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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가을이 깊어지면서 풀잎도 단풍이 들었다. 파랗게 무성하던 잔디도 그새  생기를 잃고 불을 만나면 금방 타버릴 것 같다. 푸르름을 잃어버린 풀은 이미 풀이 아니다. 날마다 풀 뽑는 일로 '밥값'을 하시던 어머니는 그만 일거리를 잃어버렸다. 어느 날 갑자기 해고통지를 받고 땅속으로라도 숨을 듯이 안절부절 못해하는 어느 이름 모를 가장의 휘청거리는 발걸음이 어머니의 메마른 뒷모습에 겹쳐진다.

세상 모든 수분을 빨아들일 듯이 짱짱한 가을햇살 속에 가만히 앉아 있는 어머니는 더 한층 작아 보인다. 뼈에 달라붙은 가죽 속으로 흐르는 얼마 안 남은 혈액마저 금방 앗겨버릴 것 같다. 아슬아슬하다. 눈 뜨고는 못 보겠다. 그러나 눈을 감으면 더욱 선명하게 보인다. 이놈의 눈은 떠야 하는 것이냐 감아야 하는 것이냐. 그러나 이것은 뭐, 잠시의 감상일 뿐이다.

구기자는 일일이 손을 따내야만 한다. 일을 해보니 구기자농사 짓는 분들의 노고가 이해된다.
 구기자는 일일이 손을 따내야만 한다. 일을 해보니 구기자농사 짓는 분들의 노고가 이해된다.
ⓒ 김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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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보면 일거리는 집 안에서도 제법 많다. 생울타리 겸용으로 심어놓은 구기자나무 옆에 달라붙어 열매를 따는 것도 그 중에 하나다. 어머니는 쪼그리고 앉아서, 아들은 어정쩡하게 서서 빨갛게 익은 열매를 딴다. 구기자를 오랫동안 차로 마시면 흰머리가 검어진다는 둥, 어느 할머니가 이것을 오래 마시고 삼백예순 다섯 살까지 살았다는 둥, 어머니 귀에는 잘 들리지도 않고 이해되지도 않는 얘기를 해가며 열매를 따다 보니 한나절이 금방 가 버린다. 더불어 일거리도 끝났다. 아직 익지 않은 열매가 익어서 다시 따려면 적어도 사흘은 기다려야 한다. 그러면 그동안 무엇을 하나?

마당 곳곳에 결명자를 심어놓았다. 꽃도 보고 열매도 얻자는 계산속이었다. 잘 익은 열매를 따서 말린 다음 발로 지근지근 밟으면 알이 쏙쏙 튀어나온다. 금년에는 그렇게 하지 않고 어머니에게 모두 맡겼다. 손으로 일일이 하나씩 까라고 했더니 어머니는 자다가 선물이라도 받은 듯이 깜짝 반가워하신다.

이 정도면 사흘은 충분히 넘기겠지, 혼자 속으로 즐거워하며 안심하고 방으로 들어가 책갈피나 넘기다가 나와 보니 웬걸, 두 시간도 채 안 되었는데 일거리는 벌써 반으로 줄었다. 그 속도라면 한나절도 채 안 걸리겠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놀면서 하자고 했더니 어머니 왈 "일 놔두고 노는 미친년이 어딨어" 그러신다. 이럴 때 아들은 어머니의 아들임이 분명하다. 오빠가 아닌 것이다.

"밥 먹고 합시다" 하면 어머니는 부드럽게 다정한 목소리로 "알았어요" 하신다. 이때는 아들이 아니라 오빠가 된다. 그러나 다시 "아 밥 먹자고요" 하면 어머니는 "아 쬐께 남았응게 가만 있어" 하고 짜증을 내신다. 나는 이렇게 어머니의 아들이 되었다가 오빠가 되었다가 하루에도 열두 번씩 신분이 변한다.

이 많은 결명자 알갱이를 어머니 혼자서 이틀만에 까내었다.
 이 많은 결명자 알갱이를 어머니 혼자서 이틀만에 까내었다.
ⓒ 김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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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일에 대한 어머니의 집착은 상상을 초월한다. 마치 누군가 그 일거리를 빼앗기라도 할 듯이 집중적으로 파고들어간다. 이 정도면 하루는 넉넉히 걸리겠지, 해보지만 웬걸 한 두 시간 만에 뚝딱 끝내버린다. 아무 다른 생각이 없이 오직 눈앞의 일에만 몰두하는 까닭에 미시적으로는 매우 느리고 성과도 별게 없어 보이지만 결과는 언제나 놀라울 정도로 거대하다.

