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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샘추위가 추워야 얼마나 추울까 싶었는데 꽃샘추위 막바지에 겨울 옷을 다시 꺼냈습니다. 이번 꽃샘추위는 대단해서 풀렸던 계곡을 다시 얼릴 정도였으니 작고 연약한 새싹들과 피었던 꽃들이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모릅니다.
활짝 삶을 피우지 못하고 얼어터진 꽃들도 있고, 꽃샘추위에도 불구하고 피어났던 꽃들도 예상보다 꽃샘추위가 극심하니 잠시 봄을 맞이하기 위한 발걸음을 멈췄습니다. 겨울은 너무 따스해서 지구온난화에 대한 우려를 자아내더니만 봄은 너무 추워서 계절이 뒤죽박죽 된 것 같은 불안감을 느끼게 합니다.
겨우내 알알이 영근 씨앗들을 다 날려버린 때죽나무, 열매 맺었던 흔적들만 을씨년스럽게 남아 꽃샘추위를 담은 칼바람에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것을 바라보며 봄을 느낍니다.
아직 찬바람이 성성하지만 이미 봄꽃들이 피어난 지 오래니 어딘가에 또 봄을 맞이하고 있는 것들이 있을 것 같았습니다. 다 풀렸던 계곡에 얼음이 다시 등장하고 이제 꽃샘추위 막바지에 작은 겨울의 흔적을 남겨두었을 뿐입니다. 겨울을 좋아하는 이들을 위한 배려일 수도 있겠지요.
이번 꽃샘추위에 얼어터진 꽃들을 보면서 참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꼬박 일년을 기다려야 다시 피어날 꽃들을 애도하면서 희망이라는 것이 단지 희망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생각했지요. 최선을 다해도 꺽이고 뽑히고 얼어붙어 꽃을 피우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구나 생각하니 우리네 사람들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다시금 절실하게 느끼게 됩니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최선을 다해도 더 이상 벗어날 수 없는 밑바닥 삶을 강요당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칼바람을 동반한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날, 면장갑도 끼지 않은 채 리어카를 끌고 다니며 폐휴지를 모우는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배웠든 못 배웠든 그런 분들에게도 봄날 같은 인생이 올 수 있다는 희망을 볼 수 있어야 할 터인데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그것은 어림없는 일이겠지요. 때론 절망을 볼 수 있는 것도 희망인데, 그동안 너무 희망타령만 하면서 산 것은 아닌지 반성을 했습니다.
이른 아침, 햇살이 비추는 곳을 찾아 걸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땅은 꽁꽁 얼어 있고 조금만 따스했으면 이슬방울이었을 것들이 얼음이슬이 되어 이끼의 삭을 가두고 있습니다. 얼음에 갇혀 있는 봄을 보는 듯했습니다. 얼음 속에 갇혀 있는 봄, 그 봄이 어서 해방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작은 씨앗들은 겨우내 꿈을 꿀 것입니다. 따스한 봄이 오면 싹을 내고 화들짝 꽃을 피울 것이라는 꿈, 그리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모든 추위들을 견뎠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겨우 피었다 얼어터지는 아픔이 있으니 자연은 참으로 냉혹한 면도 있지요.
자연은 모두 자기의 삶에 충실할 뿐입니다. 겨울은 겨울다우려고 하고, 봄은 봄다우려고 할 뿐입니다. 꽃샘추위는 꽃샘추위다우려고 할 뿐입니다. 꽃샘추위가 피어난 꽃을 배려하는 일은 절대로 없지요.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 자연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겠지요.
자연스러움, 그것이 단지 부드러운 말만이 아니라는 것을 이번 꽃샘추위를 통해서 느낀 것입니다.
봄은 봄대로 꽃샘추위에 맞섭니다. 사람들은 어떤 자신을 억누르는 것보다 더 큰 힘으로 그것을 타계하려고 합니다. 결국 악순환의 고리 속에 빠져들어갑니다. 폭력이 더 큰 폭력을 낳는 악순환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지요. 그것이 사람의 한계입니다.
그런데 자연은 더 강한 것으로 맞서지 않는 것 같습니다. 연약함의 영성이라고 할까요? 작고 연약한 듯한 것들이 도저히 물러가지 않을 것 같은 겨울과 꽃샘추위를 녹여내는 것이지요. 작은 새싹이 커다란 돌을 들어올리고, 궂은 땅을 가르는 것을 보면 그 연약함의 영성이야말로 악순환의 고리를 풀어갈 수 있는 비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꽃샘추위가 없었다면 벌써 늘씬한 꽃대를 올리고 보랏빛 처녀치마를 활짝 펼쳤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계속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니 잔뜩 움추렸습니다. 그런데도 그 속마음을 감출 수는 없었던 모양입니다. 봄처녀, 보랏빛 치마입고 봄나들이 준비를 이미 다 마쳤습니다.
"꽃샘추위 가고 하루 이틀만 따스하면 나는 봄나들이 갈 거예요. 봄나들이 준비를 다 했거든요. 보랏빛 치마를 입고 봄나들이 가면 멋진 봄총각도 만날 수 있을까요?"
처녀치마의 속내를 바라보고, 또 바라봅니다.
"어서어서 올라와라. 처녀치마 보고 싶어 미치겠다. 그렇게 수줍어 숨어 있으니 더 보고 싶구나."
봄나들이 마친 처녀치마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도 바람이 얼마나 찬지 모릅니다. 그래도 이제 사나흘이면 꽃샘추위가 끝난다고 하네요. 다음 주 정도면 봄나물 하러 간 길에 처녀치마 화들짝 피어있을 것입니다. 그때 늘씬한 다리에 피어난 보랏빛 처녀치마를 마음껏 바라봐야 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