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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마도 포구, 만입한 지형 안쪽은 주민들이 기대어 살던 사구와 석호가 형성되어 있다.
ⓒ 김준
영광 흥농면 계마항을 빠져 나오자 방파제에서 낚시를 하는 사람들이 점점이 보이다 사라진다. 길들여진 몇 마리의 갈매기가 여객선을 뒤따르다 돌아선다. 한참 후 칠산도 갈매기가 마중을 나온다. 갈매기에게도 삶의 경계가 있을까. 바다 속 물고기가 철 따라 이동을 하듯 갈매기도 자유롭게 먹이를 좇았을 것이다.

여객선은 괭이갈매기의 보금자리 칠산도를 스치듯 뒤로하고 송이도로 내닫는다. 계마항에서 출발해 두 시간, 송이도를 남쪽에 두고 가장 먼저 이르는 안마군도가 소석만도와 대석만도, 잠시 후 멍섬(오도)과 목섬 그리고, 비킨섬(횡도)을 지나 안마도 포구에 이른다. 법성포에서 약 38㎞ 떨어진 7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섬 이곳이 안마군도다.

말발굽 모양의 산중해변

▲ 안마도에 발달한 해안침식지형(횡도)
ⓒ 김준
안마도의 중심은 신기리와 월촌리 일대의 섬 전면에 위치한 만이다. 이 만은 안마도 내부 깊숙이 만입 되어 안쪽에 모래질 해변과 사구, 그리고 뒤에 석호지형을 형성했다.

이외에도 안마도 서쪽과 서북쪽은 서해안 지역의 특징인 해안침식 지형이 발달해 있어 빼어난 경치를 보인다. 방조제 입구의 말코바위, 오도의 토끼이빨, 신기리와 월촌리 마을 앞의 조간대형 파식대 등이 그것이다.

안마도의 가장 큰 만의 입구에 방조제를 쌓아 포구로 이용하고 있다. 마을을 건산, 뒷산, 막봉이 둘러싸고 있어 섬 치고 물도 좋다. 일찍부터 산을 개간해 농사를 짓고 약초를 뜯었다. 석호지대는 시간이 지나면서 농사를 지었고, 최근에는 경지정리를 해 섬에서 유일하게 벼농사를 짓는다.

그러고 보면 바다에서 모래의 존재는 어민들에게 생명 줄이다. 새우, 조기는 말할 것도 없이 모든 바다 고기들이 이곳에 산란을 하고 자라며, 뭍으로 밀려와 해수욕장을 만들어 관광객을 모아준다. 그런가 하면 안마도처럼 농지로 이용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만 두었지만 구릉을 일궈 농사를 지었던 흔적들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다만 산지구엽초를 비롯해 약초들을 뜯거나 술을 담아 파는 가게들은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가게는 물론 민박집에서 자연산 삼지구엽초로 담근 술과 지네로 술을 담근 지네주를 구입할 수 있다.

▲ 안마도의 유일한 새터 논, 산에서 내려오는 물길을 가두어 식수를 해결하고 나중에 논으로 변하여 '새터'라는 지명을 얻었다. 인근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 김준
오늘날 '안마(鞍馬)'라는 지명이 기록된 것은 1759년의 <여지도서>로 당시 상낙월도·하낙월도·태이도·송이도·전증도·후증도 등 14개 섬과 함께 상제도면에 속했다. 당시 상제도면의 인구는 1975명으로 지금과 비교해도 적지 않은 사람이 섬에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안마도 1500여명, 대석만도에 180여명, 멍섬에 40여명, 횡도에 30여명이 살았지만 지금은 안마도에 260여명, 대석만도에 40여명이 살고 있을 뿐이다.

안마도는 총면적 770㏊ 중 임야가 600여㏊, 밭이 117㏊, 논이 13㏊, 기타 35㏊이다. 안마도는 육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어업의존도가 낮고, 물길이 좋고 경지정리가 된 새터에 10여㏊의 농지와 건산(145) 뒷산(184) 막봉(167) 능선을 개간해 농사를 지으며 생활해온 '해변산중' 이었다. 인구감소와 노령화로 농사도 최근에는 거의 묵히고 있다.

철마를 모셨던 큰 당산

▲ 당산제를 지냈던 당산나무
ⓒ 김준
안마도는 말과 깊은 인연이 있다. 안마도(安馬島)라는 지명으로 역사 기록에 처음 소개된 <세종실록지리지>에도 33필의 말을 방목하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태종조의 기록(태종 19년 1월 21일자)에는 안마도에 흑총마 30여 필이 섬에 스스로 자라고 있다는 기록도 있다.

조선시대에는 '목마(牧馬)의 수효가 나라의 부를 결정한다'고 할 정도로 말의 사육이 중요한 국가정책이었다. 말은 국내에서뿐만 아니라 당시 선진문물이 집산지였던 중국과 무역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조선시대에 국마를 길렀던 대표적인 목장은 제주도였지만, 진도를 비롯해 서남해역 섬 곳곳에도 목장을 설치했다. 조선 전기에 목장이 설치된 섬이 130여개로 추정하는데 이는 오늘날 파악된 유인도 490여개의 30% 가량에 해당된다.