고구마줄기 껍질 벗기기 또한 마찬가지. 겨울이면 연탄난로 속에 넣었다가 꺼내먹는 군고구마 맛을 즐기는 것은 어머니나 아들이 똑같다. 해서 매년 마당에 몇 두렁씩 고구마를 심는다. 한 곳에 집중해서 심으면 고구마 밭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볼품이 적어진다. 그래서 구절초나 해바라기 같은 꽃이 피는 식물들 사이로 한 두렁씩 여기저기 분산해서 심었다. 이것을 보고 사람들은 가끔 "참 정신도 어지럽게 산다"고 혀를 차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꽃을 좋아하는 내 마음을 부르조와스럽다고 비판한다 해서 나를 바꿀 수는 없는 일이다.

고구마는 고구마뿐만 아니라 그 줄기가 갖는 맛 또한 대단하다. 끓는 물에 삶아서 된장에 무쳐도 좋고 국을 끓여도 좋다. 삶아서 말렸다가 추어탕을 끓이면 고구마줄기 특유의 섬유질 씹히는 맛이 일품이다. 그 일을 어머니에게 모두 맡기기로 했다. 어머니는 신이 나서 좋다고 달려들지만, 아뿔싸, 문제가 한 둘이 아니다.

그야말로 '정신도 어지럽게' 여기저기 분산해서 심어놓은 까닭에 어머니가 그것을 찾아다니지를 못한다. "고구마 밭이 어디 있냐"고, 혼자 중얼거리며 우두커니 서 있는 어머니를 인도해서 '현장'으로 들어가 보지만, 이번에는 멋대로 뻗어나간 덩굴에 발이 걸려 넘어지고, 두렁을 타고 넘다가도 "아이고매" 소리도 위태롭게 쓰러지곤 하신다. 아, 어머니의 하체가 이렇게도 부실해졌구나, 부실해져 버렸구나, 새삼스런 덩어리 하나가 목구멍을 타고 쿨럭쿨럭 올라온다.

섬유질의 제왕 고구마줄기. 삶아서 볕에 내놓자마자 물기가 빠지는데 흡사 그 모양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섬유질의 제왕 고구마줄기. 삶아서 볕에 내놓자마자 물기가 빠지는데 흡사 그 모양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 김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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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다. 어머니는 일단 '현장에서 퇴출'시키고 내 손으로 줄기를 뜯어다가 어머니에게 넘기는 방식을 택하기로 했다. 한 아름 뜯어다가 토방에 쌓아두면 어머니가 잎을 따내고 껍질을 벗기는 것이다. 이렇게 해도 내 시간은 벌 수 있겠거니, 한 아름 두 아름 잔뜩 쌓아두고 나는 방으로 쏙 들어가서 영화를 보든 책을 뒤적이든 뭐든 하여튼 멋대로 놀 수 있겠거니 했는데 아하, 이번에도 내 계산은 보기좋게 어긋나고 말았다.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하시는 건지 어머니는 줄기를 뜯어오기가 바쁘게 뚝딱 해치워 버린다. 시간차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봐야 한 두 시간 정도일 뿐이다. 이렇게 해서 족히 사나흘은 걸리겠거니 하고 시작한 고구마줄기 말리기 작업은 하루 만에 끝나고 말았다. 이제 또 무엇으로 일거리를 만든다? 밤에 잠도 안 오고, 잘 돌아가지도 않는 머리를 열심히 굴려보는데, 문득 마늘 생각이 났다.

아, 그것이다. 마늘 까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물에 불리면 손쉬운 일이 되기도 하지만, 마른 채로 그냥 깐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한 통에 적어도 오 분여, 한 접이면 백 개니까 오백 분, 시간으로 치자면 거의 하루치의 일거리가 되는 것이다.

몇 안 되는 땅콩이지만 이것도 어머니 혼자서 다 까셨다.
 몇 안 되는 땅콩이지만 이것도 어머니 혼자서 다 까셨다.
ⓒ 김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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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 수확기에 사놓은 마늘 두 접은 진즉에 어머니가 모두 까버렸다. 그렇다. 이 부문은 버렸다고 해야 말이 된다. 마늘은 그때그때 까서 먹어야 하는데 미리 까놓으니 반점이 생기는 등 상해간다. 어쩔 수 없이 모두 절구통에 빻아서 냉동실에 넣어두긴 했지만 볼 때마다 저걸 언제 다 처리하나, 여간 심난한 게 아니었다.

