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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구마모토현 아소국립공원 입구에 서 있는 명성황후 시해사건 가담자인 마츠무라 다츠키의 기념비.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의 가이 도시오 회장이 현장을 설명하고 있다.
일본 구마모토현 아소국립공원 입구에 서 있는 명성황후 시해사건 가담자인 마츠무라 다츠키의 기념비.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의 가이 도시오 회장이 현장을 설명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심규상
문제의 비문 내용. 그의 기념비 뒷면에 새긴 공적 내용에 "조선에 건너가 동지들과 민비사건에 관여"(오른쪽 첫 행)라고 돼 있다.
문제의 비문 내용. 그의 기념비 뒷면에 새긴 공적 내용에 "조선에 건너가 동지들과 민비사건에 관여"(오른쪽 첫 행)라고 돼 있다. ⓒ 오마이뉴스 심규상
일본의 국립공원에 세워진 한 일본인을 기리는 기념비에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행적이 치적으로 기록돼 있어 물의를 빚고 있다.

활화산이 있는 일본 구마모토현(熊本縣) 아소 국립공원 입구에는 마츠무라 다츠키(1868~1937)를 기리는 기념비(가로 1.5mX높이 1.8m)가 서 있다. 이 기념비는 이 지역 몇몇 유지들이 그가 지역발전에 공헌한 행적을 기리기 위해 1966년(소화 40년)년 세웠다.

기념비 뒷면에는 아소산 일대를 일본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도록 하는데 주역을 담당한 일 등 그의 공적이 빼곡히 기록돼 있다. 여기에 "조선에 건너가 동지들과 민비사건에 관여하고"라는 문구가 들어 있다.

이에 대해 대전·충남지역 대학 중견 교수와 시민사회단체 대표 등으로 구성된 지역정책포럼 관계자들은 최근 기념비와 문구를 직접 확인하고, 아소 국립공원관리공단 측의 기록 삭제 또는 정정 안내문 설치 등 조치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최효철 대전대학교 교수는 "한 주권국가의 국모를 시해한 일을 '동지들' 등의 표현을 사용해 마치 의로운 일을 한 것처럼 치적으로 기록한 것은 납득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대전참여자치연대 송인준 의장도 "일본인은 물론 한국인 관광객이 주로 찾는 국립공원에 조선의 국모 시해를 공적으로 기록한 기념비가 설치돼 있는 사실에 자괴감을 느꼈다"며 "관련 문구를 삭제하거나 또는 한 나라의 국모를 시해한 가담자임을 구체적으로 알리는 정정 안내문을 설치해야 한다"고 말했다.

"관련 문구 삭제 또는 정정안내문 설치해야"

명성황후 시해를 담당했던 일본인들의 단체사진. 사진의 배경이 된 <한성신보>는 당시 덕수궁 앞에 있던 신문사로 '명성황후시해사건'의 비밀 본거지로 사용됐다. 실제 <한성신보> 전 사원이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동원됐다. 현재 구마모토신문박물관에 한성신보사 사장이면서 시해사건의 행동대장격인 아다치 켄죠우 사진과 함께 전시돼 있다.
명성황후 시해를 담당했던 일본인들의 단체사진. 사진의 배경이 된 <한성신보>는 당시 덕수궁 앞에 있던 신문사로 '명성황후시해사건'의 비밀 본거지로 사용됐다. 실제 <한성신보> 전 사원이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동원됐다. 현재 구마모토신문박물관에 한성신보사 사장이면서 시해사건의 행동대장격인 아다치 켄죠우 사진과 함께 전시돼 있다. ⓒ 오마이뉴스 심규상
이에 앞서 현장을 자체 확인한 김경미 독립기념관 교육개발팀장은 "기념비에 이같은 내용을 포함시킨 것도 문제지만 한 나라의 국모를 살해한 사건을 가볍게 '민비사건'으로 써놓은 것도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같은 사실을 가장 먼저 알려온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의 가이 도시오 회장도 "한국인들의 지적에 공감한다"며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가담한 일이 매우 잘못된 일임을 기록해 아소국립공원을 찾는 관광객들 모두가 볼 수 있게 게시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가이 도시오 회장은 구마모토현 아소(郡) 지역에서 중학교 교사를 은퇴한 후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13여 년간 동분서주하고 있다.

최근에는 시해사건에 가담한 후손들을 찾아 선조들의 잘못된 행위를 알리는 일에 몰두하고 있으며 이중 2명을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는 명성황후 묘소를 찾아 사죄 참배하게 하기도 했다.

아소산이 있는 아소국립공원은 일본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일본 규슈 중앙부에 위치한 대표적 관광지로 아소 활화산 화구를 보기 위해 매년 한국인을 비롯 수 백만명의 관광객이 찾고 있다.

한편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37명의 낭인 중 21명이 구마모토현 출신이다. 구마모토는 지리적으로 한반도와 근접해 있어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비롯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대의 훈련 양성소 등 대륙침략의 전초기지로 역할해 왔으며, 지금도 오오야노바루에는 자위대 훈련장이 있고 미·일합동군사훈련이 열리고 있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략해 임해군과 순화군을 포로로 끌고간 무장 가등청정(가토 기요마사) 또한 구마모토의 영주였다.

명성황후 시해 가담, 마츠무라 다츠키는?
<한성신보> 입사... 계동소학교 교사도

▲ 지역정책포럼 관계자들이 일본 아소국립공원 입구에 새겨져 있는 마츠무라 다츠키의 공적 내용을 살펴보고 있다.
ⓒ오마이뉴스 심규상

마츠무라 다츠키(松村辰喜,1868-1937)는 아소에서 태어나 15세때 소학교 교사를 시작으로 21세 나이로 교장에 등용됐다.

이후 당시 한성신보사 사장으로 한성에 있던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행동대장격이였던 아다치 켄죠우(安達謙藏, 1864-1948)의 요청을 받고 한국으로 건너와 <한성신보>사에 입사했다.

<한성신보>는 일본 외무성이 한반도의 침략을 위해 기밀보조비를 지급해 경영을 도운 신문사로 '명성황후시해사건'의 비밀 본거지로 사용됐다. 실제 명성황후 시해에는 <한성신보> 전 사원이 동원됐다.

마츠무라는 시해사건 가담 직전에는 한성에 설립(1895년)된 소학교인 계동소학교에 교사로 배치됐다. 계동소학교는 소학교령이 공포돼 한성의 4곳에 설립된 학교 중 하나로 마츠무라 등 을미을숙의 교사였던 일본인 네 사람이 각각 배치했다.

시해사건 관련자들은 일본 히로시마 재판에 회부됐으나 증거불충분으로 모두 무죄 방면됐다.

마츠무라 다츠요시 또한 무죄방면됐고 이후 구마모토시의회의원, 구마모토현 기성회 상임이사를 역임하는 등 주요 요직을 거쳤다.

이후 아소국립공원기성회를 창립, 아소산 일대를 일본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시켜 구마모토현 근대문화공로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현재의 아소산 등산 도로도 그가 계획해 조성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명성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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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천리 (牛步千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 천천히, 우직하게 가려고 합니다. 말은 느리지만 취재는 빠른 충청도가 생활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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