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성씨 없는 냉면평양 가서 젖가슴 살짝 내비치면 평양냉면함흥 가서 아랫도리 은근슬쩍 내보이면 함흥냉면진주 가서 퇴기처럼 배시시 웃으면 진주냉면 나, 줏대 없는 냉면맛국물에 허리춤 반쯤 담그면 물냉면고추장으로 알록달록 마사지하면 비빔냉면 동치미국물에 알몸 풍덩 빠뜨리면 동치미냉면생선회 은비녀처럼 예쁘게 꽂으면 회냉면나, 계절 모르는 냉면대가리 든 거 없는 놈 겨울이 제철이라 우기고사람 잡는 선무당 여름이 제철이라 우기지만메밀꽃 깡그리 따는 소리 마시라나 봄 여름 가을 겨울 다 품고 있느니웃기는 소리 마시라너 나만큼 많은 이름 가져 보았느냐 너 나만큼 줏대 없는 평화 가져 보았느냐 너 나만큼 계절 없는 자유 누려 보았느냐 너 나만큼 많은 사람 주린 배 채워 보았느냐 - 이소리, '평양 물냉면을 먹으며' 모두
날씨가 푹푹 찐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숨이 턱턱 막힌다. 뜨겁게 달아오른 선풍기가 내뱉는 바람도 후텁지근하다. 졸졸졸 흐르는 냇물마저 쨍쨍 내리쬐는 바늘햇살에 열 받았는지 발을 담궈도 미지근하기만 하다. 끈적끈적 온몸을 파고드는 무더위를 이기기 위해 시원한 얼음물을 벌컥벌컥 마셔도 돌아서면 또 갈증이 난다.
기운이 하나도 없다. 지친 몸을 달래기 위해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먹고 싶어도 입맛이 통 나질 않는다. 그렇다고 하루 종일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얼음물만 끼고 앉아 있을 수도 없다. 이럴 때 눈앞에 생생하게 어른거리는 음식이 차디찬 얼음물을 헤집으며 빙하처럼 불쑥 솟아오른 평양 물냉면이다.
밍숭맹숭 은근하게 다가와 입속 깊숙이 스며드는 국물 맛과 쫄깃쫄깃 툭툭 끊어지는 향긋한 면발이 끝내주는 평양 물냉면. 평양 물냉면은 폭염경보가 내려진 요즈음 기운 없고 입맛 없을 때 한 그릇 후루룩 마시고 나면 온몸에서 에어컨 바람이 나오는 것처럼 시원해지면서 잃어버린 기운까지 되찾아주는 여름철 별미 중의 별미다.
평양에는 평양냉면, 함흥에는 함흥냉면이 없다 메밀가루에 녹말을 약간 섞어 반죽해 만든 국수를 소 사골, 사태, 양지를 오래 고아낸 맛국물에 말아먹는 물냉면. 냉면은 조선시대 때부터 즐겨 먹었던 우리나라 고유의 전통음식이다. 북한음식인 냉면은 예전에는 추운 겨울철에 북한 사람들이 뜨거운 방구들 아랫목에 앉아 이열치열처럼 차가운 맛을 즐긴 특미다.
냉면, 하면 평양냉면과 함흥냉면을 으뜸으로 치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작 평양에 가면 평양냉면이란 음식은 없다. 함흥에 가도 함흥냉면이란 음식은 없다. 그저 '냉면'이란 음식만 있을 뿐이다. 하지만 남한 사람들은 북한음식인 냉면을 구분하기 쉽게 물냉면은 평양냉면, 비빔냉면은 함흥냉면이라 불렀다.
평양식 냉면과 함흥식 냉면의 차이점은 메밀과 고구마 전분이 반죽을 할 때 얼마나 더 들어가느냐에 달려 있다. 평양식 냉면은 메밀가루가 60% 이상 들어가 쫄깃하면서도 씹으면 톡톡 잘 끊어지는 향긋한 맛이 그만이다. 하지만 함흥식 냉면은 고구마 전분이 메밀가루보다 더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질긴 맛이 특징이다.
냉면은 세대를 가르는 잣대 역할을 하기도 한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메밀이 많이 들어가 씹으면 잘 끊기면서도 싱겁고 깊은 맛이 나는 평양식 냉면을 즐긴다. 하지만 나이가 적은 젊은 층으로 갈수록 고구마 전분이 많이 들어가 쫄깃하면서도 잘 끊기지 않는 매콤한 맛이 나는 함흥식 냉면을 좋아한다.