식당을 찾아가볼까? 그래, 그것도 한 방법이겠다. 내가 만약에 협상을 아주 잘해서 식당을 열 곳만 설득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어머니의 일거리는 그야말로 안정적으로 확보되는 것이다. 이렇게 혼자서 밤새 장군 멍군, 이장에 반장까지 다하고 다음날 마늘을 많이 사용할 것으로 여겨지는 식당 몇 곳을 들러 상황설명을 하고 도움을 청하자 마음먹고 길을 나섰는데, 주인이든 종업원이든 진지하게 받아들여주지를 않는다.

재미있다는 듯이 웃어버리거나, 어떤 사람은 요양원으로 보내라고 원하지 않는 충고를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아따 효자상 받겄소야", 하고 땅이 갈라지는 듯한 소리를 하기도 한다. 그 소리를 듣고 나니 다른 식당은 아예 들어가는 것 자체가 무서워진다. 인간의 언어가 인간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세상이 된 것인가. 이런 세상을 산다는 것은 불행이라고, 굳이 그런 말을 할 필요조차 없겠다. 그냥, 외롭다고, 그렇게나 말하자.

돌아와서 생각해보니 그 사람들도 그럴 수밖에 없었겠다 싶기도 하다. 내가 만일 어머니 드리게 국밥 한 그릇만 주세요, 했더라면 오 그러시냐, 드리지요,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무슨 뜬금없는 마늘을 까준다고 했으니, 듣는 이의 마음에 물음표가 붙어도 아마 열 개는 넘게 붙었을 것이다. 내 낯이 원체 두껍지를 못하다보니 설명도 어눌하게 수상한 점이 많게 했을 것이다. 마늘을 까준다고? 이건 또 무슨 신종 사기수법이지? 얼마든지, 충분히 그런 의심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 일거리 만드는 게 참 쉽지가 않구나. 노동정책을 담당하는 사람들 머리가 희어질 만도 하겠다. 밤새 잠을 못 자고 뒤척거리며 일자리창출, 일자리창출, 중얼거리고 있는데 문득 한 가지 그림이 떠올라온다. 뚱딴지, 일명 돼지감자. 내일은 그것을 캐러 가자. 생으로 씹어먹을 수도 있고 구워서 먹을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잘게 썰어서 말렸다가 뻥튀기 기계로 튀긴 다음 살짝 끓여내면 구수한 향기와 맛이 일품이다.

그리하여 다음날 오전 일찍 뚱딴지를 캐러 나섰다. 아직 제철은 아니지만 알은 이미 영글었다. 쌀포대로 한가득 뚱딴지를 캐서 어깨에 메고 들어오니 어머니 눈이 휘둥그레진다. "이거 엄마가 다 썰어야 해" 뚱딴지를 물에 씻어 바구니에 담아 내놓으니 어머니 왈 "그려, 그려, 칼 줘, 칼 줘" 같은 말을 열 번도 넘게 하시면서 왔다갔다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눈치다.

돼지감자는 싱싱한 사과처럼 입으로 베면 사각거린다. 칼을 대도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썰린다. 썰어서 볕에 내놓으면 금방 쭈그러든다.
 돼지감자는 싱싱한 사과처럼 입으로 베면 사각거린다. 칼을 대도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썰린다. 썰어서 볕에 내놓으면 금방 쭈그러든다.
ⓒ 김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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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뭔가 좀 아슬아슬하다. 콩 까기나 고구마 줄기 벗기는 일과는 확실히 다르다. 그러고 보니 어머니가 칼질을 해본 지도 꽤 되었다. 몸에 익은 칼질이라 아주 서툴지는 않다 해도 더듬거리는 투가 역력하다. 한 번은 두껍고 한 번은 얇다. 그래도 손가락을 베는 일 없이 잘 해나가신다. 됐다. 이 정도면 되겠다. 나는 마침내, 비로소, 안정적인 일자리를 창출해냈다는 뿌듯한 마음으로 일어섰다. 그렇게 사흘을 좋게 보냈다.

바깥 토끼 잡으려다 집 안 토끼 놓친다고 했던가. 내가 꼭 그 꼴이 날 뻔 했다. 언제 그렇게 되었는지 마당에 심어놓은 육 년생 모과나무 밑에 열매가 우수수 죄다 떨어져 있다. 작년에는 인색하게도 달랑 한 개만 열렸던 것이 금년에는 무슨 까닭인지 그야말로 주렁주렁 서른 개도 넘게 열렸다. 노랗게 익어가는 모양이 보기에 너무 좋아서 며칠 전까지도 가끔 보고는 했던 것인데 언제 그렇게 다 떨어져 버렸는지 모르겠다. 어떤 것은 벌써 흙 묻은 자리가 검게 썩어가고 있다.

