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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별장 (티볼리)
ⓒ 한길사
고대 로마인에게는 세 개의 이름이 있었다. 개인의 이름, 씨족을 나타내는 이름, 그리고 가문을 가리키는 이름.

예를 들어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경우 원래 이름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로 율리우스 씨족의 카이사르 가문에 속한 사람임을 보여준다. "로마가 낳은 유일한 창조적 천재"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역사에 남긴 이름은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 가문의 이름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이순신 장군을 "덕수 이"라고 부르는 셈이다. 더 나아가 로마인들은 아버지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는 경우가 흔했다. 같은 시대 그리스인들은 가문이나 씨족을 나타내는 명칭 대신 속한 행정구역의 이름을 붙였다고 하는데, 로마인들은 가문의 이름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았던 모양이다.

명문가, 공동체를 떠받치는 기둥

인류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일반적으로 정치 제도는 왕정(또는 제정)에서 공화정으로 바뀌는 순서를 밟아 왔다. 하지만 로마는 드물게도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바뀌었다. 모든 시민이 평등하다고 생각했던 로마인들에게 로마 시민들에게 제정으로의 회귀는 상당히 큰 충격이었을 터다.

물론 그 과정에서 카이사르가 암살되고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사이의 내란이 벌어지긴 했지만, 비교적 큰 희생을 치르지 않을 수 있었던 데에는 공화정에서 제정이라는 시스템 변화를 뒷받침해줄 인재들이 있었다. 제정을 기획한 율리우스와 아우구스투스부터 시작되는 첫4대 황제를 배출한 집안은 율리우스 가문과 클라우디우스 가문이다. 이 두 가문은 공교롭게도 로마를 건국한 라틴족의 가문이 아니었다.

기원전 7세기경 제3대 왕 톨루스 때, 로마는 알바롱가 부족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알바롱가 부족의 유력 가문들을 그대로 로마 귀족으로 받아들였고 원로원 의석을 제공했다. 그 중에는 나중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태어나게 되는 율리우스 가문도 포함되어 있었다.

또 클라우디우스 가문도 로마 초기에 5000명이나 되는 일족을 이끌고 로마로 이주한 이민 가문이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기원전 312년에 아피아 가도를 건설한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이며 많은 집정관을 배출한 명문가였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양자가 되어 2대 황제가 되었던 티베리우스도 이 클라우디우스 가문 출신이었으며 제4대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그의 조카였다.

로마 제국의 문을 열은 황제들이 로마로 편입되었던 가문 출신이었다는 점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다. 아마도 두 가문에서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자신의 조상이 어떻게 로마로 이주해왔는지를 늘 이야기해주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개방성은 율리우스 가문의 역사 속에서 계속 이어져왔다. '율리우스 시민권법'은 로마인과 이탈리아인의 구별을 없애고, 모든 자유민이 로마 시민권을 획득할 수 있도록 승인한 법으로, 갈등의 결말을 공존공영의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로마인의 성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이 법을 통해서 로마는 반란과 전쟁을 되풀이하던 연합 도시 국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되었다. 이 법을 제정한 사람이 율리우스의 큰아버지뻘 되는 인척이었고 그의 이름을 따서 '율리우스 시민권법'이라 이름 붙여졌다.

그런 가문에서 성장했기에 속주민들에게도 로마 시민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로마에 동화시킨다는 정책을 율리우스와 아우구스투스도, 그리고 티베리우스 황제도 동의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로마인의 개방성과 관용정신은 가문의 이름을 타고 자연스럽게 로마 정신으로 구현되었으며 로마의 명문가는 공동체의 정신을 떠받치는 기둥과도 같은 역할을 하였다.

명문가의 자녀는 현장에서 태어난다

▲ 판테온
ⓒ 한길사
로마의 가족 제도는 가장의 부권을 중심으로 하는 대가족제도였다. 어렸을 때는 어머니와 그리스인 가정교사를 통해 교육받았지만 어느 정도 자란 뒤의 교육은 아버지가 주관하였다. 로마의 아버지는 아들을 자신이 일하는 현장에 심지어는 전쟁에도 항상 데리고 다녔으며 절대 후방에서 보호하지 않았다.

자마 회전에서 한니발 군대를 격파하고 승리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17세 때부터 아버지와 함께 전쟁에 참가했다. 그는 포에니 전쟁에서 아버지와 숙부가 전사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로마의 명문가는 그들의 부와 명예보다는 그것을 지킬 수 있는 그들의 정신을 물려주려고 했고, 그것은 현장에서 전수되었다.

로마 명문가의 자제들은 가진 부와 권력이 아무리 크더라도 반드시 거쳐야 할 코스가 있었다. 군복무와 원로원 의원, 지방 속주에서의 근무 등 군대에서의 경험과 실무적인 경력을 쌓아야 했다. 이러한 실제적인 능력을 중시했던 고대 로마 시대 명문가를 연상시키는 세계적인 가문이 있다. 에릭슨이라는 통신기기 회사와 일렉트로룩스라는 가전 회사를 포함 100여개의 계열사를 일구어낸 스웨덴의 발렌베리 가문이다.

발렌베리 그룹은 스웨덴 주식시장 총액의 절반, 국민 총생산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시민들이 스톡홀름 시청 앞 광장에 전 재산을 기부하여 재단을 설립한 크누트 발렌베리의 동상을 세웠을 정도다.

