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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성 한국노동연구원장이 대학교수 시절의 논문을 자기표절하거나 중복게재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한두 건이 아니라 무려 17개 논문에서 다양한 표절과 짜깁기 논란이 일고 있다.

 

유원일 창조한국당 의원실에 따르면, 박기성 원장은 한 논문의 내용과 분석자료, 방법론을 다른 논문에 그대로 전재하는 방식으로 연구를 재활용했다. 박 원장은 이 같은 논문들로 성신여대와 국민대는 물론 포스코경영연구소·학술진흥재단·'두뇌한국21사업' 등으로부터 14번의 연구비를 지원받았다.

 

이번 조사는 박 원장의 전체 논문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어서 추가 의혹 논문이 발견될 가능성도 크다.

 

이런 논문들에서는 같거나 대동소이한 문장들이 전재되는가 하면, 똑같은 표나 그래프·방정식·표도 다수 발견됐다. 아예 통째로 문단이 같은 경우도 많았다. 이 중에는 논문 2개를 짜깁기해 새로운 논문을 만든 뒤 다시 외국어로 번역해서, 결과적으로 한 연구를 4개 논문으로 사용한 사례도 눈에 띄었다.

 

자기표절은 과거 데이터의 재활용으로 이어졌다. 1992년 자료를 2003년 논문에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2003년 자료를 토대로 논문을 발표하고 2년 뒤에는 같은 방법론으로 2005년 데이터만 추가 분석해 새로운 논문을 만들기도 했다.

 

박 원장은 일부 논문에서 본문 중 괄호 표시나 '…에 의하면'이라는 문구, 혹은 각주 등을 통해서 간단히 인용 출처를 표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자기표절 혐의를 벗기는 어렵다. 자기 논문을 인용할 경우에도 따옴표를 하고 출처를 밝혀야 하고, 전체를 따오지 않은 것처럼 기술하면 '표절'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예전 논문을 요약하거나 새롭게 기술하지 않고 그대로 전재한 경우는 '자기표절'에 해당한다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다. 서울대 연구지침은 "대부분의 연구데이터가 같고 대부분의 문장이 같은 경우도 이중게재에 해당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15년 동안 같은 연구로 4차례 논문 게재

 

박 원장의 이중게재 의혹 사례 중에서는 1990년부터 2005년까지 15년 동안 같은 연구내용을 4개 논문에 나눠서 발표한 '토막논문'도 두 건이 발견됐다.

 

[사례 1] 문제의 논문은 '지역차별의 경제학(<노동경제논집>, 1990)', '노동시장에 나타난 출신지역간 차이(박기성·김용민, <노동경제논집>, 2000)', '한국 노동시장에서의 통계적 차별(<노동경제논집>, 2001)', '출신지역간 임금격차의 변화(김용민·박기성, <경제학연구>, 2005)'. 이들 논문은 목차와 내용·데이터 등이 서로 겹친다.

 

예를 들어 1990년 발표한 '지역차별의 경제학' 논문에서 박 원장은 "현재 우리나라 사회의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는 지역간 갈등일 것이다, 1987년 대통령선거와 1988년 국회의원 선거의 결과는 지역간 갈등이 얼마만큼 첨예화되어있는지를 잘 보여준다"고 적고 있다.

 

박 원장은 2000년에 발표된 '노동시장에 나타난 출신지역간 차이' 논문에서도 "현재 한국 사회의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는 출신지역간 갈등이다, 1987년 대통령선거 이후 각종 선거의 결과는 지역간 갈등이 얼마만큼 첨예화되어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고 밝혔다. 10년이 지났는데도 "현재 한국사회의 심각한 문제"로 지역갈등을 꼽는 논문의 주제는 동일한 것이다.

 

2000년에 발표된 논문은 1년 뒤 '한국 노동시장에서의 통계적 차이' 논문과 다시 겹친다. 두 논문의 2장 첫번째 문단은 통째로 내용이 같다. '<표1>에 의하면'으로 표기한 부분을, 후자의 논문에서 '박기성·김용민(2000)에 의하면'이라고 바꾼 것이 유일한 차이점이다. 통계적 차별을 알아보기 위한 방정식의 모형, 그에 따른 표의 내용과 구성도 내용이 거의 유사하다.

 

[사례 2] 1998년과 2004년에 발표한 두 논문을 짜깁기해 2004년 새 논문으로 발표한 뒤, 3년 뒤인 2007년 외국학술지에 다시 영어로 발표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토막논문'과 '이중게재'에 해당된다. 문제의 논문은 '경제성장을 위한 노사관계(<한국경제의 분석>, 2004)'.

 

이 논문의 19~24쪽은 박 원장의 '노동정책에 있어서의 자유재량의 원칙 : 노사정위원회의를 중심으로(<노동경제논집>, 1998)' 논문 중 233~238쪽과 거의 유사하다. 또한 3~10쪽은 '임금과 생산성(박기성·안주엽, <노동경제논집>, 2004>의 대부분 내용(165~177쪽)과 상당 부분 겹친다.