40여 년 세월이 빚어낸 손맛, 손님 북적북적 "요즈음 손님들은 겨울철보다 여름철에 냉면을 더 많이 찾아요. 냉면 맛 포인트는 쫄깃한 면발과 맛국물에 있지요. 쫄깃하면서도 툭툭 끊기는 면발을 만들기 위해서는 메밀가루와 고구마 전분을 어떤 비율로 섞느냐에 달려 있어요. 맛국물은 소 사골과 사태 양지 등을 10시간 이상 오래 고아내야 하지요." 공덕역에서 2번 출구로 나와 대흥역 방향으로 400m쯤 걸어가다 보면 염리동 사무소 옆 골목 저만치 무슨 정자처럼 아담하게 자리 잡은 식당이 하나 있다. 이 식당이 이곳에서 40여 년째 냉면을 조리하고 있는 평양식 물냉면 전문점이다. 이 집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벽면 곳곳에 붙어 있는 국회의원과 교수, 유명 연예인, 예술인들의 사인이다.
짤막한 냉면 맛 소개와 함께 금세라도 날아갈듯이 휘갈겨져 있는 이 사인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이 집 냉면의 독특한 맛과 오랜 역사를 한눈에 알 수 있다. 이 집 주인 김영길씨는 "1971년 아버지(김인주)께서 14평 건물 1층에 테이블 6개 놓고 처음 문을 열었을 때는 장사가 그리 잘 되지 않았다"고 귀띔한다.
김씨는 "지금은 손님이 미어터질 정도로 많지만 2남 2녀가 대학을 다닐 땐 아버지께서 등록금 걱정에 허리가 휠 정도였다"라며 "가까이 있는 서강대와 이대, 홍대 교수님들이 자주 찾아주셔서 겨우 꾸렸다. 90년대 초반부터 저희 집 냉면이 널리 알려지면서 갑자기 손님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고 덧붙였다.
새벽에 불 떼 저녁에 나오는 은근하면서도 깊은 맛 배인 맛국물"소 한 마리에서 나오는 사골을 솥에 넣고 끓이는데 새벽에 불을 떼기 시작해서 저녁이 되어야 진국이 됩니다. 이 진국에 양지, 사태, 우둔 등 쇠고기의 여러 부위와 과일, 채소 등도 함께 넣어 푹 고아내지요. 어머니와 매제가 맡고 있는 김포에 있는 솥 크기만 해도 웬만한 대형 냉장고 두 배 정도 크기는 됩니다." 7월23일(수) 저녁 7시. 한글문화연구회 박용수 이사장과 시인 이승철, 김이하 등과 함께 찾은 평양식 물냉면 전문점. 미리 자리를 예약한 이 집에 들어서자 실내와 안방 곳곳에는 후루룩 후루룩 소리를 내며 물냉면을 먹는 손님들로 빼곡하다. 실내에는 줄을 서서 기다리는 손님들도 여럿 있다.
이 집 물냉면이 대체 얼마나 맛있기에 이 무더운 여름철에 줄까지 서가며 차례를 기다리고 있을까. 혼잣말을 지껄이며 예약된 안방에 앉아 수육과 물냉면(7천원), 빈대떡, 소주를 시키자 밑반찬으로 배추김치와 무김치가 달랑 나온다. 한 가지 특징은 커다란 주전자에 이 집 특유의 평양식 물냉면에 쓰이는 뜨거운 맛국물이 가득 들어 있다는 점이다.
주전자를 들어 맛국물을 컵에 따라 맛을 본다. 약간 짭쪼롬하면서도 밍숭맹숭하다. 다시 한번 맛국물을 입에 넣고 천천히 맛을 따져 본다. 은근하고 부드럽게 다가와 깊숙하게 스며드는 설렁탕 국물 같은 깊은 맛. 먹으면 먹을수록 마약처럼 자꾸만 빠져드는 맛. 맛국물과 함께 소주가 술술 절로 넘어간다.