발렌베리 가문에서 눈에 띄는 점은 가문의 기업을 승계받기 위해 해군 장교로서 복무하는 것이 의무라는 사실이다. 또한 부모 도움 없이 명문대를 졸업하고 해외 유학과 국제적인 금융회사에서의 근무 등을 통해 충분한 경험과 폭넓은 인맥 네트워크를 쌓는 것이 요구된다.

마이크로소프트사를 설립한 빌 게이츠를 흔히 가난한 집안 출신의 자수성가한 사업가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빌 게이츠는 변호사 아버지를 둔 미국의 전통적인 명문 귀족 출신이다.

빌 게이츠는 20세가 되기도 전에 자신의 사업을 시작했지만, 그 과정에서 아버지의 도움을 받은 적은 없었다. 빌 게이츠의 아버지도 만일 자신이 아들인 빌 게이츠에게 많은 재산을 상속해주었다면 마이크로소프트사를 세우지 못했을 거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명문가로서의 가문의 명예와 특권은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쉽게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철이 두드리면 두드릴수록 강해지고 사용하지 않으면 녹슬어버리는 것처럼 진짜 명문가는 언제나 대가를 치러야 하며 결코 현장을 떠나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로마의 명문가도 발렌베리 가문도 알고 있었다.

왜 최부잣집에서는 유명한 인물이 나오지 않았을까?

▲ 님의 수도교 '퐁 뒤 가르'
ⓒ 한길사
'한국의 명문가'하면 대표적으로 꼽히는 경주 최부잣집은 '사방 100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가훈으로 유명하다. 그 외에도 '재산은 만석 이상을 모으지 말라', '흉년기에는 남의 논밭은 매입하지 말라'는 원칙도 있었는데, 사회적 약자를 돕고 더 가진 것을 사회로 환원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현한 가문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한국의 명문가는 국가를 위해 기여한다기보다, 자신의 집안을 보존하려는 의지가 더 강했던 듯 같다. 1600년대 초반부터 12대, 300년간 만석꾼을 지낸 최부잣집의 첫째 가훈은 '진사 이상을 하지 말라'였다. 흉년기에 백성들을 구제하고 검소한 생활을 강조하는 반면, 사회 참여적인 활동은 자제하였던 것.

물론 정쟁에 잘못 휘말리면 순식간에 멸문되었던 조선시대를 생각해 볼 때, 이러한 탈정치적인 태도 때문에 12대에 걸친 가문 유지가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이는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단순히 한 집안의 의지 문제가 아니라 사회 시스템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유력한 명문가는 사회의 문화와 제도라는 울타리 안에 서 있는 나무와 같아서, 속한 공동체의 토양에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열매를 돌려줄 수는 있지만 뿌리를 옮길 수는 없다. 조선이 관리형 인재가 중심이었던 정치 제도를 가지고 있었지만, 로마는 군사와 행정 양쪽의 능력을 고루 갖춘 실무형 인재 중심의 정치 체제였다.

라틴어로 씌어진 로마 최초의 역사서 <기원론(起原論)>을 저술하여 뛰어난 문인으로 알려진 카토는 제2차 포에니 전쟁에 참가했던 군인이었으며 집정관으로서 에스파냐를 통치하였던 정치가이기도 했다. 조선 시대의 명문가와 로마 시대의 명문가의 가장 큰 차이는 여기에 있다.

로마는 속주민들에게도 로마 시민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고 실패한 장수에게도 다시 기회를 주었던 개방적이고 관용적인 문화를 갖고 있었다. 문관과 무관의 차별이 존재했던 조선시대에서 여러 방면에 종합적인 리더십과 교양을 갖춘 지도자를 양성한다는 것은 사회제도적으로 한계였다. 시오노 나나미가 <로마인 이야기> 전체를 통해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강조하면서도 '개인의 책임감에만 의존해서는 체제가 존속하기를 바랄 수 없다'고도 지적한 바와 같이, 명문가의 뿌리는 비옥한 시스템의 토양에서 깊어진다.

명문가의 조건

▲ 카라칼라 목욕장
ⓒ 한길사
명문가의 조건은 부나 명예가 아니다. 오랜 전통의 명문가는 좋은 가치를 가지고 있는 선조와 그 뜻을 이어가려는 의지가 있는 똑똑한 후손의 합작품이다. 무지한 부모와 한심한 자녀는 결코 명문가를 만들 수 없다. 천년동안 존속했던 로마 제국은 확장된 명문가다.

로마 제국은 씨족 연합체로 처음 출발할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공동체의 주요 가치관 - 패자를 동화시키고 상대방의 문화를 인정하는 관용 정신과 가진 자로서 사회에 공헌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정신-을 지도자층을 비롯하여 로마 시민들, 심지어 노예나 속주민들과도 폭넓게 공유했다.

시오노 나나미가 한 인터뷰에서 로마의 멸망 요인을 묻는 기자에게 자신감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 로마의 정신이 살아있는 동안 로마 군대가 속주민 출신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도 여전히 로마의 군단일 수 있었지만, 로마 시민으로서 자긍심이 사라지면서 로마 제국이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공동체의 정신을 이어갔던 로마의 명문가가 후손에게 물려주었던 최대의 유산은 긍지였다. 명문가가 명문가가 될 수 있는 이유, 그것은 로마 제국이 제국이 될 수 있었던 이유다.

로마인 이야기 1 (1판 1쇄) -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한길사(1995)


#로마인 이야기#명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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