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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5월 대한민국을 들끓게 하였던 사건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였다. 한국 현대사에 잊히지 않을 족적을 남기고 그는 표표히 우리 곁을 떠났다.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그가 유서에 남긴 글귀는 오늘도 옷깃을 여미도록 한다. 그것은 죽음과 삶을 하나의 순환질서로 이해하는 통합적 (도가적) 세계관의 표출이다.

죽음의 문턱에 이르러서도 앎을 향한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던 그가 세 차례를 꼼꼼하게 통독한 서책이 <유러피언 드림>이었다고 한다. '유러피언 드림'은 언뜻 보면 우리에게 생소한 개념이다. 오히려 '아메리칸 드림'이나 '코리안 드림'이 훨씬 친숙하게 와 닿는다. 하지만 명민한 독자들은 '유럽연합'과 관련한 서책이란 사실을 이내 알아챌 것이다.

귀향한 그는 무엇 때문에 방대한 정보와 자료로 넘쳐나는 <유러피언 드림>을 숙독했을까. 그것은 21세기 세계질서를 예견하고 준비하려는 성숙한 정치가 노무현의 미래기획에서 출발한다. 여전한 지구 유일의 분단국가로 남아있는 남북한 문제를 지역 블록화로 표현되는 금세기 세계정세 안에서 숙고하고 해결해보려는 의지의 일단이 엿보인다.

서책의 구성과 골자

 유러피언 드림
유러피언 드림 ⓒ
<유러피언 드림>을 끝까지 읽는 일은 쉽지 않다. 그것은 제레미 리프킨의 저작에 담겨있는 다채로운 지식과 식견, 날카로운 시각, 미래를 앞당겨 읽으려는 열망에서 기인한다. 한 가지 사실이나 정보만으로도 지은이는 여러 관점을 제시한다. 예컨대 '원근법'을 가지고 그는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이동한 근대 인간의식의 변화를 다각도로 추적한다. 

서책은 '구세계에서 얻는 새로운 교훈', '현대의 형성', 그리고 '다가오는 글로벌 시대'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미 서문에서 리프킨은 '유러피언 드림'을 '아메리칸 드림'과 비교하여 서술한다. 그것은 양자에 내재한 대조적인 성격과 현재양상 및 미래지향에서 출발한다. 이런 관점이 제1장부터 3장에 이르는 첫 번째 부분의 골자를 이룬다.

두 번째 부분은 '현대'의 개념과 형성에 관해 설명한다. 어떤 과정을 거쳐 유럽에 '현대'가 도래했으며, 그것과 결부한 자본주의와 시장경제 및 민족국가 성립이 이루어졌는지 살핀다. 그는 근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시간과 공간개념이 얼마나 비약적으로 변해갔는지 숙고한다. 그러면서도 '아메리칸 드림'과 '유러피언 드림'을 비교하는 작업을 잊지 않는다.

마지막 부분은 '유러피언 드림'의 실체를 이루는 '유럽연합'의 태동과 미래상, 성격과 특징, 그리고 21세기의 새로운 세계질서를 사유한다. 자신이 미국인이면서도 리프킨은 '아메리칸 드림'의 퇴락을 부정하지 않으며, 유럽연합과 '유러피언 드림'의 장래를 낙관한다. 그리고 그것의 아시아 판본인 '아세안'의 미래와 중국과 인도의 미래까지 예견한다.

'아메리칸 드림'의 가능성과 한계

<유러피언 드림> 곳곳에서 우리는 '아메리칸 드림'의 실체와 만나게 된다. 이른바 '세계의 용광로'라 불리는 미국의 면모를 가장 쉽고도 간결하게 드러내는 표현이 '아메리칸 드림'이다. 지은이는 그것과 거기에 기초한 미국인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아메리칸 드림이란 유럽 역사에서 얼어붙어 있다가 18세기에 미국의 해안으로 고스란히 옮겨져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꿈을 심어준 한 순간의 사상을 대변한다. 수세대에 걸쳐 미국인은 종교개혁 이념과 계몽주의 전통을 동시에 실천했다. 그 결과 미국인은 독실한 신교도인 동시에 과학탐구, 개인재산, 시장자본주의, 민족국가 이념을 가장 깊이 신봉하는 국민이 되었다." (115쪽)

'아메리칸 드림'은 개신교의 종교적 열정과 현실적인 실용주의가 결합하여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여 오늘날의 미국을 건설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세계화 의식이 형성ㆍ발전하고 있는 21세기 새로운 국제관계에서 '아메리칸 드림'은 어느덧 시대에 뒤지고 낡아버린 '백일몽'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 리프킨의 진단이다.

