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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개편을 앞둔 어느 날, 회사에서 'PD집필제'라는 걸 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개편 이후부터 몇몇 프로그램은 회사가 정한 비율만큼 PD가 직접 글을 써야 하고, 점차 해당 프로그램과 비율을 늘려가겠다는 것이었다.

 

안 그래도 새 사장과 경영진이 들어선 이래 제작현장에는 악재만 계속됐었다. 경제상황이 나빠 제작비 삭감이 계속됐고, 스태프들을 수차례에 걸쳐 줄여왔는데, 이제 더 이상 제작비를 낮출 수 없게 되자 PD들더러 직접 글을 쓰라는 지경까지 된 것이다. 최소한 처음에는 그렇게 이해했었다. 그래서 참 곤혹스러웠다. 회사가 어렵다는데, '나는 PD이니 글을 못 쓰겠소'라고 할 수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PD집필제'에 대한 회사의 설명은 의외였다. 현장취재를 하지 않은 작가들이 글을 쓰기 때문에 팩트(fact)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였고, 글을 쓰게 함으로써 PD의 경쟁력을 높이겠다는 것이 두 번째 이유였다. 요즘말로 '이 뭥미?'다. 한 마디로 항구적으로 PD들이 글을 쓰고, 글 쓰는 전문영역인 작가는 점차(?) 없애나가겠다는 것에 다름 아닌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현재의 제작시스템을 혁명적으로 바꾸겠다는 것이다.

 

방송은 협업의 산물이고 PD는 지휘자라고 배워왔다

 

입사 이후 선배들로부터 귀가 닳도록 들은 말이 '방송은 협업'이라는 말이었다. 지나치게 잘난 체하지 말고, 전문적인 스태프들의 조력과 협력을 잘 끌어내 시너지효과를 높이는 것이 훌륭한 PD가 되는 길이라고 말이다. 그때 그 말을 금과옥조로 삼은 덕분에 그래도 '삼마이('싸구려 단역'을 의미하는 일본어에서 비롯된 연예계 속어)' 소리 덜 듣고 지금껏 PD노릇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TV프로그램의 제작 프로세스는 수많은 전문영역을 포괄하고 있다. 기획 영역에 PD와 AD, 작가, 자료조사 등이 있고, 촬영과 조명, 오디오 등이 제작에 속하고, 미술부문에 디자이너와 세트, 소품, 의상, 분장이, 기술부문에 수많은 녹화스태프와 제작편집 스태프들이 속한다. 워낙 복잡하다보니 이러한 구분도 자의적이고, 이외에도 일일이 들기 어려울 정도로 영역이 많다. 한 마디로 프로그램 끝에 올라가는 크레디트에 나온 인물들이 모두 프로그램 제작에 참여한 사람들이다. 그만큼 각 전문영역의 전문가들이 참여해 각각의 역량을 최대한 조합할 때 좋은 프로그램이 나온다는 얘기다.

 

그 중에 누가 더 중요하냐는 건 유치한 질문이지만, 굳이 대답하자면 1번이 PD요, 2번이 작가다. 외국과는 달리 PD 혼자서 프로그램의 기획부터 제작까지 전 과정을 책임져야 하는 우리나라 시스템에서는, 일단 PD가 기획의 핵심이고 제작의 중심이다. PD가 모든 것을 지휘하고, 모든 것을 책임지기 때문이다. 프로듀서와 디렉터(연출)의 영역이 나누어져 있는 서양과는 달리 PD에게 과도한 부담이 집중되어 있는 우리나라 시스템에서 방송의 발전에 따라, 프로그램이 정교해짐에 따라 불가피하게 나타난 것이 '작가'라는 시스템이다.

 

방송발전과 역사를 같이 해온 '작가시스템'

 

'작가' 시스템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82년 KBS <추적60분>이 생기면서부터다. 우리나라에서 탐사다큐멘터리 영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부족한 제작인력을 보충하기 위해 도입되었던 것이다. 그 이후 30년이 채 안 되는 사이에 시사교양부문 프로그램은 엄청난 발전을 해왔다. PD저널리즘에 대한 여러 도전과 비판도 있어왔지만, 이제 우리나라에서 시사교양 프로그램은 확고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그 근저에는 '작가'시스템이 있다.