모과는 육질이 단단해서 식칼로는 잘 안 썰린다. 무리하게 썰려 하다가는 팔목 근육통으로 몇날 며칠 고생해야 한다. 손가락을 베는 경우도 다반사다. 한약방에서 사용하는 작두를 이용하면 근육통도 손가락을 베여 피 보는 일도 없다. 바구니에 가득 주워 담은 모과를 물에 씻어 부엌에 앉아 작두로 썰고 있는데 어머니가 옆에 붙어 앉아서 "내가 할게, 내가 할게"하고 조른다. 어머니는 위험해서 안 된다고 해봐야 그 순간뿐이다. 듣는 순간에는 "응, 그려?"하지만 금세 다시 "내가 할게"하고 손을 내민다.

어쩔 수 없다. 작두로 썰다가 더 이상은 작두로 할 수 없는 부분을, 괜한 만용을 부리다가는 손가락이 잘려나갈 수도 있기에 중단하고 칼로 썰어야겠다고 생각한 자투리 부분을 어머니에게 넘겨드리기로 했다. 이것도 물론 내 머리가 좋지를 않아 금방 생각해낸 것은 아니고 한참이나 연구를 한 끝에 발견한 아이디어다. 그런데 어머니에게는 그것도 힘에 부친다.

"이것이 뭐여, 이상스럽네." 어머니는 칼을 한 번 대보고는 이내 고개를 갸웃거린다. 사각사각 잘 썰려지는 뚱딴지를 썰던 손맛이 아마 남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 더 이상하다. 이게 대체 뭐야? 왜 안 썰려지는 거지? 어머니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칼날을 보고, 도마 위의 모과를 보고, 한 번 더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다시 시도해본다. 그렇다고 모과가 뚱딴지로 변했을까.

"아따 이것이 뭐이다냐. 나를 이겨먹을라고 하네."
"안 되면 이리 줘요. 내가 할게."
"아니여, 나도 한당게."

모과는 다루기가 쉽지 않다.
 모과는 다루기가 쉽지 않다.
ⓒ 김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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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단호하게 자신감을 표명해 보지만, 그러나 모과는 역시 모과다. 이렇게 해보고 저렇게 해보고 여러 다양한 각도로 해봐도 칼집만 허용할 뿐 칼날을 더 이상 받아주지 않는다. 그러다가 우연처럼 한 가지 기법이 발견되었다. 오른손에 칼을 잡고 모과 위에 일단 칼집을 낸 다음 왼손으로 칼등을 지그시 누르는 순간 모과는 마침내 썰어졌다. 어머니는 이렇게 해서 나름 비책을 발견하고는 이제부터 척척 잘 썰어나간다.

하지만 보고 있는 나로서는 위태위태, 아슬아슬, 가슴 속 애간장이라는 것이 그만 녹고 타고 졸아버리는 것 같다. 저 먼 오래 전에 예약된 어떤 것이, 아이고 하는 비명소리와 함께 손가락이 베어지면서 핏물이 어느 순간 약속을 지킨다고 그만 터져 나올 것만 같다. 내가 어린 시절 무엇을 하겠다고 부득부득 조르며 덤볐을 때 어머니도 이런 심사였을까. 그랬을 거다. 물어보지 않아도 알겠다.

삶의 비밀이, 인생의 수수께끼가, 그토록 알고 싶었어도 누구 한 사람 제대로 가르쳐주는 이 없었던 그 엄청난 어떤 것들이 한 겹 두 겹 날마다 몇 겹씩 벗겨지면서 내게로 착착 안겨드는 느낌이다.

이런 어머니를 누군가는 요양원에 보내라고 한다. 그것이 유행이고,그것이 정상이란다. 그럴까. 정말로 요양원이라는 이름의 격리시설이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일까.내게는 어쩐지 그러한 논리가 더 이상 생각하지 말고 느끼지도 말고 대충 그냥 살자는 주장으로 읽힌다.


태그:#어머니의 치매, #생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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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것이 일이고 공부인, 공부가 일이고 사는 것이 되는,이 황홀한 경지는 누가 내게 선물하는 정원이 아니라 내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우주의 일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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