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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101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대장정 길에 올랐다

 

2009년 10월 15일, 우리는 101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대장정 길에 올랐다. 그것은 전라도 남쪽 끝 한 고을에서 101년 전에 벌어졌던 한의 역사를 더듬어 보는 작업이며 그들이 스스로 미래를 열어갈 수 있도록 한 발짝 디뎌주는 작업이었다.

 

필자는 아침 일찍 모처럼 고무신을 다시 신었다. 모자도 챙기고 지팡이도 손에 쥐었다. 101년 전 낙안군 폐군되기 이전의 혼이 살아있다는 조선시대 낙안읍성을 시작으로, 시. 군 경계선인 냇가와 들판을 넘고, 이 지역은 물론 남북분단의 아픔을 승화시켜 소설로써 위령제까지 올린 소설가 조정래의 벌교 태백산맥문학관까지 걷기 위해서다.

 

오늘은 특별히, 지역 사진작가인 김남표씨가 동행하겠다고 나섰다. 김 작가는 그 의미에 더해 길을 걸으면서 쓰레기를 줍겠다는 마음으로 부대자루를 들고 나왔다. "쓰레기를 줍는 것은 남이 흘린 복을 줍는 것"이라는 자위 섞인 말을 내뱉었지만 그의 진심이다. 이미 김 작가는 인근 금전산을 오르면서도 커다란 부대자루를 짊어지고 다니면서 쓰레기 줍는 것을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함께 들어야 펼쳐지는 플래카드처럼 누군가는 마주잡아줘야 한다

 

사진 찍는 것이 김 작가의 몫이라면 필자는 기록을 남기는 일이었다. 하지만 우리의 동행엔 누군가가 더 필요했고 뭔가 허전했음을 느낀 것은 첫 시작부터였다. 동문 앞에서 낙안 들판 전경이 나온 사진 플래카드를 펼칠 때 마주한 끝자락을 잡아 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오늘은 관광해설사인 나지숙씨가 그 역할을 맡았지만 내심 올해는 그 누군가 이 지역민이기를 바랐기에 작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그리고 들어간 낙안읍성에서 우리는 초가집을 잇고 있는 한 무더기의 사람들을 발견했다. 태곳적부터 집을 짓고 살면서 공동생활을 했던 그 모습처럼 서로에게 힘이 돼 짚무더기를 올려주는 사람들 사이로 부산하게 짚을 잇고 있는 사람들은 누가 누구에게 의지한다고 딱히 얘기할 수 없지만 그들은 그에게 의지하고 또 그는 그들에게 의지하면서 서로에게 힘이 되고 있었다.

 

남문을 나서 벌교로 향했다. 낙안읍성이 어떤 곳이고 왜 지금도 그곳에 남아있어야 하는가를 더 길게 봐야 할 것도 더 세심하게 봐야 할 것도 없이 초가지붕을 잇고 있는 사람들처럼 서로에게 의지하고 힘이 되면서 살아가던 우리의 어제 그리고 그보다 더 오랜 어제를 잊지 말고 알고, 배우고, 익히라는 의미였다.

 

여전히 하천가에 남아있던 쓰레기들 아쉬워

 

지난 2년여간 걷기도 하고 자전거도 타고 스쿠터, 자동차 등을 동원해 이 고장을 미친 듯이 돌아다니면서 적어도 이것 하나만큼은 지역민들이 고쳐야 할 것 같다고 느꼈던 것은 다름 아닌 누군가 하천가에 버리고 태운 쓰레기들.

 

작년 100회 자전거 행군 때 봤던 쓰레기 그 모습 그대로가 1년이 지난 폐군 101년째에도 여전히 그대로다. 만약 그런 행위를 반복하지만 않았어도 1년 동안 자연에 의해 씻기고 정화돼 그저 흔적만이 남아있을 것인데 다시 수북이 쌓여있는 것은 카메라 앵글을 더럽히고 말았다.

 

하지만 어찌 보면 쓰레기문제에 관해 손가락 총을 빗겨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지도 모른다. 행정에서 강과 강둑을 깨끗하게 정비하고 생활의 공간으로 만들고 청소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면, 주민자치에서 스스로 돌아보고 처리에 만전을 기했다면, 우리 모두가 공공에게 해를 끼치는 이런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 정색하고 주의를 줬다면 그들이 가장 친한 우리의 이웃 친척이었다고 하더라도... 보는 내내 안타깝기만 했다.  

 

갓길 없는 도로에 도로 점령한 지석묘까지

 

그리고 또 걸었다. 이제는 다리를 넘어 이제는 길다운 길을 따라 또 걷기를 시작했다. 순천시 낙안면, 보성군 벌교읍의 입간판을 지나고 있을 때 우리는 그동안 내내 갓길이 없다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면서도 입을 내밀지 않았는데 바위가 갓길을 막고 앉아있어 불편한 심정이 폭발했다.

 

이리 저리 주민들에게 물었다. 왜 저 바위가 도로가를 점령하고 있냐고...아무리 봐도 사고가 끊이질 않을 것 같은데... 아니나 다를까 이구동성 자전거나 오토바이가 들이받고 자동차도 범퍼가 찌그러지고 타이어가 펑크 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얘기한다.

 

인도에 가면 인도법을 따르라고 했던가? 시골 사람들 사고 나면 그저 "에구 니가 조심혀야지, 액땜한 셈 쳐라"고 말하고 지나가는 그 인도법(?) 때문에 그 누구도 나서서 시정하지 않으려했음을 안다. [보성군 벌교읍 연산마을 2차선 도로가에 차선까지 침범해서 누워있는 고인돌(지석묘), 사고 많다고 하니 조속히 조치하기를 건의한다.]   

