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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독재시절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다던 김창룡이라는 염라대왕 같은 분이 있었다. 일본 관동군의 헌병 하사관이었던 그는 우리 광복군과 독립군이 항일 독립 전쟁에서 피흘려 싸우고 있을 때 독립투사들을 고문 색출 체포 처형케 하는데 눈에 핏발 세워 날뛰던 살인 기술자였다.

광복 이후 마땅히 민족반역자로 분류 처단되었어야 할 그가 오로지 집권 야욕에만 눈이 어두워진 이승만에게 발탁되어 독립 운동가들을 문초하느라 숙달된 고문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멀쩡한 사람도 그에게 걸려들어 찍혔다하면 영락없이 빨갱이로 몰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마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항일 독립운동을 했거나 민족의 미래에 대해 관심가지고 있는 정의로운 분들은 거의 그의 황천길 수첩 제1순위 인물로 올라있었다.

불의를 참지 못했던 한 열혈 장교의 총격으로 쓸어진 그가 살아생전 얼마나 악명 높았으면 국립묘지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가 소위 문민정부 시절 특무대의 후신인 보안사를 이은 기무사에 의해 국립묘지로 슬그머니 이장되었다.

사랑하는 아들을 고이 길러 군대에 보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그가 영내에서 자살을 했다며 국군의 명에를 더럽혔기 때문에 국립묘지에 들어 갈 수 없다는 바람에 자식을 묻지도 못하고 울부짖고 있는 억울한 어머니들이 얼마나 많은데 김창룡의 시신은 아주 쉽게 국립묘지에 들어갔다.

문민정부가 들어서서‘역사바로세우기’를 한다고 요란을 떨며 일제(日帝)의 잔재(殘滓)를 없앤다고 총독부 건물을 허물고 중국 땅에 묻혀 있던 독립운동가의 유해를 국립묘지로 옮겨오던 그 무렵에 김창룡의 시신도 이장되었다. 얼마나 가증스러운 일인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김창룡은 우리 국군이 지향하는 비전에 완전 역행하는 반역의 대표적 인물이다. 국군의 자랑스러운 항일 무장투쟁과 정반대 편에 서서 일본 천황에 충성을 맹세 광복군 독립군 타도에 혈안 되어 날뛰던 인물이다. 가장 악랄한 매국적 반민족 친일 분자인 그가 광복 후 3성 장군까지 승진할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세계에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참으로 부끄럽고 희괴한 일이다.

독재정권 하에서 그의 시신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면 그만을 들춰 파내라 말하기 어려웠을지 모른다. 박정희를 비롯해 일본군 출신들 거의가 거기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은 너무나 극악 잔인무도했던 그를 돋보이도록 심판대 위에 올려주었다. 소위 민주화되었다는 문민정부 시대에 몰래 이장했다는데 사실이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지금 양지바른 장군묘역에 버젓이 누어있다. 장군이나 대통령이나 사병이나 다같이 나라와 겨레를 위해 봉사한 자들인데 죽어서도 사병은 꼭 화장해서 조그마한 터에 묻어지고 장군의 묘지와 비석은 훨씬 크다. 금년 현충일엔 대전 국립묘지를 찾아가 참배를 하고 김창룡 묘지 파내기 행사에 참여하여 땀 흘렸지만 측은한 생각도 들었다.

거기 국립묘지에 둬봐야 가면 갈수록 욕만 먹을 텐데 그들은 역사의 도도한 흐름을 모르고 있는 듯 했다. 김창룡 부류의 친일독재 무리들을 찬양 감싸주던 자들이 판치던 시대는 지났다. 역사는 진실에 입각 그를 냉엄하게 정죄할 것이다. 언젠가 누구에 의해서든 반드시 파 해쳐질 것이니 미리 옮겨 가는 것이 고인은 물론 그 후손들을 위해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극우분자들의 시대착오적 우격다짐식 버티기 종용에 속지 말고 부끄러움을 알아 현명한 길을 택하기 바란다. 역사는 설혹 조금 더디게 혹은 엉뚱한 방향으로 돌아서 가더라도 결국은 옳은 길로 발전 한다고 나는 믿는다.

역사의식이 바로 서지 않으면, 무엇이 옳고 그른지?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길이며 잘 못된 길인지? 그것이 부끄러운 일인지, 아닌지? 그 기준을 잃게 된다. 역사를 두려워하지 않는 무자비함과 무책임만이 난무하여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기적 욕망이 이글거리는 세상이 된다.

조국광복이후 우리가 겪어온 수많은 크고 작은 역사의 수난과정에서 일어났던 일들과 역할 했던 사람들에 대하여 우리는 한번도 정의의 바른 역사의식에 기초하여 판단하고 정리 교훈하지 못했다.

광복 후 우리 군이 친일 세력들의 독무대 되면서 우리 국군은 이들로부터 가장 심대한 악 영향의 피해를 받은 집단으로 성장해 왔다. 국군은 다른 어떤 집단보다 민족에 대한 뜨거운 애정과 자부심이 충일한 조직이 되어야 하는데도 이와는 정 반대였다.

나는 군대생활 하는 동안 한번도 우리 국군의 효시인 광복군과 독립군의 빛나는 활약상, 청산리 봉오동전투의 장엄한 승리의 발자취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 민족적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근거를 찾지못했다. 신흥무관학교가 우리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이라는 사실은 한참 후에야 알았다.

김창룡의 묘를 파내는 일은 바로 이런 잘못된 국군의 역사를 바로잡는 매우 상징적인 작업이라 여겨 이를 여러 차례 신문에 기고하여 주장했다. 국민의 정부 시절에도 기고문을 작성하여 신문사에 보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기무사에서 집으로 전화가 왔다.

고등학교 후배인 해사출신 중령이라 했다. "선배님의 뜻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김창룡 장군께서 남긴 공로도 아주 많습니다" 였다. 말이 먹혀들지 않자, 다시 대령이라는 분이 설득하려 했다. 그래도 무반응이자 기무사령관이 전화를 바꾸었다. “선배님 왜 그리 고집부리십니까?” 라는 식이었다. 어이가 없어, 흥분된 어조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곁의 아내가 “기무사가 별것을 다 간섭하네요! 당신 소신껏 해요!”라 했다.

한창 실랑이가 끝난 다음 “여보 당신, 일이 복잡해질 수도 있는데 적당히 하라하지 무슨 배짱으로 소신껏 하라했소!” 했더니 “당신이 너무 불상해서요”했다. 아무도 관심 없고 도와주는 사람 하나 없는데 일평생 홀로 군 개혁하겠다고 시달리며 주장하니 안타깝고 가여워 나라도 힘을 보태야 하겠다는 생각이 불쑥 들더라는 것이다.

이제 칠순도 지났으니 “제발 조용히 좀 삽시다!” 졸라온 아내의 소원을 들어주어야하는데 언제쯤에나 가능할지? 아직은 지방 조직도 해야 하고 6.25전후 민간인 학살 지 탐방도 가야하고 바쁘기만 하니 미안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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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군을 부하인권존중의 ‘민주군대’, 평화통일을 뒷받침 하는 ‘통일군대’로 개혁할 할 것을 평생 주장하며 그 구체적 대안들을 제시해왔음. 만84세에 귀촌하여 자연인으로 살면서 인생을 마무리 해 가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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