 된다. 수정이 무엇인가. 한발 더 나아가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는 그런 생각들을 부끄러워하게 만든다.

역사는 미래의 거울이라 했던가. 서경식의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는 역사를 바라보는 일, 나아가 미래를 발전적으로 모색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따끔하게 경고하고 있다.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서경식 지음, 박광현 옮김, 창비(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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