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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유목민들은 성을 쌓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일정한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그들은 그 숱한 전쟁을 치르면서도 원칙상 성벽을 쌓지 않았다고 한다. 몽골 동부에서 가오리라는 성이 발견되긴 했지만, 그것은 농경민인 고구려인들이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럼, 유목민들은 어떤 이유에서 성을 쌓지 않은 걸까? 그 이유를 8세기 초반 동돌궐 군주인 비가가한과 그의 책사인 돈욕곡의 대화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당나라의 군주는 '개원의 치'로 유명한 현종 황제였다. 지금의 몽골 지방을 차지하고 있던 동돌궐 군주 비가가한은 틈만 나면 당나라를 침략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당시 동돌궐과 당나라는 군사적으로 서로 밀고 밀리는 형국을 이루고 있었는데, 당나라에 대한 군사적 우위를 염원한 비가가한이 돈욕곡에게 성을 쌓자고 제의했다. 농경민인 당나라처럼 우리도 성을 쌓는 게 어떻겠느냐고 의견을 물어본 것이다.
이에 대한 돈욕곡의 대답은 단호했다. "노!"였다. 그럼, 그는 어떤 이유에서 축성을 반대한 것일까? <구당서> 권194 돌궐열전 개원 4년조(條) 이하에서 돈욕곡의 대답을 들을 수 있다. 참고로, 돈욕곡은 당시 이미 칠십이 넘은 고령의 책사로서 비가가한의 등극과 함께 정치적 재기를 이룬 사람이었다. 그의 말은 다음과 같다.
"돌궐의 인구는 매우 적어서 당나라의 백분의 일도 안 됩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그들에게 대항할 수 있는 것은, 우리는 물과 풀을 따라다니면서 거주지가 일정치 않고 수렵을 업으로 삼으며 사람들이 저마다 무예를 습득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강성해지면 진격해서 공격하고, 쇠약해지면 산림으로 도망합니다. 당나라 군대가 강하다 해도 어찌할 도리가 없지요. 그러나 만약 성을 쌓아 거주하고 옛 습속을 바꿀 경우, 한번 불리해지면 필연코 당나라에게 먹히고 말 겁니다."
이에 따르면, 돌궐족이 성을 쌓지 않은 것은 농경문화권과의 군사적 대결에서 우세를 점하기 위함이었음을 알 수 있다. 유목문화 내부에 그 원인이 있었던 게 아니라, 외부인 농경문화와의 관계에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이동생활을 하는 유목민에게 성벽이 특별히 필요하지도 않았겠지만, 그들이 성을 기피한 보다 본질적인 이유는 농경민족과의 전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데에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구가 적은 돌궐이 인구가 많은 당나라를 상대하자면 기동성이 필요한데, 성곽 문화에 안주하면 그런 기동성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성을 축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비가가한은 축성 제의와 함께 불교 사찰과 도교 도관(道觀)을 세우는 게 어떻겠느냐는 제안도 했는데, 이에 대해서도 돈욕곡은 "안 된다"고 대답했다. 그의 대답은 이러했다.
"불교·도교는 사람들에게 인자함과 유약함을 가르치는 것으로서, 본래 용맹함이나 강인함의 길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래서 만들면 됩니다."
농경문화권의 강대국인 당나라에 맞서 끊임없는 전쟁을 수행하자면 용맹하고 강인한 정신이 필요하기 때문에 불교나 도교의 사찰을 지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다. 돈욕곡의 대답은 비가가한을 포함한 신료들의 호응을 얻었고, 결국 돌궐은 성벽도 쌓지 않고 종교 사찰도 짓지 않았다.
하지만, 동아시아는 물론 전 세계적 차원에서 결국에는 농경문화권이 유목문화권을 압도했다. 유목민들은 단기적인 군사적 필요 때문에 성벽도 쌓지 않고 또 문화도 제한했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에는 갖출 것을 제대로 갖춘 농경민들이 상대적 우위를 점할 수밖에 없었다. 멀리 내다보면서 기본적인 조건들을 하나씩 갖추어 나가는 쪽이 결국에는 승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요즘 한국에는 미군으로부터 전시작전통제권을 돌려받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북한 등 동북아의 강적들로부터 안보를 유지하려면 미군의 지휘통제를 받는 한이 있더라도 계속해서 미군을 앞세워야 한다는 주장이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주장이다.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있는 한국군이 기본적인 전작권도 갖추지 않는다면, 이는 1만 군대가 성벽도 없이 허허벌판에서 백만 대군을 상대하는 것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그 승패는 뻔한 것이다. 이런 경우 돌궐 같으면 황하 이북으로 도망이나 갈 수 있다지만, 한국군은 도대체 어디로 도망갈 것인가. 사방이 다 강대국들인데.
지금 당장 외롭고 힘든 길일지라도 기본적인 조건들을 하나씩 갖추어 나가는 것이 진정 지혜로운 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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