"아메리칸 드림은 세계가 공유하거나 다른 나라로 이식될 수 있는 꿈이 아니었다. 그것은 미국 땅에서만 추구될 수 있는 꿈이다. 아메리칸 드림은 미국의 맥락에서만 적용된다는 점이 그것을 매력적으로 만들었으며, 미국이 성공한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아메리칸 드림은 케케묵어 새로운 세계화 시대에 점점 어울리지 않는 꿈이 되고 있다." (29-116쪽)

하느님에게 선택받았다는 종교적 선민의식과 불굴의 의지로 황무지를 개척하여 성공을 이루려는 현실주의가 결합한 것이 '아메리칸 드림'이다. 현세의 행복과 내세의 구원이라는 대립항의 결합이 '아메리칸 드림'을 잉태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아메리칸 드림'을 믿는 미국인은 줄어들고 있으며, 미국적 가치는 월남전 이후 지속적으로 도전받고 있다.  
  
'유러피언 드림'과 유럽연합

종교개혁의 신학과 계몽주의 철학에 기초한 '아메리칸 드림'은 재산권, 시장, 민족국가 통치 시스템을 효과적으로 융합하여 성공하였다. '아메리칸 드림'은 물질적인 부를 위해 개인에게 주어지는 무한한 기회를 강조하며 사회복지에는 무관심하다. 반면에 '유러피언 드림'은 나날이 좁아지는 세계화 시대의 새로운 여망에 부응하는 전망이라 할 것이다.

"유러피언 드림은 개인의 자유보다 공동체 안의 관계를, 동화보다는 문화적 다양성을, 부의 축적보다 삶의 질을, 무제한적인 발전보다는 환경보존을 염두에 둔 지속가능한 개발을, 무자비한 노력보다 온전함을 느낄 수 있는 심오한 놀이를, 재산권보다 보편적인 인권과 자연의 권리를, 일방적인 무력행사보다 다원적인 협력을 강조한다." (12쪽)

100개의 민족과 87가지 언어가 공존하는 다양한 문화적 공간으로서 유럽은 보편적 인권, 공감, 자연보호, 평화공존을 지향한다. 그것을 뭉뚱그려 '유러피언 드림'이라 일컬으며, 유럽연합은 그런 꿈이 구체화된 정치ㆍ경제ㆍ문화적 실현체이다. 인류의 어떤 통치 시스템도 도달하지 못한 아스라한 이상을 추구하며 전진하는 것이 유럽연합이다. 옥스퍼드 대학교의 헤들리 불 교수는 1977년 '새로운 중세'라는 개념을 창안하였다.

"중세 시스템에서는 통치자나 국가가 영토와 인구구획을 지배하는 개념의 주권을 갖지 않았다. 군주는 아래로는 봉신들과, 위로는 교황과 신성로마황제와 권한을 나눠야했다. 만약 현대국가가 국민에 대한 권한과 국민의 충성을 요구할 능력을 한편으로는 지역과 세계적인 통치기구, 다른 한편으로 지자체와 나눠가진다면, 그래서 주권개념이 적용될 수 없는 경우가 발생한다면 새로운 중세형태의 보편적 정치질서가 생겨날지 모른다." (296쪽)

시장과 정부의 두 가지 중심축으로 민족국가가 유지되어 왔다면, 유럽연합 통치 시스템에서는 시민사회라는 제3의 축이 중요한 구실을 하게 될 것이라고 리프킨은 진단한다. 개인은 유럽연합, 정부, 지역과 지자체, 시민사회에 속하게 됨으로써 정치적인 네트워크의 일원이 되는 동시에, 다단계 통치체제의 구성원이 된다. 그리하여 보다 조밀하고 중복된 사회관계를 이룸으로써 이전보다 훨씬 안정된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21세기 새로운 세계질서를 위하여

<유러피언 드림>에서 흥미로운 대목은 25년 후의 세계상을 확고하게 예견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은이는 4반세기 뒤에는 지구상의 어떤 나라도 독자적으로 살아나갈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가 추구하는 탈출구는 유럽연합과 같은 초국가적인 정치모델이다. 북미의 '나프타', 중남미의 '메르코르수르', '아프리카 통일기구', '아세안' 등도 동시에 거명된다.