 

KBS에 현재 편성된 시사교양 프로그램만도 40개에 달한다. 물론 대부분의 프로그램은 '작가'시스템의 강력한 지원을 받고 있다. 현재 작가들이 하는 일은 매우 다양하다. 애초부터 부족한 PD 인력을 보충하면서 동시에 '글'을 좀 더 잘 쓰는 인력군으로 '작가'를 설정했기에, 작가들은 글만 쓰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제작 프로세스에 참여하고 있다.

 

간단히 말하면 PD가 하는 역할을 나눠서 혹은 동시에 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작가들이 하는 일은 PD만큼이나 다양하다. 기획에 참여하는 일부터 구성, 출연자 선정, 촬영본 확인, 자료조사, 대본 집필, 섭외, 녹화현장에서의 조율, 편집 시 구성보완 등, 그야말로 모든 프로세스에 참여한다. 어찌 보면 PD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다만 PD는 촬영과 편집, 작가는 집필에서만 서로 명확한 영역이 나뉜다.

 

비유하자면 PD와 작가는 프로그램의 부모 격이다. 가장이야 PD이지만, 부부들처럼 대부분의 집안일을 나눠서 하고, 촬영 편집과 집필에서만 그 역할이 명확히 나눠진다. 그래서 PD들에게 작가는 단순한 스태프가 아닌 프로그램 제작의 동반자이다. PD에게 작가는 배우자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며, 프로그램이라는 같은 문제를 함께 고민하며, 그 과정에서 싸우기도 의기투합하기도 하는, 그야말로 일에서의 배우자와도 같은 존재이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그 작가시스템을 없애고 PD가 글을 쓰는 시스템으로 가자고 한다. PD들이 보기에 이것은 작가 시스템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제작시스템의 총체적인 변화를 의미한다. 그저 누가 글을 쓰느냐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BBC와 NHK 능가하는 제작시스템 원동력은 '작가'

 

 

어쩌면 그래서 이런 문제가 제기됐을지도 모르겠다. 작가의 일이 그렇게 PD와 유사하다면, PD가 글도 쓰면 되지 작가가 왜 필요한가하는 질문에서 이 일이 시작되었다는 혐의가 짙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한번 따져보자.

 

KBS의 PD는 라디오와 편성, 지역과 비제작 인원을 모두 포함해 930명이다. 국제적으로 KBS와 경쟁자인 NHK는 2570명이다. 여기에는 보도제작 PD 500명이 포함되어 있으니 빼고 나면 2070명이다. 우리보다 두 배 이상 많다.

 

프로그램 제작기간도 우리보다 두 배 이상 길다. 거기다 NHK에서는 기본적으로 PD가 편집을 하지 않는다. 전문 에디터가 있어서 PD의 지휘에 따른다. 대신 작가는 원칙적으로 없다. 전문 에디터는 논외로 하더라도, NHK와 KBS의 PD 숫자 차이만큼의 일을 작가에게 맡기고 있는 것이 우리 시스템인 셈이다.

 

KBS가 지향하던 목표가 NHK였던 때가 있었다. 그 열망이 어찌나 컸던지, BBC와 NHK와 더불어 KBS를 세계3대 공영방송이라고 자칭했던 적도 있었다. 당시로서는 가당찮은 일이었지만, 그 이후 KBS는 국제무대에서 NHK와 비교해 손색없는 방송사로 발전해왔다. 물론 국내에서도 한 때는 국민들의 가장 큰 사랑과 신뢰를 받았던 방송사로 발전했다.

 

한 마디로 NHK는 더 이상 우리에게 도달할 수 없는 먼 목표가 아닌 것이다. 오히려 효율성 면에서만 따진다면, 모든 한국적 시스템이 그렇듯이 우리 제작시스템이 BBC나 NHK를 훨씬 더 능가하고 있다. 그 높은 효율성의 중심에 작가 시스템이 있는 것이다.