얼음물 위 둥둥 떠다니는 빙하처럼 불쑥 솟은 면발"저희들은 누가 뭐라 해도 옛날 아버지께서 하던 방식 그대로 해요. 저희 집 면발이 다른 집보다 조금 더 굵은 것은 분창(면발 나오는 곳)을 따로 만들기 때문이지요. 물냉면에 쓰이는 맛국물도 영하 30도 이하로 꽁꽁 얼려 놓았다가 물냉면을 손님상에 낼 즈음 얼음이 동동 뜰 정도로 살짝 녹여서 쓰지요."소주 두어 잔 입에 털어 넣으며 이런저런 세상살이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쇠고기 수육과 빈대떡이 나온다. 얄팍한 수육 위에는 가늘고 길게 썬 생파가 올려져 있다. 뜨거운 맛국물을 부은 수육에선 실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소주 한 잔 다시 입에 털어 넣고 한 점 집어먹는 수육의 쫀득하고도 고소하게 감기는 맛이 자꾸만 젓가락을 붙든다.
바삭바삭 과자처럼 바스락거리는 빈대떡 맛도 고소하기 그지없다. 이윽고 이 집이 자랑하는 평양식 물냉면이 식탁 위에 올라온다. 달걀 반쪽, 고기 한 점, 얇게 썬 배와 무, 채 썬 오이가 얼음물 위에 둥둥 떠다니는 빙하처럼 불쑥 솟은 면발을 예쁘게 감싸고 있다. 40여 년 손맛이 새로운 예술품으로 태어난 것처럼 그렇게.
젓가락을 붓으로, 고명과 면발을 물감으로, 맛국물을 도화지로 삼아 물냉면이라는 그림을 천천히 그리기 시작한다. 잠시 뒤 물냉면이란 그림이 맛깔스럽게 완성된다. 멋들어지게 그려진 물냉면을 한 수저 입에 물자 쫄깃쫄깃 부드럽게 씹히며 톡톡 끊어지는 향긋하고도 깔끔한 깊은 맛에 혀가 깜짝 놀라 마구 허둥대기 시작한다.
여름철 보양식이 따로 없다"메밀국수는 무를 곁들여 먹어야 독성도 사라지고 소화가 잘 된다니깐. 그나저나 이 집 물냉면 맛도 맛이지만 양 또한 엄청나구먼. 다른 집 물냉면의 1.5배 정도는 되겠어. 마누라하고 같이 와서 한 그릇 시켜놓고 서로 이마를 맞대고 사이좋게 나눠 먹다 보면 없던 사랑도 다시 싹트겠어." - 이승철(시인) 부드러우면서도 감칠맛이 맴도는 면발을 후루룩 후루룩 눈 깜짝할 사이에 다 건져 먹고, 얼음조각이 동동 떠다니는 맛국물을 다시 후루룩 들이킨다. 아, 상쾌하고도 깨끗한 깊은 맛! 시원하고도 기막히게 다가오는 감칠맛! 온몸에 메밀꽃이 하얗게 피어나 산들바람을 쏴아아 일으키는 것만 같다.
세상에. 평양식 '닝닝한' 물냉면 한 그릇이 이렇게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줄 수 있다니. 평양식 '밍숭맹숭'한 물냉면 한 그릇이 무더위에 지쳐 맥 빠진 사람을 이렇게 기운이 펄펄 나게 할 수 있다니. 물냉면 한 그릇을 밑바닥이 보일 때까지 다 먹고 나자 폭염주의보는 물론 이 세상 온갖 걱정까지 깡그리 사라지는 듯하다.
박용수 선생은 "여름철 보양식이 따로 없다, 이 집 물냉면 한 그릇 먹고 나면 허한 속까지 든든해진다"고 말한다. 박 선생은 "메밀은 뜨거운 기를 서늘하게 안정시키는 작용을 한다. 때문에 정서적으로 쉽게 흥분을 잘하는 태양인이나 소양인 등 '양인'에게 더 잘 어울리는 음식"이라고 덧붙였다.
뜨겁다. 마치 불을 떼고 있는 가마솥 안에 앉아 있는 것처럼 땀이 줄줄 흘러내린다. 폭염경보까지 내려진 요즈음, 무더위를 피해 산과 계곡 바다를 찾는 것도 한 방편이다. 하지만 이런 때일수록 건강을 챙기는 것이 더 소중하지 않을까. 그래. 오늘은 평양식 물냉면 한 그릇으로 무더위도 사냥하고 건강까지 챙겨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