리프킨은 아세안이 유럽연합 모델에 가장 근접해 있다고 지적한다. 1999년 기준 10개국으로 이루어진 아세안에 한중일 3국이 연합하여 '동아시아 경제공동체'를 구축할 수 있다면 대단한 세력이 될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동아시아 경제공동체가 생겨나면 막강한 경제ㆍ정치세력이 될 것이다. 중국, 한국, 일본을 포함하면 동아시아 전체는 미국보다 50%가 더 넓다. 국민총생산도 유럽연합과 미국 수준에 육박할 것이다. 무역규모 또한 유럽연합보다는 작지만 미국보다 크다. 인구는 20억으로 세계전체의 3분의 1을 차지한다." (465쪽)

아세안은 한중일의 참여와 무관하게 아시아판 유럽연합을 구상하고 있다. 그들은 2020년 무렵 아세안 경제공동체 결성이 가능할 것으로 전망한다. 유럽이 그리스 과학, 로마법, 기독교, 문예부흥, 종교개혁, 계몽주의, 산업혁명 등으로 사회ㆍ문화적인 정체성을 공유한다면 (466쪽), 아세안은 유교와 불교 및 도교의 공유에 근거한 공동체 유대감이 있다.

세계가 나날이 좁아지고, 첨단 정보기술로 지구촌 네트워크가 현실화되는 시점에서 대한민국의 장래를 깊이 생각해야 하는 시점이 아닐 수 없다. 휴대전화와 전자우편, 실시간으로 연결되는 인터넷은 우리의 역사적 현재와 과거 그리고 미래를 전면적으로 사유하도록 인도한다. 과연 어떤 방식으로 남북분단을 극복하고 글로벌시대를 맞이할 것인가. 

결론을 대신하여: '동아시아 평화ㆍ경제공동체'를 창설하자!

<유러피언 드림>을 읽기 전에 나는 <대중의 반역>이나 <수량화혁명> 등에서 유럽을 발견하였다. 이미 1930년대에 유럽연합 탄생을 주장한 에스파냐 철학자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뛰어난 형안에 놀랐으며, 16세기 이후 500년 넘도록 지속된 유럽의 패권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통찰하는 알프레드 크로스비의 식견에 탄복하였다. (하지만 그들 저작에는 '유럽 중심주의' 내지는 '오리엔탈리즘'의 이데올로기와 분위기가 확고하게 감촉된다.) 

세계사를 어느 일방의 지배와 피지배가 아니라, 교류의 관점으로 이해하는 '깐수' 정수일의 <고대문명교류사>는 몇 백 년의 시간단위를 웃어버리는 대범함을 보여준다. 21세기에도 남북분단과 동서대립을 고스란히 끌어안고 있는 한반도의 난맥상에 새삼 가슴 아리다. 분단극복 이전에 확실한 동서화합을 이끌어내서 통일의 동력을 먼저 준비할 일이다.

통일한국의 완비된 조건을 가지고 '동아시아 평화ㆍ경제공동체'를 창설하는 것이 나의 간절한 소망이다. 한자와 유교 문화권에 속하는 한국과 중국, 대만과 일본의 역사와 문화에 기초하여 경제공동체를 구상하되, 한반도 비핵화에 터를 둔 평화공동체를 건설하는 구상이다. 여기에 동참하기를 원한다면 미국과 러시아를 포함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동아시아를 다자간 협력과 대화가 가능한 공동번영과 인류진보의 공간으로 만들어보자는 것이다. 이것이 단지 나 한사람의 몽상이나 백일몽으로 끝날 것인지, 아니면 유럽연합처럼 새로운 출발점이 될지 그것이 궁금하다. 다가올 21세기 중후반의 양상은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세계상과는 크게 다를 것이므로 다각적인 대비와 대안을 준비할 일이다.

덧붙이는 글 | <유러피언 드림>, 제레미 리프킨, 이원기 옮김, 민음사, 2005.



유러피언 드림 - 아메리칸 드림의 몰락과 세계의 미래

제레미 리프킨 지음, 이원기 옮김, 민음사(2005)


#유러피언 드림#아메리칸 드림#유럽연합#아세안#동아시아 평화경제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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