 

이렇듯 만들어진 논문은 다시 3년 뒤 'Industrial Relations and Economic Growth in Korea(<Pacific Economic Reveiw>, 2007)'과 이중게재 의혹으로 엮인다. 두 논문은 문장은 물론, 그림·방정식·표 등이 다수 일치한다.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는 모국어 논문을 번역해 외국 학술지에 발표한 행위를 표절로 간주할지를 놓고 이견이 있다. 그러나 정확한 인용 없이 기술할 경우 역시 '이중게재'로 간주된다. 국제 학술계는 같은 논문을 서로 다른 저널에 투고하는 것도 금지하고 있으며, 이미 발표된 논문을 투고할 경우 편집자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데이터 추가해 새 논문 발표... 1992년 자료가 2003년 논문에 등장

 

[사례 3] 박기성 원장의 '불확실성, 인적자원관리, 다능화와 기업성장간의 관계(김용민·박기성, <인사조직연구>, 1998)' 논문의 6~27쪽과 '다능화와 노동생산성 성장(김용민·박기성, <노동경제논집>, 2003)' 논문의 51~62쪽에서도 겹치는 문장이 다수 나타난다.

 

이 두 논문을 발표하면서 박 원장은 1998년에 사용했던 '숙련형성조사' 분석자료를 2003년 논문에서 동일하게 전재했다. 이 데이터는 1992년에 조사된 것이어서, 결과적으로 2003년도 논문에 11년 전 수치를 사용한 것이다.

 

[사례 4] 또한 박기성 원장은 2006년 '정규-비정규근로자 임금격차(김용민·박기성, <노동경제논집>)' 논문을 발표하고, 2년 뒤 같은 방법론을 써서 '정규-비정규근로자의 임금격차 비교 : 2003년과 2005년(박기성·김용민, 2007)'이란 논문을 <노동정책연구>에 올렸다. 후자의 논문은 2005년 자료를 추가한 것 외에 별다른 차이점이 없다.

 

이 때문에 2006년 논문의 29~30쪽, 2008년 논문의 39~40쪽은 내용이 거의 똑같다. 두 논문에서 '정규·비정규근로자 임금격차' 표 역시 2008년 논문의 표본수가 5% 정도 증가하고 가중치가 적용됐을 뿐, 투입변수들의 구성과 배열이 일치한다. 임금함수를 구하는 추정방정식도 큰 차이가 없다.

 

한 연구자는 "이런 식으로 같은 방법론으로 비슷한 데이터를 계속 분석하면 해마다 논문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이전 논문과 중복되는 내용 없이 학문적 기여를 한다면 새 저작물로 인정받을 수 있지만, 기존 내용과 대동소이하면 '논문 개수 부풀리기'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어로 한번, 영어로 또 한번

 

[사례 5] 외국과 한국을 오간 이중게재 의혹 사례도 여러 번 드러났다. 박 원장은 '한국 근로자의 인적자본의 성격(<경제학연구>, 1995)' 논문에서 사용한 데이터·분석모형·표를 영어로 번역해서 1년 뒤 'Economic Growth and Multi-skilled Workers in Manufacturing(<Journal of Labor Economics>, 1996)'에 다시 사용했다.

 

문제가 된 한국어 논문의 160~162쪽과 영어 논문의 266~268쪽은 상당 부분 유사하다. 또한 이 한국어 논문 중 145~147쪽, 150~151쪽은 7년 뒤에 발표된 '한국 근로자의 인적자본 형성에 관한 연구(박기성·송병호, <한국경제의 분석> 2002)'의 41~44쪽, 44~45쪽과 다시 내용이 겹친다.

 

[사례 6] 이외에도 박 원장의 'A Theory of on-the-job Learning(<International Economic Review>, 1997)'의 61~65쪽과 '생산현장에서의 학습과 경제성장(<계량경제학보>, 2001)'의 42~48쪽에는 유사한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단, 2001년 논문에는 각주로 "이 경제의 기본틀은 Prescott and Boyd(1985)와 Park(1997)에 기초한다"는 인용 표시를 달았다.

 

 

"박 원장 표절은 '심한 수준'... 노동연구 지휘할 수 있나"

 

박 원장이 이같은 논문들로 여러 차례 연구비를 지원받은 것도 '이중수급' 의혹을 사는 대목이다. 연구기관들은 독창성을 전제로 연구비를 지원하기 때문에, 과거 논문을 짜깁기하거나 이중게재할 경우 약속 위반으로 연구비 몰수도 가능하다.

 

박 원장의 표절 의혹과 관련, 연구윤리 분야에 정통한 한 교수는 "과거에는 이같은 자기표절이 한국 학술계의 '관행'이었지만 은퇴할 때가 된 원로 학자도 아니고 외국에서 훈련을 받고 학위까지 수여한 박기성 원장의 표절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박기성 원장은 미국 시카고대학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에서는 네 단어가 같은 구절이 두 논문에 중복되는 경우에도 '표절'로 간주한다.

 

또한 이 교수는 "박 원장의 표절은 '심한 수준'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서 "한국을 대표해 노동연구를 총책임지는 노동연구원장의 지위를 감안하면 장관 후보자보다 더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장관들도 청문회 과정에서 이 정도의 표절 의혹이 불거지면 낙마하는 상황에서, 연구를 업으로 삼는 연구원장으로는 더 엄격한 기준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유원일 의원 역시 "논문 표절 의혹은 학자로서의 자질뿐 아니라 공직자로서의 자격에도 심각한 문제"라면서 "저인망식으로 전체 논문을 훑어보면 더 심각한 사례도 나올 것이다, 이후 철저한 진상조사를 통해 공직자 자격을 제한·박탈하는 강력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태그:#박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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