 

'PD집필제', 도대체 뭘 위한 것인가

 

비정규직을 양산하면서 기업과 사회의 효율성만을 강조하고 있는 한국적 상황은 논외로 하자. PD라는 직업이 한때 최고의 배우자감으로 인기가 있었지만, 얼마나 제작환경이 나쁜지 얼마나 집에 못 들어가는지 알려지고 난 이후에는 3D업종으로 인식되고 있다.

 

PD 일이 그 정도로 노동집약적이라는 사실은 요즘 환경에서 다소 사치스러운 듯하니, 언급을 피하겠다. 어쨌든 PD더러 글을 쓰라면 못 쓸 것은 없다. 최소한의 글쓰기는 훈련되어 있는 사람들이 PD들이다. 다만, 문제는 프로그램이다. 

 

PD에게 모든 것이 집중되어 있는 현재의 제작환경에서, 다른 보완책도 없이 PD에게 글도 쓰라고 하면 좋은 글이 나올 수 있을까? 방송일정에 쫓겨 밤새워 편집하고 난 후 졸린 눈으로 쓰는 글이 프로그램의 질을 담보할 수 있을까? 선진 방송시스템에 비해 반도 안 되는 PD가 투입돼 반도 안 되는 시간에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있는데, 그나마 동반자인 작가마저 없애버리면 균형 잡힌 시각의 훌륭한 프로그램이 나올 수 있을까?

 

NHK에는 있다는 전문 에디터 지원도 없이, NHK에서는 PD가 직접 글을 쓰니 우리도 쓰라고 하면 그것이 논리적인가? 문제는 프로그램이다. PD의 존재이유도 프로그램이다. 작가 없이 PD 혼자 프로그램을 만들며, 글도 쓰는 것이 프로그램의 질을 높이는 방법이라면 우리는 당연히 그렇게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아니다. 도대체 뭘 위한 것인가?

 

'작가시스템' 무너뜨리며 시행하는 'PD집필제', 안 된다

 

다시 현실로 돌아와 보자. KBS에서는 앞에서 든 두 가지 이유 외에 작가를 없앰으로써 발생하는 제작비 절감효과를 강조했다. 내부 논의에서는 제작비 절감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절감액의 구체적인 액수까지 밝히면서 홍보를 해왔다.

 

현재 KBS 경영진이 비논리적이고 일관성이 없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만, 이렇게 표시 나게 비논리를 과시해서는 곤란하지 않은가? 요즘 KBS에서는 그동안 힘들게 쌓아올린 것들을 단번에 무너뜨리는 것이 유행이다. 신뢰도 1위 영향력 1위를 너무도 쉽게 허물어버리더니, 이번에는 프로그램의 경쟁력마저 무너뜨리려 하고 있다.

 

PD들은 언제든지 글을 쓸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제작환경이라면, 아니 지금보다 훨씬 더 나빠질 제작환경에서라면 글을 쓸 수가 없다. 쓰더라도 글맛이 살아있는, 맛깔 나는 글을 쓰지 못하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이제 시청자들은 TV에서는 글맛을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르겠다.

 

BBC도 NHK도 PD가 직접 글을 쓰느냐 전문 작가에게 맡기느냐 하는 선택은 오로지 제작진의 선택에 달려있다. PD의 특성이나 프로그램의 특성에 따라 그때그때 선택하고 있다. 'PD집필제' 이전의 KBS에서도 PD들이 직접 글을 쓴 사례는 많다.

 

과거 <TV문화기행> 이래 현재 <걸어서 세계 속으로>처럼 PD 1인 제작시스템(PD가 기획, 촬영, 편집, 글, 구성을 혼자 하는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는 프로그램도 있고, <KBS스페셜>이나 <환경스페셜> <역사추적> 같은 프로그램도 경우에 따라서는 PD들이 직접 글을 써왔다. KBS PD협회는 PD들이 자발적인 판단에 의해 글을 쓰는 일은 적극 권장해왔다. 하지만 지금처럼 강제로 정해진 비율에 따라 작가시스템을 무너뜨리면서 시행하는 'PD집필제'에는 명백히 반대한다.


태그:#KBS, #PD집필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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