 

차라리 그곳이 태백산맥문학관이 아니었기를

 

사실, 우리가 낙안군 폐군 101년을 맞아 그 억울함을 풀기 위해 나서면서 조선시대 낙안군의 치소인 낙안읍성이 출발점인 것은 이해하겠는데 그 도착지가 왜 태백산맥 문학관이어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그냥 지나치고 낙안군의 관문이며 당시 해양 전초기지였던 여자만 초입의 벌교 선소(진석마을)를 목적지로 정하지 왜 하필 분단의 아픔을 고통스러워하고 통일을 기원하는 간절한 마음만 담고 있는 소설 태백산맥문학관이어야 했을까? 아무리 외쳐도 그 분단의 고통은 이분법적으로 지역민들 속에서 나뉘어있고 아무리 통일을 기원해도 분열을 고착화시키려는 세력이 있는데 행동이 따르지 않는 통일을 향한 이상향만이 있는 소설 태백산맥문학관이었을까? 왜 나약한 태백산맥문학관이었을까?

 

결국 그것은 지역민에 대한 필자가 가진 약간의 울분이었다. 결코 나약하지 않는 태백산맥 문학관을 그토록 나약하게 만들어버린 이 고장의 지역민에 대한 말없는 호통이라 생각하면 틀림없다. "오늘 우리의 목적지는 선소가 아닌 태백산맥 문학관입니다" 라고 다시 한 번 못 박고 싶은 이유를 101년이 지난 오늘 지역민들은 곰곰이 고민해 보기를 바란다. 

 

맛있게 먹으라면서 내 놓은 할머니의 배 두 개

 

뒤돌아섰다. 우리까지 나약하기 싫어서 곧바로 뒤돌아섰다. 오던 길을 따라 다시 걸었다. 해는 뉘엿뉘엿 저물고 배로 유명한 낙안면 이곡마을앞 정자에서 허기도 채울 겸 라면이라도 먹기 위해 물을 끓였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배밭에 앉아 계시던 할머니 한분이 배 두 개를 들고 오신다. 먹어보라는 것이다. 시쳇말로 도심에서 신호등 앞에 정차한 차량 붙잡고 한손에는 칼을, 한 손에는 배를 들고 조각내 유리창 너머로 들이밀면서 안 사도 좋으니 먹어만 보라는 그런 것이 아니다.

 

팔순 노인이 지나가는 행인에게 더 많이 못 줘 미안스럽다는 표정과 몸짓으로 슬그머니 내미는 배 두 개다. 라면 국물을 먹기도 전에 벌써 우리들 배는 따뜻한 기운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래도 이래서 살고 싶은 세상이다. 아무리 울분이 있다가도 이놈의 정 때문에 따뜻한 손길 때문에 살고 싶은 세상이다.

 

어두운 터널, 마주 오는 사람이 힘이 된다

 

라면을 먹고 배도 먹고 나니 캄캄해지기 시작했다. 서둘러 짐을 꾸리고 또 다시 걷기 시작했다. 조금 걷다 보니 자동차의 전조등 불빛들이 밝게 보인다. 걸으면서 김 작가는 오늘 찍은 사진 중에서 소화다리 밑에서 찍은 사진이 맘에 와 닿는다고 말한다.

 

"다리 아래에 내려갔더니 한쪽은 밝은 세상이며 아무렇지도 않고 즐겁게 사는 세상인데 어둠이 드리워진 한쪽은 마냥 힘들게만 보였다"고 얘기한다. 그러면서 그 다리가 "너는 왜 그렇게 힘들게 사냐"고 묻는 것 같았다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러면서 "산행을 해 보면 같이 가는 사람들과 대화를 자주할 듯 보이지만 잠시 얘기하다가 중단되고 오히려 마주 오는 사람들과 인사말부터 시작해서 정상이 얼마나 남았냐는 등 더 많은 대화를 하게 된다"고 경험담을 얘기해 준다.

 

그러고 보니 같은 방향으로 진행하는 차량들의 전조등이 자신을 더 밝혀주는 것이 아닌 듯 보였다. 마주 오는 차량의 불빛이 자신이 가려고 하는 길을 훨씬 더 환하게 비춰주는 듯 보였다. 마주 오는 차량이, 마주 오는 사람이 더 힘이 되는 것이었다.

 

들녘에 갈라져있는 물줄기는 또다시 만나 함께 흐른다

 

가만히 떠 올려보면 들판에는 두 줄기 물줄기가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하나로 합쳐져 바다로 흐르고 있었다. 마주 오는 차량이, 마주 오는 사람이 더 힘이 되는 것. 낙안군 폐군 101년이 되는 10월 15일 오늘, 그 날을 기억하자는 의미에서 고무신을 신고 순천시 낙안면 낙안읍성에서 보성군 벌교읍 태백산맥문학관까지 걸으며 생각한 것은 마주 한 낙안과 벌교가 서로에게 힘이 되었으면 한다는 생각이다.

 

낙안군과 낙안군 폐군(廢郡)
현재의 순천시 외서면을 비롯해 낙안면, 별량면 일부, 보성군 벌교읍 그리고 고흥군 동강면, 대서면 일부의 땅은 옛 낙안군이었다. 하지만 101년 전인 지난 1908년 10월 15일, 일제는 항일투쟁무력화, 동학혁명진원지분산, 침략거점도시화를 위해 낙안군 자체를 없애버리고 주민들을 인근 지역 세 곳으로 강제 편입시켰다

덧붙이는 글 | 남도TV에도 실렸습니다


태그:#낙안군, #남도TV, #낙안, #벌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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