안마도의 당제에 모시는 신체도 철마였다. 안마도에서 철마를 당신(堂神)으로 모시기까지 사연이 있다. 곰몰(동촌)에 살던 신씨 할머니 꿈속에 한 장군이 나타나 '나는 중국의 장수였으나 제대로 싸워보지 못하고 죽어, 그 유품이 바닷가로 밀려와 궤 속에 있으니 이를 건져다 산에 모시고 제사를 지내달라'고 현몽을 했다. 할머니가 마을 앞 갯가에 나갔더니 정말로 중국 돈과 철마가 든 궤짝이 밀려와 있었다. 신씨는 동네 주민들과 함께 뒷산에 철마를 모시고 섣달 그믐날 밤에 제사를 지냈다.

그 후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아래 작은 당산에 모셨다고 한다. 당제를 모신 다음날(정월 초하루) 산에서 내려와 곰몰, 신기, 월촌 등 마을을 유사집(당제를 준비한 사람)을 돌며 뫼구굿을 쳤으며, 닷샛날 당산제를 지내고 보름에는 세 마을 주민들이 모여 헛배를 만들어 제물을 싣고 풍어굿을 한 다음 먼바다로 내 보냈다. 이렇게 거의 한 달 동안 이어지는 마을제의는 1960년대 말 중단되었다. 당시 큰 당산에는 네 필의 철마를 신체로 모셨다고 전한다.

다시 바다를 기웃거린다

▲ 안마도 포구, 만입한 지형 안쪽은 주민들이 기대어 살던 사구와 석호가 형성되어 있다.
ⓒ 김준
낙월면은 상하낙월도, 안마도, 송이도 등 3개의 큰 섬과 대석만도, 대각이도 등 10여 개의 유무인도로 구성되어 있다. 낙월면을 대표하는 세 섬의 어업활동은 각각 다르다. 낙월도는 젓새우잡이, 안마도는 꽃게잡이, 송이도는 조기잡이였다. 이중 낙월도 젓새우잡이는 1990년대 후반 멍텅구리배가 보상으로 폐선 되어 멈추었고, 송이도의 조기잡이는 칠산바다에서 조기들이 사라진 1970년대 사라졌다. 그러나 안마도는 현재 10여 척이 꽃게잡이를 하고 있다.

안마도는 낙월면에서 가장 큰 섬이다. 심지어 면의 중심인 낙월면보다 다섯 배나 크다. 이렇게 큰 섬이 면 행정의 중심이 되지 못한 것은 경제력 때문이다. 낙월도는 지금은 빈촌으로 전락하고 말았지만 새우잡이가 한창이던 시절에는 영광 법성에 못지않는 상권이 형성된 적이 있었다.

섬을 크기를 가지고 기를 죽이려는 안마도와 경제력으로 품을 잡는 낙월도 주민들의 섬 사랑은 여전하다. 낙월도와 송이도 사람들은 염산을 통해 영광으로 들어오지만, 안마도 사람들은 법성포를 통해 영광으로 들어온다. 이곳 뱃길이 열리기 전 낙월도와 송이도 그리고 안마도는 목포 생활권에 포함되었다. 하루에 한두 번 열리는 뱃길이 목포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바다에 관심을 가지 않았던 안마도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다. 특히 안마도가 어업에 나서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말 안마항(제3종어장)이 국가어항으로 개발되면서부터였다. 안마도 인근해역에서 늦봄과 초여름 사이에 병어, 꽃게, 새우젓, 여름에서 초가을에는 조기, 농어, 민어, 가오리, 홍어 등이 많이 잡힌다.

안마도는 칠산바다 조기어장의 중심에 위치해 있으면서 어장을 외지 배들에 내주어야 했다. 다만 배들이 정박하고 주막이 있었다는 월촌리의 선창마을, 밤이면 고기 배들이 모여들어 등불이 불야성을 이루었다는 불등마을의 유래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을 뿐이다.

▲ 여객선 출항 시간을 놓친 고기잡이배가 법성포로 향하는 여객선에 쫓아온다.
ⓒ 김준
안마도에 양식어업이 시작된 것은 1980년대 초반. 월촌리 앞 작은 갯벌에서 시작된 김양식이지만, 영광군에서는 안마도에 전략적으로 전복양식을 집중 육성하고 있다. 말발굽형으로 둘러싸인 있는 안마도항의 죽도리와 오도리 지선어장에 많은 전복양식시설들이 설치되어 있다.

다른 섬에 비해서 늦게 시작된 어업활동을 1993년 어촌계가 결성되었지만, 마을어장에 자연산 전복·소라·해삼·성게 등이 풍부하고, 가두리와 육상수조를 이용한 전복양식 등 활발한 어업활동을 펼치고 있다.

칠산어장을 인근에 두고 외지 배들에 바다를 내줬던 안마도 사람들, 포구가 마련되면서 양식업과 고기잡이를 시작하고 있다. 이곳에서 잡힌 꽃게와 통발로 잡은 돌게(독게)와 장어는 법성포에서 상품으로 거래된다. 외지인들이 주목하지 않았던 섬 주민들 바다, 바다의 주인들도 농사를 짓고 약초를 뜯다 뒤늦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약탈어업과 씨를 말리는 싹쓸이 어업을 되풀이하지 말고, 늦게 발견한 소중한 바다자원을 잘 보전하고 이용하길 바랄 뿐이다.

▲ 꽃게잡이 그물 손질
ⓒ 김준

태그:#영광, #낙월, #안마도, #산중해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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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동안 섬과 갯벌을 기웃거리다 바다의 시간에 빠졌다. 그는 매일 바다로 가는 꿈을 꾼다. 해양문화 전문가이자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 사진작가이기도 한 그는 갯사람들의 삶을 통해 ‘오래된 미래’와 대안을 찾고 있다. 현재 전남발전연구원 해양관광팀 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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